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인물강해

히브리인 산파

늘찬양 2012. 2. 9. 14:23

♠히브리인 산파 ♠

출 1:15-22, 2012.02.12. 늘찬양교회

 

오래 전에 평택시청에서 마련한 ‘P. E. T.(효과적인 부모역할훈련)’ 교육을 받을 때의 일입니다. 마지막 날 강의에서 갑자기 강사님께서 교육생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하시더니만 ‘낙태’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나누더군요. 맨 처음에는 머뭇머뭇 거리자 이번에는 정말 부득이한 경우를 당했을 때 ‘낙태’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사람과 그래도 ‘낙태’는 안 된다는 사람을 갈라놓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형편에 따라서 ‘낙태’도 가능할 수도 있다는 쪽으로 서있는 것을 보면서 현실과 성경의 내용이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안타까움의 아픔을 느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들도 나의 자녀가 정상아가 아닌 소아마비나 장애자로 태어날 확률이 많다거나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느니 차라리 ‘낙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사회에 낙태처럼 합법화된 살인은 이 땅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난 91년 통계자료를 보니까? 우리나라의 78.6%가 낙태는 필요 불가결한 정당한 행위라고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우리 사회의 영적 부패성과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고귀함이 얼마나 땅에 떨어져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IMF 이후 낙태수술이 급격하게 늘었다고 합니다. 경제적 사정과 양육비를 이유로 오히려 낙태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서울의 여러 산부인과에는 IMF 전만 해도 하루에 평균 3-4건에 불과하던 낙태 환자가 6-7 명으로 늘어났다고 보고합니다.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행해지는 낙태가 매년 약 55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참고: 낙태율 2009년 17.2건, 2010년 15.8건/기혼여성 낙태율은 2008년 1000명당 28.1명에서 2009년 17.1명, 미혼여성의 낙태율은 2008년 1000명당 13.9명에서 2009년 14.1명. 소득별로는 지난해 기준 300만원~500만 원 이하 소득자에서 낙태율이 37.5% 이었다. 보건복지부가 연세대 산합협력단(책임연구원 손명세 교수) 보고>

오늘 우리는 아이를 강제로 낙태를 시키라는 아니 그 보다도 더 큰 살인인 태어난 즉시 아들이거든 죽이라는 극비의 살인지령을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히브리인의 생명을 살린 두 히브리인 산파 ‘십브라’‘부아’를 살펴봄으로서 이 땅에 자행되고 있는 여러 사탄의 역사와 이에 대처하기 위한 우리의 영적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

범사에 감사하며 항상 자족하기를 쉬지 않는 인내의 사람 요셉을 하나님은 축복하사 요셉을 애국의 국무총리로 세워주시고 마침 가나안 땅의 기근으로 인해 야곱의 한 가족이 요셉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애굽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이때 야곱의 전 가족 수가 70명이었는데 이들이 몇 세대가 지나가는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의 수효가 크게 증가하여 하나의 국가와 민족을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가 되자 요셉의 공로와 헌신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 바로가 일어나 이스라엘 백성의 번성을 불안하게 여긴 나머지(출1:10) 노역장에 감독들을 세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감독하도록 하였으며 또한 고역을 통해 그만큼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면 부부관계를 적게 하여 아이들의 출생을 줄여보려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학대와 고난을 당할수록 체력이 더욱 강인해져서 더욱 건강한 아이들을 낳는 것을 보고서는 왕은 다른 묘책을 극비로 꾸미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히브리인 산파들을 시켜서 아낙네들이 아이를 낳을 때 “남자아이거든 죽이고 여자아이 이면 살려주라.”(출 1:16)는 극비 명령을 내렸습니다.

Ⅱ. 히브리인 산파 ‘십브라’와 ‘부아’

이 같은 명령을 받은 히브리인 산파 ‘십브라’‘부아’는 맨 처음 당황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어떤 학자들은 ‘십브라’‘부아’가 히브리 출신의 산파가 아닌 애굽 여인으로서 단지 히브리인들의 산간을 맡아 일하는 산파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십브라’‘부아’를 히브리인 여자로서 셈족의 여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십브라’‘우아하다, 아름답다’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부아’는 ‘소리를 외치는 자’의 뜻으로서 이 두 산파는 바로 왕의 명령을 불이행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 하에서 지혜롭고 우아한 방법으로 써서 히브리인 아이들을 살려주었는데 그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은 출애굽기 1장 19절에 있는 대로 “우리가 산모의 진통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가 보지만 워낙에 히브리 여인들은 노동으로 단단하게 단련되어진 몸이라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해산하므로 우리들도 어찌할 수가 없나이다.”하며 지혜롭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명령에 대한 불복종으로 인한 자신들의 죽음을 피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십계명에 명령한 제 육 계명 “살인하지 말라”(출 20:13)는 말씀도 지켜나갔습니다.

Ⅲ. 히브리 아이들을 죽이려는 이유

우리는 여기서 바로 왕이 왜 갓 태어난 히브리 아이들을 죽이려고 하였으며 또 힘든 노동과 학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렸는가? 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또 히브리 산파들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육신적인 이유

첫째: 이스라엘 백성의 놀라운 수적 증가 추세로 인한 정치적 불안감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마치 이라크 내에 있는 쿠르드족이 반 후세인 운동을 일으키며 반란을 도모하여 끝내는 후세인을 축출하였듯이, 또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정권에 반대하는 북부동맹 세력이 있는 것처럼 언제 자신과 나라를 정복시킬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둘째: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력을 파괴시키고 그들이 타고난 많은 자질을 그들에게서 빼앗고자 함입니다.

셋째: 과도한 노동으로 인해 그들의 건강을 파괴시켜 그들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를 줄이려고 한 것입니다.

넷째: 그들의 자녀들을 나면서부터 노예로 만들어 이스라엘인들의 결혼의욕을 저하시킴은 물론 아들은 없고 딸만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애굽인과 혼인을 하다보면 애굽인화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히브리 민족에게서 이탈하여 애굽 인에게로의 병합을 통해 더 이상 기억에도 남지 않도록 이스라엘 민족의 씨를 말리는 그런 작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2. 영적인 이유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왜 야곱의 후손들을 애굽 땅에서 멸절 당하게 하시는가? 하는 의아심과 궁금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핍박과 고난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인 깨달음을 주고자 하심입니다.

첫째: 백성들의 마음을 애굽에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애굽은 세상입니다. 애굽은 부모나 돈이나 쾌락을 나타내는데 비유로 많이 쓰입니다.

둘째: 백성들로 하여금 기꺼이 애굽을 떠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학대와 고난을 통해 애굽 즉 세상에서 부모에게서 안주하려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약속의 땅을 바라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바로를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셋째: 가나안에 대한 생각을 보다 사모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안식처는 육적인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저 하늘나라 영원한 처소에 예비해놓으신 천국입니다. 이 땅은 잠깐 쉬었다 가는 휴게소와 같은 곳입니다.

넷째: 자기와 인간에 대한 신뢰를 깨뜨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보다 요셉의 권력을 더 의지하고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신뢰치 말고 의지하지 말고 네 부모나 네 형제라 할지라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섯째: 하나님께 나아와 부르짖고 간구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기도 속에 꿈과 야망은 물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에게 바쁜 일과를 통해 기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다보니 현대 기독교인들이 믿음의 생기, 믿음의 전도를 잃어버렸습니다.

사회가 각박해지고 어두워질수록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도를 통하여 정체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숨은 의도 때문에 바로는 제 아무리 높은 권력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수중에 넣으려고 했지만 자신의 뜻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넘어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섬기는 십브라와 부아와 같은 작은 일꾼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과 순종이 있다 보니 하나님의 백성들을 넘어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Ⅳ. ‘십브라’와 ‘부아’의 용기 있는 행동의 원동력

그렇다면 히브리인 산파 ‘십브라’‘부아’에게 주어진 이 같은 믿음과 용기와 결단력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본문 17절에 있는 대로 “애굽의 바로 왕 보다도 하나님의 진노를 더 무서워하였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십브라’‘부아’는 바로 왕의 명령에 순종하므로 일시적인 평안과 육신 적인 고통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한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일인데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사람이 그 마음대로 살리고 죽이는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인간의 명령이 어느 모로 보나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위배된다면 그것이 세상 왕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복종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기에 ‘십브라’‘부아’는 담대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행 4:19,5:29).

둘째,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9절에 기록된 대로 히브리 여인들의 해산의 고통은 애굽의 여인들보다 더 쉽고 더 빨리 끝났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깁니까? 혼자서 아이들 다 낳아버리더라는 겁니다. 말 그대로 하자면 순산의 기쁨입니다. 그것도 자기들이 가기도 전에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산모와 어린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성장하므로 자신들의 도움이 별로 필요하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며,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분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희생정신 때문입니다.

이 두 여자는 생명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 누굽니까? 죽음을 이긴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이긴 자들 아닙니까?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두 산파가 왕의 명을 어겼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행하는데 목숨을 건 베팅을 한 겁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돌아보십니다. 이런 자를 살려주십니다. 무릇 죽으려 하는 자는 살 것이고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딤후 2:11).

왜 그러면 이런 희생, 생명을 걸고 이런 일을 했을까요? 생명에 대한 애착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명을 거는 모든 사람들은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생명의 대한 애착이 없으면 어떻게 산파를 하고 어떻게 아이를 받겠습니까? 이들은 적어도 히브리민족 중의 최고의 산파였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믿고 섬기며 따르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하고 바라는 것 이상으로 나를 더 사랑하시며, 돌보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확신과 믿음이 ‘십브라’‘부아’에게 있었기에 바로 왕의 명령을 담대하게 거절하고 아이들을 살린 것입니다.

Ⅴ. ‘십브라’와 ‘부아’가 받은 축복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는 바로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아이들을 살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족을 위해 죽기를 각오한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명을 거스른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집이 더욱 왕성케 되는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21절입니다.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여기에 “경외하다”(21절)는 말과 17절에 있는 “두려워하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같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함으로 뜻을 정했을 때에 어떤 축복을 받았습니까? 왕성함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뜻을 정했을 때에 어떤 복이 임하였습니까? 히브리 소년들이 바벨론 땅 한복판에서 흥왕의 복을 받았습니다. 왕성하다는 말의 원래의 의미가 ‘확립하다, 기반을 잡다,’ 이런 단어의 뜻입니다. 왕성함이 무엇입니까? 무작정 잘되고 번창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성함이란 불편한 세상 속에 들어가서 그들 속에서 자리를 틀어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는 말씀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남자 아이들을 죽이라”(16절)는 잔인한 명령을 내렸던 바로 왕과 애굽인들은 훗날 10번째 재앙으로 모든 애굽의 장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보응을 받게 됩니다(12:29, 30절). 이것이 역사의 순리입니다.

히브리 산파들이 애굽의 권력자와 지도자들에게는 매우 괘씸한 여인들이었지만, 하나님께는 아주 사랑스런 여인들이었습니다(20절).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산파들의 집을 왕성케 하는 은혜를 베푸셨으며, 백성들에게는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케 하는 축복을 더하셨습니다.

마치 사르밧 과부가 자신의 마지막 음식을 바쳐 엘리야를 대접하였을 때 가뭄이 끝나는 그 날까지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가득 차 있고 기름통에는 기름이 가득 담기는 은혜와 기적이 계속되어 나타났듯이(왕상 17:16) 십브라와 부아의 가정에 축복이 넘쳐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을 쫓아 믿음의 길을 따른 섬김의 행동은 반드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소리를 더 크게 듣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약점은 세상에 들어갔을 때에 악과 저항할 능력이 부재되어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합리주의 기복주의 이기주의신앙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원래 개신교 프로테스탄트는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입니다. 악과 저항하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권력과 야합하지 않는 기독교가 되어야 하는데 권력와 물질의 시녀 놀음을 하다가 유럽의 기독교가 망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사탄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물질과 권력과 세상 즐거움으로 끌어들여 죽이려고 안달입니다. 오늘도 저는 그 추운 길거리에서 저를 붙들고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까?”고 붙드는 이단들의 모습을 보고 “죽이고 싶도록 당신들이 밉다.”며 일침을 가했는데 언제까지 한국 기독교는 점잖은 척 전도하고 있겠습니까? 공격적인 전도가 필요합니다. 진돗개 전도, 신바람 전도 가지고 안 됩니다. 전도가 무슨 놀이입니까? 유행가 바람입니까? 순교자적인 영성이 필요합니다. 직장이나 일터에서 내가 기독교인임을 드러내놓고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는 역동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 말은 손해 볼 각오, 왕따 당할 각오를 하고 기독교인임을 드러내며 삶으로 예수 증거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의 집안을 풍성하게 흥황토록 채워 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히브리의 두 산파 ‘십브라’‘부아’는 바로 왕의 명령과 죽임을 두려워하지 않고 히브리 여인들의 아이들을 살려주었건만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며 증거 하는 일에 무엇을 두려워하며 주저하고 있습니까? 혹시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의식주 문제에 가로막혀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친구들로부터 이웃사람들로부터 소외감을 당하고 놀림을 당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것 하나만은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더 큰 것을 차지하고 누리기 위해서는 일시적인 작은 손실 정도는 감수하고 나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실패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큰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더 큰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영혼구령의 사역입니다.

오늘도 세상에 빠져 돈이 주는 쾌락과 즐거움에 빠져 육체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져 자신이 바로 왕인 것처럼 착각하며 행동하는 자들과 마귀와 사탄의 유혹과 눌림에 빠져 절망하며 고통당하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찾아가 참 구원의 기쁜 소식과 하늘나라의 영원한 처소와 미래에 대한 영적 소망을 심어주며 어떠한 유혹과 환난이 와도 굴하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일에 저와 여러분들은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세움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왕의 명령이기 때문에 세상의 흐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아이를 낙태시키거나 유산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정의와 생명을 위해 오늘도 힘차게 복음을 증거하며 담대하게 믿음 안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적 산파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