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람미 여인의 사랑
아 6:2-3,2012.06.24.늘찬양교회
아가서는 솔로몬과 슬람미의 사랑의 노래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아가서란 말은 아름다운 노래라는 뜻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요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런데 아가서는 사실은 우리 주님과 우리 성도들의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와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은 우리 주님을 가리키고 술람미는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사실 아가서는 이해하기가 너무 힘든 책입니다. 순서도 없고 논리도 없는, 사랑의 고백들을 그저 모아놓은, 이해하기 힘든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술람미 여인에 대한
표현을 중심으로 주님께서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시는가? 를 살펴보는 은혜의 시간을 갖기를 소망합니다.
Ⅰ. 술람미 여인의 모습
1. 검으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1:5).
"검다"함은 흑색을 의미하기보다는 담색을 의미합니다. 술람미 여인은 팔레스타인 북부 갈릴리에서 온 여자로서 검은 갈색의 피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희고 예쁜 피부를 갖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술람미 여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고로 ‘검으나’라는 의미에는 자신의 부족함, 죄성,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아름다운 여인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은 왕의 사랑을 받게 된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이는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8-10절에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였듯이 부끄럼과 흠이 많은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보아주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는 여인이었습니다.
2, 게달의 장막 같으나 솔로몬의 휘장 같이 된 여인이었습니다(5절).
‘게달’은 아브라함의 첨 하갈의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차남의 이름으로 게달의 자손들이 거주하는 지방을 가르칩니다(창25:13, 사21:17). 그들은 검은 털 장막에 거주하며, 방과 거실을 구분하기 위하여 ‘휘장’을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 “가치 없는 게달의 장막 같은 내 인생이 솔로몬 왕의 귀히 쓰는 휘장이 되었으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아니하리요!...”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마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아기 예수의 수태를 알리며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눅 1:30) 할 때에 마리아가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48절) 고백한 것과 같은 감사의 마음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3.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하니 흘겨보지 말 것을 당부한 여인이었습니다(6절).
"일광에 쬐여 거무스름"은 나는 본시 흑인이 아니고 다만 일광에 쬐여서 검은 것뿐이 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흘겨보지 말라"함은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성장하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얼굴이 저렇게 까매 가지고서 어떻게 시집이나 갈까?”는 놀림을 받으며 자란 것 같습니다. 오랜 기간 이런 소리를 귀가 닮도록 들었기 때문에 술람이 여인은 무척 불안해하였을 것입니다. 열등감과 같은 자격지심도 깊은 내면의 상처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된 이유가 오빠들이 나를 뙤약볕이 내리쪼이는 포도원 밭으로 일을 내보내서 이렇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열등감에 대하여 “부모님 때문에, 선생님 때문에, 친구들 때문에, 혹은 사회의 환경적 요소 때문에 내가 백수로 있게 되었다.”며 원망하듯이 술람미 여인도 검은 피부로 인하여 심한 열등감과 원망감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 예수님은 “나를 싫어 버린바 되지 아니하시고 나를 주님의 복된 자녀로 불러주시고 귀한 사명을 맡겨주셨으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아니하리요!...”(사 53:3) 그러므로 나를 "흘겨보지 말 것"을 당부하며 자신의 존귀함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 속에는 이 같은 믿음의 변화, 사랑의 기쁨, 신앙의 담대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런 감격과 기쁨이 있어야 이 험난한 세상을 힘차게 헤쳐나 갈수 있습니다.
Ⅱ. 술람미 여인을 향한 솔로몬의 사랑
1. 여인 중에 어여쁜 자로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였습니다.
아가서 1장 15절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아가서 1장 16절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아가서 2장 10절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 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서 2장 13절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
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서 4장 1절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
아가서 4장 3절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아가서 5장 9절과 6장 1절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
이외에도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향하여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여!...”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솔로몬의 주도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모습으로 “하나 뿐인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아낌없는 사랑으로”(요 3:16)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주님의 사람은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조건 없이 주도적으로 부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요일 4:10).
2. 조건 없는 사랑으로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였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게달의 장막”과 같은 가문이 보잘 것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인이 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외모조차 “검은 색”의 피부를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왕은 아랍의 보잘것없는 게달의 유목민 술람미 여인을 조건 없는 사랑으로 받아주시고 사랑해주셨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시며 받아주셨듯이, 일곱 귀신 들렸던 죄 많은 여인 막달라 마리아를 받아주셨듯이, 수가성 여인의 내면을 생수로 채워 주시며 받아주셨듯이, 자신을 은 30냥에 팔아넘길 가롯 유다와,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할 베드로를 수제자로, 도적놈 취급을 받던 세리 마태를 제자로 받아주셨듯이 주님은 오늘도 아낌없는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지시고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며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3. 창조적인 사랑으로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였습니다.
솔로몬의 사랑은 Creative한 사랑이었습니다. 솔로몬의 눈에는 술람미의 몸과 마음과 영혼 전부가 아름답게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술람미의 몸과 마음과 영혼 전부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창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들기 같구나”(아1:15).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구나.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같구나.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아4:1-12).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구슬 꿰미 같구나. 네 배꼽은 둥근 잔 같고, 네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네 눈은 문 곁의 못 같고, 코는 레바논 망대 같구나.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나를 쾌락하게 하는구나.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구나”(아7:1-8).
완전히 눈이 먼 사랑, 모든 것이 아름답고 또 아름답게만 보이는 사랑, 그것이 창조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의 향유와 눈물과 입맞춤 등 모든 행위와 모든 움직임이 지극히 아름다운 사랑으로만 보였습니다. 너무너무 기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니라.”(눅 7:47). 그리고 마리아의 존재를 지극히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솔로몬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이었듯이 주님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러한 창조적인 사랑으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아름답게 이끌어 가십니다.
4.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사랑했습니다.
솔로몬의 사랑은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사랑이었습니다. Exclusive한 사랑이었습니다.
솔로몬의 눈에는 술람미 하나밖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가서 6장 8-9절에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배타적으로 독점적으로 사랑하시며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오직 너를 쁄라라 하리라”(사 62:4). 예수님은 사도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를 배타적으로 독점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교회를 배타적으로 독점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주셨느니라.”(엡 5:25).
이렇듯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들은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가지시고 돌보시며 세우고 있음을 믿고 오늘도 담대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5.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의 반응을 요구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사랑은 Demanding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인 동시에 받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수람미를 주도적으로 창조적으로 사랑하면서도 술람미의 사랑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술람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했고 술람미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했습니다.
아가서 2장 14절에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아가서 6장 14절에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주도적으로 창조적으로 사랑하시면서도 우리들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셨고 베드로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으시며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Ⅲ. 솔로몬을 향한 술람미 여인의 사랑
솔로몬은 우리 주님을 가리키고 술람미는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 왕 즉 주님을 대하는 술람미의 응답하는 모습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첫째로, 술람미의 사랑은 응답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사랑에 응답했습니다. “왕이 나를 그의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아 1:4). 술람미는 솔로몬이 자기를 찾아오는 모습을 보고 그 소리에 응답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아 2:8,9). 우리의 사랑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의 주도적인 사랑에 대한 응답적인 사랑입니다. 베드로도 막달라 마리아도 사울도 모두 저들을 찾아오신 주님의 주도적인 사랑에 대한 응답적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마 7: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아가 주님과의 영적교제로 통하여 더욱더 성숙되고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사 55:6)
둘째로, 술람미의 사랑은 간절함과 애절함이 묻어있는 사랑이었습니다.
술람미는 밤에 침상에서 일어나서 솔로몬을 찾아 길거리로 나갔습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일어나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아 3:1-2).
술람미는 아가서 2장 5절과 5장 8절에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술람미의 사랑은 간절하게 사모하며 찾는 애절한 사랑이었습니다. 신약에서도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찾아 이른 새벽에 무덤으로 갔습니다(요 20:1). 중세의 성도들도 주님을 찾아 들로 산으로 사막으로 바위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누가복음 21장 38절에는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애타게 기다리는 것이 성도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주님을 사모함이 별로 없습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가 쏟아져 나오고 삶이 편하다보니 전처럼 애타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기도원을 찾아 뜨겁게 부르짖는 성도들은 가뭄에 콩 나듯 너무나 적습니다. 그런데 술람미 여인은 병이 들 정도로 주님을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밤에 침상에서 일어나 찾아갈 정도로 애절했습니다. 이런 간절함과 애절함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셋째로, 술람미의 사랑은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한 사랑이었습니다.
아가서 2장 3-7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너희는 건포도로 네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주님의 사랑은 우리들에게 참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부어주시는 달콤한 사랑입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6:22)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증거 할 때에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사도행전 13장 48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사람들이 고민하며 아파하며 그 영혼과 육체가 병들어 가는 것은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경건의 삶, 5대 감사의 생활을 통해 날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감사하며 행복을 누리는 은혜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술람미의 사랑은 예속적이고 종속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아 2:16).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아 6:3).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아 7:10).
성도의 사랑은 오직 주님에게만 속하는 예속적이고 종속적인 사랑입니다. 남편을 떠난 아내의 모습이, 아내를 떠난 남편의 모습이 어찌 힘들고 어렵지 않겠습니까? 함께 힘을 합쳐 일을 해도 힘든 세상인데...호주되신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 되는 부부가 행복하듯이 우리가 주님 안에서 주님과 날마다 영적 교제함으로 통해 참된 행복과 사랑을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있기를 바랍니다.
다섯째로 술람미의 사랑은 함께 있고 함께 달려가는 사랑이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아 7:10-12).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라!”(아 8:14).
아가서의 총 결론은 함께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함께 달려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세상에 그 어디에라도 함께 달려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곳이라면 세상에 그 어디에라도 함께 달려가는 것입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가 집으로 돌아가라고 강권함에도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17)며 함께 베들레헴으로 내려갔듯이 우리는 사도바울과 같이 “푯대 되신 예수님과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바라보며 달려가는...”(빌 3:14)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대화 속에는 외모를 초월한 진정한 용서와 회복, 그리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인한 놀라운 기쁨과 소망, 그리고 서로를 향한 격려와 감사의 응답이 담겨있습니다. 성도가 세상에 사는 것은 가시밭의 백합화 같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험하고 흉악한지 믿음의 사람들이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며 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도 솔로몬과 술람미 두 사람의 사랑과 같은 능력이 있으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계달의 장막 같은 우리를, 돌보는 이 없는 들꽃 같은 우리를, 가시밭의 백합 같은 세상에서 끝없는 사랑으로 참된 기쁨과 만족과 평화와 소망을 주시며 사랑하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오늘도 우리는 푯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찬양하며 나아갑니다. 주님 영광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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