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장 호산나 호산나 (132장)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호산나 하더라」(마 21:9)
손에 종려나무를 들고 감람산 길 따라 늘어선 큰 무리들 속에 어린아이들도 함께 끼어서 ‘호산나’외치며 나귀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을 찬양하였듯이 우리들도 어린아이들처럼 순진한 마음으로 돌아가 만왕의 왕 주 예수께 기쁜 노래 부르며 호산나 찬양하자는 내용의 ‘종려주일’ 찬양으로 작사자는 영국 랭카셔 태생의 여류 찬송작가로 가난과 질병 더 나아가 사고로 불구가 되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기쁨과 활력을 잃지 않았던 제네트 트릴폴(J. Threlfall;1821-1880) 여사가 1873년 작사하였다. 찬송 곡은 1784년 헤르쪼글(Herzogl)의 카톨릭 찬미가에 실려 있던 곡조를 발췌, 본 찬송시와 결합한 것이다.
1절 호산 - 나 호산나 다 노래 부른다
수많은 아이들이 즐거운 노래로
그 품에 안으시고 복 주신 주님께
온 몸과 마음 드려 주 찬양합니다
1절, 수많은 아이들 호산나 외치며 온 몸과 마음으로 즐겁게 주 찬양하였네.
찬송가 1절에서는 시온에 오시는 주 호산나 찬송하며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에 대하여 마태복음 21장 15-16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5절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고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만세를 부르며 찬양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어린이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며 ‘만세소리’를 불렀지만 그들의 속마음은 어린이들과 달랐습니다. 많은 어른들은 예수님이 왕이 된다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보좌에 앉을 것이라고 출세욕에 들떠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만세, 만세”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당장 출세를 바라고 명예를 바라며 영광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순수하게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아마도 어른들은 그 마음속에 “아니 예수라 하는 자는 어떻게 저 순수한 아이들의 마음까지 끌어들여 자신의 영광에 사용하는가?” 분개하였을 것입니다. 마치 개 눈에는 똥만 보이듯이 말입니다. 아니면 어린아이들의 깨달음이 유치하다고 주장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모습이 유치한 어린이들의 모습과
대비되는 것에 분개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며 예수님께 노를 발하며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어린아이들의 찬양을 듣고 있다. 너희는 시 8편 2절에 나오는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고 질책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찬송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잘되고, 성공하고, 축제를 하고, 축하하고, 축하파티…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이 깊이 내려가고, 겸손하게 되고, 아주 순수해질 때, 거기서 진정한 찬송, 진정한 찬양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지금 어린이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거짓 없이 그 마음속에 우러나오는 찬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찬양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이런 순수한 찬양, 감사와 은혜의 찬양을 주님께 드려본 적이 얼마나 있습니까? 건강할 때, 일이 잘 될 때, 합격이나 취업이 됐을 때와 같이 기쁠 때에만 찬양했습니까? 아니면 바울과 실라처럼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고 억울하게 매를 맞고 그 맞은 매로 인하여 고통 속에 잠을 못 이루고 있을 때, 갑자기 다가온 마음의 평강과 기쁨으로 찬양할 때 하나님이 바울과 실라의 찬양을 기뻐 받으시고 옥터에 지진이 일어나게 해서 저들의 발목을 채웠던 착고를 풀게 하고 옥문을 열게 하고 더 나아가 간수장과 그의 가족이 예수를 믿게 하였던 역사의 찬양을 드려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기적과 열림의 역사가 없었다. 할지라도 고난 속에서 예수님으로 인해 범사에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을 드린 적이 얼마나 있습니까? 이렇게 조건 없이 고난 속에서 순수하게 찬양할 수 있는 은혜와 힘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항상 외적인 요소를 근거로 해서 찬양하려니까? 찬양이 안 되고 노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어떻게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가 그 흔한 싸구려 나귀를 타고 입성하냐? 적어도 많은 신하들과 값진 말을 타고 들어와야지...우리를 조롱하는 것이냐?”며 질책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과 실라가 한 밤중에 찬양할 때도 그 곳에 있던 간수들 중에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처럼 조롱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들이 힘들고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하나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롬 8:28)을 바라보며 감사 찬양하며 영광 돌릴 때에 조롱하며 멸시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순수한 찬양, 거짓 없는 찬양, 조건 없는 찬양을 어린아이들에게서 보았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따르는 모든 자들이 이 어린아이들처럼 찬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의 순수하고도 아름다운 찬양을 듣고서 아이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자신의 품에 안아 주시고 한 사람 한 사람 축복해 주셨습니다(눅 18:16).
사도행전 2장 47절에 보시면 초대교회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랬더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특징은 핍박이 많은 것입니다. 고난과 죽음이 풀무 불처럼 피어올랐던 시대였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는 상태, 더욱이 자신의 생활에도 어떤 특별한 변화가 없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며 늘찬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살전 5:16-18) 늘 찬양하는 삶을 살았더니 원망과 불평이 사라지고 삶에 기쁨과 행복이 넘쳐났으며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나를 중심한 찬송을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한 찬송으로, 조건적인 감사를 무조건적인 감사로 승화시켜 나갈 때 그것이 곧 “온 몸과 마음 드려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찬송가 1절), 또 그렇게 찬양할 때 주님은 어린아이들을 그 품에 안으시고 축복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를 받아주시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호산나” 찬양이 종려주일을 맞이한 우리들에게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절 저 감람산 길 따라 큰 무리 따르며
그 손엔 종려가지 흔들며 외친다
만왕의 왕 주 예수 나귀를 타시고
그 어린이들 노래 다 받아주신다
2절, 만왕의 왕 나귀타고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종려가지 흔들며 감람산 길 따랐네.
누가복음 19장 37-38절에 “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본문에 나오는 감람산은 예수님께서 만찬이 끝나고 찬미를 부른 후에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러 올랐던 산입니다. 달빛은 동산 숲 속에 스며들고 산새들의 울음소리도 이미 그친 때였습니다. 밤은 깊었습니다. 이 밤이야말로 예수님에겐 참으로 비통한 밤이었습니다. 감란 산에 오를 때 예수님의 마음은 죽을 지경으로 고독했고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에 젖어있었습니다. 주님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주님께서 깨어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부탁했음에도 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다른 두 마음의 모습이 예루살렘입성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항상 ‘세상 성공, 영광’이라는 것에 매어있었기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메시아, 만왕의 왕으로서의 권위와 품격을 내려놓고 나귀를 타시기로 하셨습니다. 당시 나귀는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타고 다니는 동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깊은 친근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분이로구나! 우리 편이구나!” 생각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예수님을 환영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 9절에 보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가로되”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수많은 군중들이 나와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 불렀고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마 21:9)이라고 칭송을 했습니다. 그들이 이토록 예수님을 환호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민족의 해방자로, 정치적인 왕으로 기대하고 외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노래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에 대한 기대에서 나왔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민족을 해방할 메시아가 될 줄로 알고 그들은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이렇게 외칠 때에 제자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예수님께서 타실 나귀에 얹고, 자기 겉옷을 벗어 길에 깔자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마태복음 21장 8절을 보면, 그 때 무리의 대다수가 그들의 겉옷을 길에 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9장 13절에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이와 같이 왕이 가는 길에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펴는 행위는 오래된 관습이었습니다. 그만큼 제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왕이신 예수님의 나라가 이제 곧 이곳에 임하게 되리라고 큰 기대를 가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자신은 지금 가는 길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기 위하여 얼마 후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위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여야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 마음이 그렇게 편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이라는 대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기 위한 고난과 가시밭길을 시작하는 행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려주일, 이 날은 고난주간의 시작이요, 슬픔과 탄식의 시작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종려주일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겸손과 순종의 종으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을 가지고 엄숙하게 보내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11장 8-10절에 보면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에 겉옷을 깔며, 또 한 편으로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을 환영하였습니다. 야자수라고도 이름하고 종려나무라고도 하는 이 Palm Tree는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에서 주로 자라는 나무인데 옛적부터 셈족은 이 종려나무를 아주 귀히 여겼습니다. 시 92편 12절에는 “의인은 종려나무 같고 백향목같이 번창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종려나무는 시원한 정취를 우리 마음속에 던져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까운 제주도만 가도 길가에 멋진 야자나무가 즐비하게 늘어서있는데 그런 야자나무를 보면 왠지 마음이 푸근해지고 아름다운 남극의 정취를 느끼게 됩니다. 시원하고 품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팔레스타인 지역은 날씨가 뜨겁고 무척 건조합니다. 그늘이 그립습니다. 그런데 이 사막과 같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종려나무가 야자나무를 대신하여 오아시스를 이루며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종려나무를 좋아하겠습니까? 더욱이 종려나무는 아주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바람이 불 때 많이 넘어가는 것 같지만 곧 제 자리에 돌아옵니다. 반면 다른 나무들은 바람이 불 때 뿌리가 약해서 무너지고 쓰러지는데, 이 종려나무는 뿌리가 깊고 든든하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의인이 종려나무와 같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나무가 넘어졌다가도 쓰러지지 않는 것처럼 입성하시는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영원한 희망과 기쁨이 되어주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실 준비를 마음에 작정하시고 무거운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많은 사람들의 겉옷을 깔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마 21:9)며 예수님을 영접하고 환영할 때 예수님은 잠시나마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길에서 어린아이들이 순수하게 찬양하며 반갑게 맞이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명을 되새겼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나를 일깨워줬다고 더욱 반갑게 품에 앉아주시면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눅 18:17)고 말씀하셨습니다.
감람산과 종려나무가지. 아이들의 찬양 그리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속에 감쳐진 복음의 진리를 잊어버리지 맙시다. 많은 사람들이 외치는 칭찬과 풍요 속에 십자가의 정신을 잊어버리지 맙시다. 이제라도 만왕의 왕으로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주님의 본뜻을 잘 이해하고 아이들처럼 진실하고 순수하게 주님을 영접하고 찬송하면서 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주의 백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절 호산나 그 옛 노래 우리도 부르자
주 예수 우리 구주 우리의 전능왕
온 몸과 마음 다해 목소리 높여서
영원히 기쁜 노래 주 앞에 드리자
3절, 전능왕 구주께 우리도 온 몸과 마음 다해 목소리 높여 호산나 부르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세세토록 온 백성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받으셔야 할 분이십니다.
누가복음 19장 38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먼저 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칭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시기에,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이시라는 뜻입니다. 계속해서 그들은 찬송하기를,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사들은 땅에서의 평화를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서 하늘에서의 평화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로마 군인들에게 짓밟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왕이신 예수님이 로마 군인들을 무찌르시고, 예루살렘에 평화를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예루살렘에 평화가 있을 때, 비로소 하늘에도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또한 그 결과로 하늘에 영광이 가득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경배하면서 찬송하기를, 하늘의 평화와 영광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세세토록 온 백성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받으셔야 할 분이십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만세를 부르며 찬양하며 경배하는 것을 신성모독이라고 여겨 분노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열광하고 있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통제할 능력이 그들에게는 전연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만이 열광하는 무리를 진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이 때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비록 속으로는 증오심을 불태우고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불렀을 것입니다. 저들은 예수님에게 그의 제자들을 책망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39절). 그러나 그들의 요청에 대해서 예수님은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40절)고 대답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지금 예수님은 어떠한 의도로 말씀하셨습니까? 만일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대신하여 돌과 같은 자연계라도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을 찬양하며 경배할 것이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에는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들이 받게 될 심판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그대로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 뒤로 사람들은 침묵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더니 그들의 침묵은 급기야 다른 소리로 터져 나오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살인마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눅 23:18,21,23)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했습니다. 그 뒤로 그들의 침묵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뒤에도, 구원받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서는 그들의 침묵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침묵은 오늘날까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나라 전체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침묵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로 귀결되었습니다. 이것은 돌들이 예수님을 찬양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돌들이 부르짖으면서 바벨론의 죄악을 드러내었던 것같이, 돌들은 소리 지르며 예루살렘의 침묵과 그의 불신앙을 성토할 것입니다. 그 결과 바벨론이 심판을 받아 멸망한 것처럼, 예루살렘도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들도 주님을 증거 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교회가 건물크기와 성도숫자 늘이기에만 급급하여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능력을 가르치지 못하고 삶에서 그것을 찬양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는 침체되어 유럽교회처럼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일은 “전능왕 예수를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목소리 높여서 찬양하며 영원히 기쁜 노래로 주 앞에 드리는 일입니다.”(찬송가 3절) 저는 이 찬양사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지금까지 찬송가를 연구하며 찬송가 큐티, 찬송가 강해를 써왔는데 오늘의 141장 ‘호산나 호산나’ 찬송가가 589번째 찬송 강해곡입니다. 하루 빨리 이것이 완성되어지고 알려져서 한국 교회의 주일 오후 찬양예배가 말뿐인 찬양예배가 아니라 말씀에 입각한 귀한 찬양강해를 통해 한국교회가 다시금 푸르고 푸른 성령의 계절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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