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리더십자료

차세대 한국교회 지도자,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

늘찬양 2006. 11. 15. 09:56
차세대 한국교회 지도자,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
김준곤 외  - 
 
참 석 자: 조동진 교수(동서선교개발원 원장)
김준곤 목사(한국 C.C.C.총재)
정진경 목사(신촌성결교회 원로목사)
진 행: 박인용(목회와 신학 편집주간)
일 시: 1994년 6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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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용: 한국교회가 전체적인 교회성장 정체내지 감소기에 있는 현시점에서, 통일 한국을 바라다 보면서 현재 한국교회에서 중요한 지도적 사역을 하고 계시는 여러 목사님들을 모시고 「목회와 신학」 창간 5주년 좌담으로 참된 지도자상을 모색하고 제시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 시점은 한국교회와 세계선교사적인 면에서 중요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고 있는 기로임이 분명합니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놀라운 사역을 했음은 모두 인정합니다만 교계나 사회적으로 건실한 지도력은 형성되지 못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한 요인분석과 지도력의 문제점들, 또 그동안의 지도력을 행사할 여건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생각들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력간의 대결, 분열로 지도력 마비
정진경: 어떤 사람이 지도자인가 정의할 때 , 물론 일도 많이 해야겠지만 우선 지도자 세계에서 비교적 인정을 받고 존경이 두드러지면 지도자라 할 수 있겠지요. 개신교에서는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의 인격이 이 시대 지도자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교황이 조직적으로 지도력을 갖는 구조적인 면이 있습니다만 우리 개신교야 어떻게 말하기가 어렵지요. 특히 요즘의 한국교회의 지도력 약화는 비기독교 사회에서 개신교 지도자의 지도력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조동진: 그간 한국교회의 지도력은 지난 근대사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지난 50년간의 변화 속도는 참으로 느렸고 건국 초기부터 4·19까지의 15년 역사 변동은 제자리 걸음이었습니다. 교회지도력은 일제 말기의 신앙적 변절자들과 북녘 땅에서 내려온 월남 성직자들, 그리고 일제하에서 신앙순결을 지키려다 투옥된 출옥성직자들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이들 세 가지 세력간의 대결과 분열로 인한 지도력 마비의 시대였습니다.

5·16 군사구테타 이후 유신정권 말기까지의 한국사회는, 학생들과 지식층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불신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산업발전과 경제개발을 통한 중산층 형성으로 역사의 흐름이 바뀌어진 시대입니다. 이 때의 한국교회 지도력은 대체로 세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군사정권의 권위주의 교권 매수를 통한 지도력의 타락이고, 둘째는 반군사독재 반정부세력의 정치적 좌경 이데올로기와 합세하여 일으키는 정치신학 중심의 지도력이 사회를 흔들던 지도력의 세속화 현상이었습니다. 셋째는 1965년의 전국복음화운동, 1969년의 전국전도대회, 1973년의 빌리 그래함대회, 1975년의 아세아선교지도자협의회 등을 통한 연쇄적인 교회성장, 복음화운동, 세계선교운동으로 교회의 분열 방지와 전도운동을 통한 연합과 일치의 길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80년 이후 오늘에 이르는 한국의 상황은 중국 개방이래 전후 냉전구조의 붕괴 과정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양극체제하의 세계질서가 가져온 과도기적 혼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교회지도력 구조 역시 와해되었습니다. 기존 권위주의 교권질서의 완전붕괴, 각종 기능별 사업별 협의체의 범람으로 인한 한국교회 지도력 역학구조의 위기를 회장단,총무단과 같은 집단 지도체제를 통해서 극복해보려고 했습니다.
이와같은 사회변동 속도는 거대 경제구조로의 변화와 고성능 첨단과학과 범지구적 통신과학의 발달이 요구하는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성 권위의 지도력 개념을 요구하고 있는 현실로까지 발전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도 세계질서 속에서 한국사회의 미래를 예측하고 그 위에서 한국교회 지도력의 법적, 전통적 권위를 계승할 새시대 지도력의 패턴을 논의할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특히 ’80년대를 지나면서 멜본,파타야를 거치면서 선교에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65년 백림, ’72년 프랑크푸르트, ’74년 로잔, ’89년 마닐라에 세계기독교계의 관심이 모아지면서 비서구지도력으로의 변동이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상황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래서 ’74년 아시아선언, ’75년 기독교서울선언, 21세기 공식선언으로 이어지면서 중요한 패러다임의 변화로 모이는 것과 흩어지는 것이 별로 구분할 필요없는 커뮤니티 개념의 변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중요한 변화입니다.

부정적인 민족성, 지도력 형성의 장애요인
박인용: 오랫동안 국제협력선교를 해오신 국제통으로서 일가견이 있으신 조 목사님께서 지도력의 변화에 대한 배경과 그 흐름을 잘 지적해 주셨습니다. 김 목사님, ’60년대 이후의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새 장을 여셨는데 현장에서 느끼는 고충과 한국적 상황의 지도력 한계를 잘 아시리라 생각되는군요.

김준곤: 일반적으로 지도자의 유형에는 빌리 그래함, 교황, 구약의 지도자들처럼 특별한 권위를 부여받은 카리스마적 지도자형을 우선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민주적 투표로 선출되는 민주적 지도자형과 그 삶이 경건하여 감동을 주는 성자적 지도자형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표가 될 만한 스승이 없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미국에서 30여회에 걸쳐서 신자나 불신자간에 신뢰할 만한 인물로 빌리 그래함이 내내 포함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오늘날에는 지도력의 여건이 다원화되고 민주화, 분파적 경향을 띠고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한국 초대교회의 리더십도 카리스마적이었지만 우리에게 지도력이 형성되지 못한 데에는 나름의 흐름이 있습니다. 삼국 시대의 당쟁이나 좌.우익간에 군사정권 반체제 제도권 등의 역사적인 배경, 또 개혁파와 반개혁파간의 갈등과 분열의 양상도 간과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민족성이 근본적으로 부정적이라는 점이 지도력 형성에 최대의 장애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어느 한 지도자가 부각되면 그의 약점을 집중공략해서 결국은 지도력을 와해시킵니다.

다음으로 선교백년에 선교적 자생력을 가진 지가 20년 정도밖에 안되고 요즘 젊은이들의 70퍼센트 이상이 계급적 민중사관을 가지고 있는 점이 지도력 형성의 걸림돌입니다. 공산주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태백산맥」이 350만부나 팔리는 것도 이것을 반증합니다. 오늘의 새세대는 교회는 아편이고 일제나 3공이후 그 정권 밑에 존재했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동조자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는 청계천의 거지가 성자상으로 부각되는 이상한 현상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이순신까지 비판하려는 세태이니 그 저변에 계급적 시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균형성있게 회복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차제에 교회가 민족과 사람을 아끼고 세우는 것은 성경적인 것입니다. 이제는 의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교단 안에서 전국적인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피투성이가 되어 총회장 한번 합니다. 이런 풍토에서는 지도력이 생성되는 것이 기적입니다.

정진경: 저는 지도자 자신들이 먼저 반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지도자에게서 권위는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권위주의’의 배타가 오늘날 권위의 상실까지 몰고온 것이 안따깝습니다. 해방 후 교계의 최대관심이 교권과 정치였습니다. 심지어 정치를 위한 정치까지도 하게 되었으니까요. 목회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이 약화될수록 비례해서 목회자의 권위는 실추되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내용과 생명력에 대한 열정보다 전통과 형식 문제로 파쟁이 일어난 것이 지도력이 형성되지 못한 원인입니다. 아시는 대로 기독교는 군림하는 자세가 아니라 섬김에 그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신자뿐 아니라 심지어 비기독교인도 정말 목회자를 존경해야 권위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교회지도자는 여건도 문제지만 자신이 만들어가야 합니다. 식목일에 대여섯 그루의 나무를 심는 시늉으로 기만하는 것으로는 지도력을 형성할 수 없습니다.

박인용: 여러 목사님들의 생각을 듣고 보니 그동안 해방전후한 한국교회의 풍토가 지도자를 양성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특히 한 사람의 지도자가 부상할 때 일면의 약점을 보고 집중적으로 공격 매도하는 풍토는 우리에게 있어서 심각한 이기적 시각을 벗지 못한 소아의 자해적 성격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김 목사님, 그렇다면 앞으로 소망을 두는 입장에서 어떤 분들이 차세대에 한국교회를 위해서 일할 그릇들이라고 보십니까?

혼란의 세대는 다원적
리더십을 절실히 요구
김준곤: 먼저 교단정치에서 상처가 비교적 적은 40~50대에서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갖습니다. 그리고 우선 신학이 개혁주의적 신학사상으로 성경만이 행동원리임을 확신한 사회성이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분명한 신앙관으로 성령의 내적인 열매가 풍부하여 질적인 신뢰가 있는 사람, 깊은 기도로 영성이 겸비된 사람이 바로 한국교회의 차세대에도 지도력을 발휘할 사람인 것입니다.
특히 자기 단체, 교단의 요구보다는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는 뚜렷한 신념으로 리더십이 왜소하지 않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또 환경문제, 정치, 경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도 신학적으로 편벽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의 사고가 역사관, 노동관이 분명하고, 중요한 것은 더불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성격적인 결함이 있는 분들은 지도력을 행사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특히 깨진 그릇도 화합시킬 수 있는 성격적으로 원만한 사람이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조동진: 권위에 대한 정의가 먼저 분명해야 합니다. 권위란 그 지식의 전문성, 영력, 지식, 합법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리차드 울프는 ‘헌신한 만큼’지도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의 중요한 점은 헌신, 봉사,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박인용: 지금 일선 한국교회의 지도현장에서 뛰어오신 두 분 목사님의 견해를 가슴으로 느끼며 들었습니다. 김 목사님의 경우 차세대 지도자가 구비해야 할 요건도 아울러 대안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차세대의 목회 환경 변화에 대한 예측입니다. 요즘에 교계적으로 CATV문제로 팽팽한 의견 대립을 보이고 있는데, 향후에 CATV가 본격 방영되면 근본적인 교회 개념이 혁신되는 등 심지어 교회 공동체의 해체현상까지도 얼마든지 상정해볼 수 있습니다. 앞서 이제는 연 3퍼센트의 기독교인이 감소추세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지적도 미래의 목회 환경여건을 불확실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차세대의 목회 환경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 말씀해 주시지요.

정진경: 무엇보다도 지도력은 지도자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인식이 어떠하냐에 따라 리더십의 유형이 결정됩니다. 한국교회 입장에서 볼 때 차세대의 여건변화 예측과 함께 먼저 강조되어야 할 부분이 우리의 고정관념부터 깨야 한다고 봅니다. 최근에 순복음교회에서는 아르헨티나를 방문하고 있는 조다윗 목사님이 위성중계로 TV화면을 통해 5분간 여의도 순복음교회의 예배시간에 사회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놀랐습니다. 또 컴퓨터의 발달은 80년대에 설교했던 것을 키만 누르면 일시에 파일로 다 나와 일종의 설교 ‘부페시대’가 올 수도 있음을 예견하게 됩니다.
이런 매스컴의 혁명기에 전근대적인 사고로는 차세대에 적응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차세대에는 지금처럼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혼자 다하는 종합적인 교계지도자상은 무리라고 봅니다. 오히려 교계에서도 각 분야의 전문성으로 리더십이 형성, 존중되는 다원적 리더십의 유형이 좋다고 보고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조동진: 정보환경, 교회공동체 해체현상 등 21세기형 현상변화는 그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혼란과 무질서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각양각색의 지도력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의 지도자들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범지구적 지도력(global leadership)이란 한 거대한 영웅의 우주적 초능력이 아니라 지역적, 국가적,민족적 각양의 지도력과 어느 한 분야도 소외시키지 않고 이를 통합 조정할 수 있는 조정자적 지도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화로 풀어가는 열린 가슴의 소유자가 필요하다
김준곤:이런 지도력은 정 목사님이 한국교회에 아주 좋은 은사로 발휘해 왔다고 여겨집니다.
21세기에는 소교파 개교회로서는 존립하기 힘들 것입니다. 전 지구적인 이른바 ‘Wholistic 운동’이 필요하며 전세계 2만 2천교파를 집약·조정할 능력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민족, 국제 , 지구촌화가 선교의 일차적 순서라고 성경적으로 믿습니다. 우리는 남북통일 이후의 이 민족의 복음적 사명을 진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이 가진 훌륭한 신앙의 유산을 기원으로 7천만 통일 운동이 차세대에 필요한 사역이라고 믿습니다.

적어도 차세대에 한국교회를 이끌 지도자는 한국 기독교의 엄청난 에너지를 통합할 수 있는 사람들로 지도체제가 이뤄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세계선교를 위해 12명정도가 40~50대에서 나와서 팀을 이루어 협력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미래 지도력에 대한 기대입니다. 앞으로는 점점 더 묵시록적 세대가 될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전쟁의 위기, 환경의 파괴, 비도덕화가 가속될 것이고, 뉴에지는 더욱 극성을 부릴 것입니다. 현대인 산분의 일이 정신병이라고 하며 청소년들은 이미 태반이 정서불안에 걸려있습니다.
기독교가 그 민족의 50퍼센트가 되면 토착화가 됩니다. 그러나 요즘 한국교회는 다시 감소추세로 접어들었습니다. 우리가 노력해도 죄, 공포, 불안, 절망의 선은 넘지 못합니다.
이런 위기적 국면 앞에 우리가 다시 한번 협력해서 바람을 일으키면 십대들이 교회로 몰려올 것입니다.
다음 세대의 지도자는 상대방과 대화가 가능한 열린 열린 가슴의 소유자이어야 합니다.

조동진: 좀더 역사적 맥락에서 차세대의 목회 환경변화를 예측해 본다면 ’48년 암스테르담 이후 ’61년 뉴델리까지 오면서 서구 선교의 종식과 함께 새로운 비서구 선교세력 등장의 시대로 바뀌어집니다. ’61년 뉴델리 이후 ’68년 웁살라에서의 세속화운동을 통한 교회갱신운동이 가져온 기독교의 정치세력화에서부터 ’73년 방콕에서 “오늘의 구원”에 이르면서 교회는 종말론적 방향에서 세계의 정치, 경제적 발전에로 크게 돌아서 버렸습니다. 그러나 세계 교회는 ’80년대 일본에서의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를 기점으로, ’89년의 센 안토니오에서의 “선교, 그리스도의 방법”에 이르기까지 크게 오른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복음주의세
계적 지도력의 방향은 ’65년 휫튼에서의 “성서에 기초한 교회의 선교에 관한 선언”에서, ’66년 “한 복음, 한 인류, 한 세계”를 선언한 칼 헨리의 백림선언과 ’72년 바이어하우스의 프랑크푸르트선언, ’74년 로잔언약, ’80년 파타야선언, ’89년 “그리스도 다시 오실 때까지”의 매니페스토를 선포하기까지 세계 기독교의 두 세력간의 멀고 멀던 대결은 서로간의 교차점을 통과하여 서로의 주장을 수용하게 되는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면서 ’80년대 이후 선교지도력은 서구 주도에서 비서구 주도로 그 지도력의 변동이 오고 말았습니다.
’73년 서울에서의 “범아세아선교지도자협의회”를 기점으로 ’75년의 “기독교선교에 관한 서울선언” ’80년의 “민족복음화세계대회” ’82년의 “기독교선교에 관한 아시아인들의 언약” ’85년의 “세계선교와 세계평화에 관한 제3세계선언” ’89년 1월 싱가폴에서의 “21세기운동”출범, ’90년 서울에서의 “아세아 선교대회” 그리고 내년에 있을 “21세기 세계선교회의”가 모두 비서구 제3세계 지도력에 의하여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차세대를 겨냥해서 조망해 보아야 할 오늘의 지도력의 좌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진경: 무엇보다도 다음 세대 지도자는 선교적 사명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현재 기독교인 25퍼센트만이 아닌 4천 3백만 모든 국민이 신자화될 수 있도록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또 차세대의 지도자들은 성·속의 이원성을 극복하고 참된 공의와 사랑이 이디오피아와 모잠비크까지도 전달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영혼과 육체를 함께 구원하는 선교적 전기가 필요한 요건이라고 지적하고 싶습니다.
또하나는 교단 연합적으로 좀더 회복해달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지구촌 시대는 총력체제가 아니고서는 영적인 전장에서 승리하기가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교단 안에서만의 제한적인 행보를 멈추고 선교라는 지상과제 앞에 대국적으로 과감히 연합해야 합니다. 지금은 연합사업은 있는데 연합정신은 없이하고 있는 점이 유감스럽습니다. 세계운명공동체화 되어가는 현상황에서 교단간에 신학적 차이에 연연하기보다 복음적 신앙을 고백하고 교단끼리 봉사하는 것에 주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는 지금 불치의 질환을 앓고 있다
박인용: 여러 목회환경 변화 중에서 이 민족에게 가장 극적인 변화는 역시 남·북통일 이후의 급변된 상황입니다. 여러 정황들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제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고 보여집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 평양을 다녀오신 조 목사님께서 차세대 목회자들의 자세와 책무 등을 말씀해주시죠.

조동진: 사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는 모두 ’20년대 출생의 고령자들 아닙니까? 우리가 감히 두뇌회전이 빠르고 타산적이며 사회변동 적응속도가 빠른 차세대 일꾼들에 대한 패턴을 말한다는 것은 늙은이들의 노망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단지 “이것만은 변치말아 달라”는 부탁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선교적 환경변동에 대해서는 이미 제가 앞서 말한 바 있어서 다른 두 가지, 즉 민족통일과 통일 후의 대비와 고속발전 시대의 목회 패러다임에 관한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먼저 분단 시대가 끝나가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분단 종식 과정과 통일의 형태, 이에 관련된 남북한 사회의 변동에 대한 예측연구는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매우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의 동북아시아의 위치, 특히 한반도의 통일이 가져오는 지정학적 위치, 산업경제의 새로운 유통질서, 주변국가간의 이해득실이 가져올 한반도 정세의 끊임없는 긴장관계 등을 생각하는 예레미야 같은 예언자적 선지자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우리 교회의 작금의 위험한
현상은 종교기업형 교회구조, 지나치게 귀족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 재벌과 권력 중심의 교회구조, 교회의 대형화와 물량적 교회성장운동이 가져온 교회의 비대현상 등입니다. 반대로 10~50명 미만의 신도를 가진 수천 개의 교회가 속속 문을 닫아야 하는 교회의 마이너스 성장의 원인 등 거의 불치의 질환증상을 보이고 있는 것에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목회자의 설교에서 미래의 목회 패러다임은 성경의 문자적 풀이를 즐기는 구시대 대영제국주의식 설교보다는 구약의 예레미야, 에스겔, 에스라, 느헤미야 같은 국가와 민족과 하나님나라를 함께 가르치는 예언자적 설교가 목회의 새 방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율법과 예언과 복음과 종말론의 네 기둥을 틀로 하는 교회의 지도력은 예언자적이어야 하며, 제사장적, 사도적 증인이라야 합니다.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은, 지난날 잃은 것을 다시 찾아 앞으로 올 새로운 것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목회의 성서적 원리의 재발견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적 응용신학 학문이 우리나라에서도 판을 치면서 ‘기교’와‘효과’를‘원리’와‘원칙’보다 앞세우게 되었고 이 때문에 많은 신도들이 크게 오도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우려하고 있습니다.

정진경: 통일이 교계적으로 이슈로 떠오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통일을 허락하시리라고 봅니다만 먼저 북한선교라는 차원에서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북한선교의 전략은 지금처럼 교단 안배식으로 하면 그 부정적인 측면이 너무 많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직접 뛰어들어가서 선교하기보다는 북한의 지역교회와의 영적 연대를 통해 전도해야 부작용도 적고 훨씬 축복스럽다고 봅니다.

김준곤: 저는 일찍이 없었던 기적을 꿈꾸고 있습니다. 지상에 일찍이 완전한 기독교 국가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에 종말이 오기 전에 한번쯤은, 단 한번만이라도 그들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그리스도에게 바쳐지고 쓰여질 수 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우리야말로 그 기적의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흔히 역사에는 기적이 없다고 하지만 성경의 역사에는 기적이 꽉 차있습니다. 출애굽, 니느웨성의 회개, 가나안 정복, 에스겔 37장의 해골떼가 생명군대로 변하고 남북이 통일되는 환상 그리고 신명기 28장의 축복이 우리 민족에게는 현실일 수 없다고 성경 어디에도 쓰여져 있지 않습니다.
이 일이 현재와 오는 세대 한국교회 지도자의 시급한 사명일 것입니다.
조동진:제가 전체적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세계선교 문제는 ’90년을 기점으로 크게 개혁의 길을 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초기 선교열정, 곧 1907년 이후 ’30년대까지의 선교정신의 의미를 민족의 현대 역사 속에서 새롭게 조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60년 이후 ’90년까지 우리나라의 세계선교는 대체로 세 가지 유형의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서구선교 종식으로 인한 비서구 세계에서 새로운 선교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자생적 신앙선교단체 운동입니다. 둘째로는 서구선교에의 종속 또는 모방을 통한 서구선교 세력 산하의 토착선교운동(이것을 선교학자들은 비서구 국가들의 Native Mission Movement 라고 합니다)입니다. 셋째로는 이와같은 선교의 열풍에 따라 후속세력으로 등장한 교단선교부의 선교활동입니다.
어쨌든 지난 30년 선교운동
은 태워야 할 것과 태워서는 안될 것을 모조리 태워버린 매우 거칠고 질서없는 선교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
은, 이제는 선교가 일방적으로 보내는 서구식민지 시대의 패턴을 끝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서로가 보내고, 주고, 받고, 얻는 것보다는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교회가 함께하는 선교’의 패러다임을 창출해야 합니다. 자국 또는 자기세력의 확대, 선교사 숫자의 경쟁적 과시, 동일 지역에서의 동일 성격 선교 프로젝트의 중첩과 경쟁 등 낭비와 구조적 모순을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적인 세계관이 필요하다
김준곤: 한국교회는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무장해서 성경을 통해 눈,귀가 되어 입의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에서만이 세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성경적인 정론이 나와야 합니다. 특히 북한선교의 이슈들은 1200만 한국교회의 성도들을 모아서 하나의 정론으로 결집할 21세기 포럼같은 기구를 통하여 우리의 에너지를 모으고 가다듬어야 합니다. 지난번에 원로회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북한에 가서는 교파를 만들지 말자는 선교안이 구체적으로 구상되어 실천되는 결실이 있었으면 하는 바입니다.
특히 지적해주신 대로 타종교와의 물리적 층돌은 극력 피해야 할 차세대 지도자들의 과제입니다. 적어도 그들의 종교를 존중하고 그들이 우리의 인격과 삶을 보고 감동함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과제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조동진: 좋은 지적입니다. 우리는 북한사회의 진상 확인을 위한 연구조사를 항상 등한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보여지는 왕국분열과 포로생활 속에서 그들 실향민의 조국광복과 성전의 중건을 이루는 동안 이방의 집권자와 이방 민족의 방해를 돌파하는 데 동원된 학자, 제사장, 예언자, 총독 등의 역할을 연구하여 거기에서 우리의 통일을 위한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인용: 오늘 세 분 목사님들의 지적은 향후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귀중한 지침이 되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