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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090211
제목: 훈수와 실전, 실전 같은 훈수
본문: 욥33:1-33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훈수와 실전, 그리고 실전 같은 훈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말씀 함께 생각하며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훈수와 실전.
여러분, 우리 생활 속에서 자주 우리가 접하게 되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면 뭐, 훈수는 9단이요 실제 급수는 9급이다.
뭐 훈수는 거의 입신의 경지에 도달하는 그런 사람이 실제로 두라 그러면 9급 정도의 실력밖에는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옛날에는 요즘은 다 공인중개사라고 해서 시험도 보고 자격증을 따로 얻습니다마는 옛날에는 그냥 할일이 없고 좀 동네에 오지랖이 넓게 관심을 갖고 살고 계시는 그런 아저씨들이 연세 드셔서 할일이 마땅치 않으면 복덕방이라는 걸 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 복덕방이 하나 생기면 동네 시간이 좀 남는 아저씨들이 다 모여서 대화를 하고 뭐 장기도 두고 그러십니다.
그런데 장기 둘 때, 바둑 둘 때 옆에서 훈수를 두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고 그 아저씨들끼리 모여서 할 일 없어서 복덕방에 모여앉아계신 분들이 온 나라의 일들을 다 훈수를 두십니다.
대통령은 이래야 되는데, 지금 잘못가고 있고 어떤 점은 괜찮고 마땅히 이북에 대해서는 이래야 하고 미국에 대해서는 이래야하고 그 복덕방에서 온 세계 정치가 다 이루어지고 미국 대통령 뭐 한국 대통령 일본 수상 모두가 다 이들의 훈수를 들어야 되는 판이 됩니다.
훈수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굉장한 것이에요.
그리고 뭐 월드컵이라든지 뭐 아니면 유명한 타이틀을 놓고 우리나라선수들이 축구시합을 한다. 그래서 대다수의 국민들이 일을 일찍 끝내고 TV앞에 와서 관전을 하고 있다.
이럴 때 선수 11명이 뛰고 있는데 감독은 천만 명이 되고 2천만 명이 됩니다.
TV를 보고 있는 모든 백성이 다 감독이 되는 거예요.
저거 저러면 안 되는데 저거, 어떻게 볼을 저거밖에 못 차냐? 뭐 어떠냐. 어떠냐.
모두가 감독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실제로 제 자신도 그렇게 열을 내면서 저것도 축구선수냐, 밥 먹고 하는 게 24시간 축구를 하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밖에 안 되냐? 하다가 저는 뭐 24시간 뛰는 선수는 아닙니다마는 교회 같은 데서 체육대회가 있어서 잠깐 뛰면 3분? 운동장을 뛰어갔다 오면 헥헥 거려서 패스는커녕 기어 다닐 힘도 없을 때가 많아요.
그런데도 TV를 관전할 때는 히딩크 감독위에 앉아있어요. 히딩크 감독위에 앉아있어요. 김호 감독위에 앉아있고 허정무감독? 저리 가라에요. 내가 해야 되요. 다.
하하, 그게 참, 훈수를 두는 사람들의 동일한 심리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오늘 지금 마지막으로 엘리후가 자기의 변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엘리후의 말이 끝나면 곧바로 여호와하나님께서 말씀을 이 논쟁의 장에 하시고 그리고 이제 욥기가 욥의 하나님을 향한 마지막 고백으로 끝이 나게 되요.
엘리후의 말에 대해서는 욥이 다른 논쟁을 하지를 않습니다.
이 엘리후가 하는 말들이 요지가 여러분, 이렇습니다. 앞으로 또 계속 나옵니다마는 앞에서 말한 엘리바스나 빌닷과 소발과는 다른 사람이에요. 나이가 제일 어렸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나이가 많은 연장자들끼리 논쟁을 벌이는 것을 듣고 있다 듣고 있다 참지 못해서 이제 나서서 말을 하는데 엘리바스나 빌닷과 소발처럼 기계적인 인과응보적 틀을 가지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욥이 지금 참담한 현실을 당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네가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내려서 그러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고난을 주시고 환란을 주실 때 벌 받게 하시려고 벌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더 고양시키시고 우리 오늘 본문에 보면 구덩이로 내려가는 영혼을 건져내시려고 그런 고난과 어려움을 우리에게 주신다, 라고 하는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점은 참 옳아요, 엘리후가.
그리고 또 엘리후 말의 또 하나의 포인트는 어디 있느냐?
욥이 자꾸 끝까지 자기의 의를 굳세게 붙잡습니다. 나는 의롭다. 나는 의롭다. 나는 잘못이 없다. 자꾸 얘기를 하는 것에 대해서 겨냥해서 얘기합니다.
이건 엘리바스나 빌닷과 소발, 나머지 세 친구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거예요.
어떻게 네가 너의 의를 주장할 수가 있느냐?
그런데 이 욥을 이 점에서 비난하는 이 엘리후의 관점은 또 이들과는 달라요.
이들은 네가 지금 당하는 참담한 현실을 볼 때 너는 너의 의를 주장할 수 없다, 라는 이야기고 이 엘리후가 너의 의를 주장할 수 없다고 욥에게 말하는 이유는 네가 어떻게 너의 의를 주장할 수 있어? 라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크심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앞에서, 어느 인간이 자기의 의를 너처럼 주장할 수 있는 인간이 있겠느냐?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좀 차원이 다르지요?
엘리바스나 빌닷과 소발은 야, 내가 내 눈에 보이는 너의 꼴을 보니까 그게 뭐냐?
어떻게 네 꼴이 그런데 네가 너가 잘났다고 하나님 앞에서 네가 옳았다는 이야기를 네가 할 수가 있냐?
그게 옳은 거라면, 옳은 거로 다 쌈 싸먹어 버려라. 무슨 꼴이 그런 꼴이 있냐? 옳은 사람의 꼴이. 이렇게 얘기하는 거고.
엘리후는 교리적이고 이론적이고 그리고 또 이론과 교리가 무조건 나쁜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이 진리를 담고 있어요. 참된 가르침을 담고 있어요.
그 가르침에 입각해서 어떻게 크시고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느 인간이 너처럼 굳세게 자기 의를 붙잡고 있는 인간이 있겠느냐? 라는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이 엘리후의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참담한 현실이 주어진 것이 우리의 영혼이 구덩이로 빠질까봐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련하시고 우리를 더 업그레이드시키려고 그러신다, 라고 하는 관점은 틀린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그것도 욥에게 정확하게 적중할 수 있는가는 또 문제가 됩니다마는 그러나 뭐 얼핏 맞아 들어가지 않습니까?
욥이 듣는 하나님에서 보는 하나님의 단계로 가고 있는 과정 중에 일어난 일이니까 그 점은 엘리후가 옳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욥이 자기의 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충돌하는 이유는 뭐냐?
이게 바로 실전과 훈수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욥이 자기의 의를 굳게 붙잡고 있는 근거가 뭐냐 하면요.
실천적인 삶을 근거로 자기의 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옳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의롭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삶을 살아온 것을 바탕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을 의롭다고 하는 것을 굳세게 붙잡고 있는 것이에요.
이 얘기는 쉽게 예를 들면 이렇게 예를 한번 들어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사기죄로 전과 7범의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버릇을 못 고쳐가지고 또 사기를 치고는 다른 지방으로 도망을 가게 됐어요. 그래 도망을 가는 중에 이 사람이 뉘우칩니다. 아, 내가 진짜 전과 7범인 주제에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또 그 버릇을 못 고쳐서 내가 사기를 쳤구나, 남의 돈을 등쳐먹었구나.
그리고 마음을 고쳐먹고 그 이제 착실하게 살아야지, 라는 결심을 갖고 다른 지방, 아무도 자기를 못 알아보는 곳에 가서 취직을 했습니다. 그래서 경리를 맡았어요. 그 회사의.
서무과직원으로서 경리를 맡아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런데 재정에 문제가 생겨버렸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로 회사공금을 일전 한 푼 손을 대지 않았어요. 그런데 의심을 받게 되고 의심을 받으니까 뒷조사를 해보니까 전과 7범이에요. 사기죄로.
그래 이 사람이 고발이 돼가지고 감옥에 들어가게 됐어요.
그때 이 사람이 말하는 겁니다. 내가 전과 7범이다. 나는 악한 사람이고 다른 지방에서 사기를 쳐서 도망 온 거 맞다. 그러나 내가 이 회사에 들어와서 지금 이 회사의 사장님과 이 회사에 대해서는 일원 하나 내가 떼어먹은 거 없고 경리과직원으로서 내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 나는 절대 이 회사에 대해서 사장에 대해서 이 사장님에 대해서 내가 범죄한 적이 없다. 지금 이런 입장인 것이에요.
본인은 죄인입니다. 타지방에서 죄를 짓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려진 상태에서 취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취직한 회사에서 정말 실오라기만한 물건도 한 푼도 자기 것으로 착복하거나 횡령하지 않았습니다. 정직하게 했습니다.
이때 이 사람이 사형을 당하는 자리까지 가서라도 누가 뭐 사기죄로 사형을 시킵니까마는 예를 들자면 그런 극단적인 벌을 받게 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나는 이 사장님에게 잘못한 게 없다. 나는 이 회사의 공금을 횡령한 적이 없다.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욥이 지금 이 엘리후가 말하잖아요.
네가 지금 하나님과 논쟁하려느냐? 너의 옳다함을 주장하고 붙잡고 고수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금 잘못했다는 거냐?
왜냐하면요.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매순간을 다 다스리시니까 이렇게 참담한 현실이 주어졌는데 부정적인 현실이 주어졌는데 욥 자신은 틀린 게 없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이 틀린 것이 돼버리지 않느냐, 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이 침묵한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사람은 관심이 없을지 모르지만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사이에 하나님은 계속 우리에게 말씀을 하신다. 우리가 관심이 없어서 못 듣는 것이지, 라고 말합니다. 이것도 이제 엘리후가 훈수차원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엘리후가 말한 대로 하나님은 크시고 인간은 너무너무 보잘것없는 지렁이 같은 존재기 때문에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인간은 매사에 판단과 생각이 그르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욥은 실제 생활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았고 또 엘리후가 말하잖아요. 지금.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욥은 매사에 하나님을 듣고 듣고 듣고 그리고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이런 실천적인 차원의 경건과 영성을 엘리후가 전혀 고려치 않고 있다는 것이에요.
엘리후의 말은 맞아요. 그러나 그것이 훈수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욥은 그렇게 실전을 하고 나니까 엘리후가 말한 대로 산거예요. 하나님은 크시다. 나는 작다. 하나님이 계속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나는 듣는다.
그렇게 살았어요. 살았기 때문에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이지 자기가 옳은 사람이고 자기존재자체가 의롭기 때문에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마치 축구선수가 축구시합을 하는데 있는 힘을 다한 거예요. 있는 힘을 다한 거예요. 노라리를 때린 게 아니에요.
저기 맨체스터유나이티드 팀에 소속된 박지성선수가 그냥 90분을 그냥 내내 종횡무진으로 뛰어다녀서 산소탱크라는 별명이 붙어있지 않습니까?
골이 한번 나와 줘야 되는데 이 박지성선수가 골이 그렇게 안 나오네요. 골이 안 나와요.
그래 뭐 슛을 해보기도 하고 그저 수비에 가담했다 공격에 가담했다 종횡무진으로 뛰고 있는데 골이 안 나와요. 참 답답해요.
그러나 박지성선수를 뭐 어떡하겠습니까?
넣기 싫어서 안 넣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열심히 뛰는데도 안 들어가는걸 뭐 어쩌겠어요. 안 들어가는걸.
그런데 그걸 보고 뭐 게임을 몇 게임을 치렀는데 도대체 골도 하나 못 넣냐? 박지성이 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데 지성이 부족한 거 아니냐? 별 소리를 다 해가면서 욕을 해본들 그 욕하는 사람보고 뛰라 그러면 5분 뛰면 쓰러질 사람들이.
권투요 여러분, 권투 보셨어요?
제가 한번 군대에서 권투를 했어요.
3분씩, 3분씩 해가지고 어떨 때 세계헤비급 챔피언 뭐 이런 건 12라운드까지 가지 않습니까?
3분을 못해요. 계속해서. 그 젊을 나이에. 군대갔으면 젊은 나이 아닙니까? 21살, 22살, 요럴 땐데.
그거 못하겠어요. 어떻게 그걸 12라운드까지 뛰는지 나는 기절할 일이에요. 기절할 일.
그런데 바보 같은 놈들, 그걸 뭐 어퍼커트를 쳐야지, 스트레이트를 넣어야지. 난리를 치고 있는 거예요.
엘리후가 바로 그런 차원에서 이제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 이 훈수와 실전은 참 달라요.
정말 달라요.
암이 걸려서 아파 죽습니다. 그러면 거기 가서 훈수를 둡니다. 잘 둬요. 훈수를.
그런데 내가 그렇게 아픕니다. 어림도 없어요.
목사가 암이 걸리면 암투병을 하고 있는 집사님한테 가서 다시 처음부터 배워야 되요.
무서운 거예요.
훈수와 실전은 달라요.
그런데 우리 신앙이 훈수차원에 머물고 있을 때가 많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그 훈수와 실전이 경계가 없을 만큼 내가 생각하고 있는 신앙에 대한 생각과 내가 사는 삶이 같아져갈 수 있을까?
그러니까 실전 같은 훈수, 또 훈수처럼 얘기하는데 실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든지 아니면 실전이 치러져도 자기가 말한 훈수대로 실전을 치러갈 수 있는 그런 상태,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성령이 임하시지 않으면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이에요. 성령이 임하시지 않으면.
그러니까 실전경험에 근거를 둔 훈수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모두가 다 실전을 할 수 없어요.
예를 들어서 자식의 일이 망하는데 그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순전을 지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순전을 지키는 게 뭐죠?
32장에 나오는 말씀대로 내가 언제 순금을 의지하였던가, 내가 언제 내 손으로 거둬들인 수확이 많다고 기뻐했던가와 마찬가지로 내가 언제 자식이 잘됐다고 기뻐했고 자식이 못됐다고 슬퍼했던가?
하나님이 계심으로 기뻐했고 하나님의 얼굴이 가려지면 슬퍼했지. 이게 바로 순전함이라는 것입니다.
자식이 안 된 집안에 가서 하나님만으로 기뻐하세요. 말하기는 쉽지요.
그러나 내 자식이 안 됐습니다. 그런데 내 자식이 안 된 상태에서 하나님만으로 기뻐한다는 것은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고난, 욥처럼 다 당해야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 그러면 참 정말 믿기가 힘들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욥처럼 이런 일이 당하더라도 정말 하나님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일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바로 성령님이 임하셔야 된다는 것이에요. 성령님이.
성령께서 임하시지 않으면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그렇게 얘기하지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 가난함에도 처하고 부함에도 처하고 부함에 처해도 교만하지 않고 내가 잘난 줄 알지 않고 가난함에 처해도 내가 궁색하고 굴욕적인 삶을 살지 않고 자족한다.
자족한다는 게 뭐예요?
돈 없어도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 그게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뭐가 있습니까?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이에요. 그리스도 안에.
주님 십자가달린 그 모습, 그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그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성령이 임하시는데 성령이 임하시면 내가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일들이 이제 막 닥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돈이 안 벌리는 상황 안에 있으면 훈수와 실전이 차이가 나요.
자식의 일이 잘 안되는 그 상황 안에 있으면 훈수와 실전이 차이가 나요.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우리 주님 안에 있으면 늘 그분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나의 죽음인 것을 고백하고 있으면 그러면 훈수를 두고 있는 그 상태라도 그 사람은 실전이 와도 훈수 둘 때처럼 해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 돈이 많이 벌리면 돈 많이 벌리는 상황 안에 있어요. 그러니까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자식들이 잘 되면 잘되는 그 상황 안에 있어요. 마음이 넉넉해져요. 그리고 훈수 둬요. 자식이 안 되는 집 가가지고 에이, 열심히 믿으세요. 기도하세요. 저처럼 잘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안 하겠지만.
이 말 하는 또 정신 나간 분들도 계시긴 하실 겁니다. 은근히. 은근히 날 봐라. 날 봐라.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훈수와 실전, 말과 실제의 삶이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이에요.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이에요.
우리의 믿음이 훈수의 차원을 넘어가기를 바래요.
결국은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복음, 주님의 죽음이 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가 되는 것이 그 죽음이 실제 내 죽음이 되는 것이 모든 이 세상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상황에 대해서 내가 실제 죽는 것이 되는 것이 그게 믿음 아닙니까?
그게 된다면 이 세상에 어떤 고난이 와도 이 세상에 어떤 형통이 와도 형통에 교만하고 무너지지 않고 환란과 고난 속에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실전 같은 훈수, 훈수와 실전의 경계가 없어지는 삶.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성령 받으시고 이루어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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