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의 변화
행 9:1-9, 2013.10.27.늘찬양교회
우리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주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주님을 닮아가게 되고 우리의 인격이 변하여 새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화된 자를 위대하게 사용하십니다. 변화된다고 하는 것은 키가 커지고, 몸무게가 늘어나고, 용모가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의 가치관과, 삶의 목적과 삶의 역할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한때 악한 일에 앞장서서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고 많은 핍박을 하던 악행자 이었지만,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변하여 새로워짐으로 위대한 사도로, 또는 위대한 선교사로 큰 업적을 남기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 함께 바울의 변화되어진 모습을 통해 나의 삶을 조명해보므로 주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지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Ⅰ. 회심 이전의 사울
오늘 본문 1절에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여전히'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 뜻은 '그 이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은 그 일의 주동자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7장 58절에 "스데반을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는 또 사도행전 8장 1절과 3절에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듯이 사울은 스데반 집사를 비롯하여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이는 것이 마땅한 일로 여겼던 사람입니다. 사울은 교회를 잔멸하기 위하여 외국 원정까지 가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당시에 외국에 많은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첫 번째 표적은 다메섹이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아 가지고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다메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사울 일행이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사울은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늘로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로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 9:4-6)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같이 동행하던 사람들조차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환상 중에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메섹의 직가라 하는 거리에 가면 유다의 집이 있다. 그곳에 다소 사람 사울이 기도하고 있을 것인데 그에게 찾아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행 9: 11-12)고 명령하였습니다. 아나니아는 처음에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기에 그는 순종하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 17절에 기록된 것처럼 아나니아가 유다 집에 들어가서 사울에게 안수하며 축사하기를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졌습니다."(행 9:18)
이런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고 난 후 사울은 믿음의 사람 바울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살기(殺氣)로 충만한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성령(聖靈)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율법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복음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의 뜻은 ‘큰 자’라는 뜻이며 바울이라는 이름의 뜻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의 이름의 변화는 바로 교만한 자에서 겸손한 자로, 악행자, 포행자, 핍박자에서 선행자로, 복음을 핍박하던 자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자로의 삶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전인격적인 큰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Ⅱ. 바울의 변화
1. 삶의 가치관이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기 전 바울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증오심, 그리고 그들을 박해한다는 자부심과 우월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자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빌립보서 3장에서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부터 그 모든 것이 헛됨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 로서 난 의라”(빌 3:4 -9)
이렇듯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소유한자로, 최고의 학문 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자로, 베냐민 지파의 혈통을 가진 자로,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으로 바리새인 중에 열심당원으로 긍지로 갖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이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참으로 놀라운 변화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자신의 족보와 가진 지식과 열심을 최고의 보배로 여기며 살던 자가 예수 안에서 사도가 된 것을 최고의 명예와 기쁨으로 여기고 그전에 있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바울의 인생의 가치관이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복음 안에서 세상에 대한 가치관이 주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가치관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가치관의 변화가 저와 여러분 속에서도 강력한 힘으로 표출되어 나타나기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늘찬양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아침이 바울이 맞이하였던 다메섹 도상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평생 교회를 들락거렸다 할지라도 이런 변화가 없다면 어찌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나셨습니까? 여러분의 삶의 가치관이 변화되었습니까? 아직까지도 세상 명예와 권력과 부귀와 사람들의 높임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까지 헛된 일에 열심이었다면 이제라도 주님을 만남으로 세상 사람들이 알 수도 줄 수도 없는 참된 평화와 기쁨을 맛보며 가치 있는 새로운 삶, 행복한 은혜의 삶,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축복이 있어지기를 소망합니다.
2. 삶의 목적이 변화되었습니다.
삶의 가치관이 변화되면 삶의 목적도 변화됩니다. 지난날 사도 바울은 혈통을 자랑하고 학식과 교회에 대한 핍박이 자랑이었으나,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로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모든 것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89).
개인 중심의 삶, 세상 중심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삶의 목적이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은 바울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사람에게 모두에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이전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삶의 유일한 목표요, 이상이었지만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님이 삶의 목표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를 위해 죽게 됩니다. 하루나 한 달을 경건하게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누구나 가능합니다. 그러나 일생동안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산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바울에게는 일생동안 수많은 어려움과 위험들이 따라다녔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동안 자신의 안일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전파를 위해 살기로 작정하며 순례자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주를 위해 헌신한 대표적 인물입니다. 바울이 일생을 주를 위해 살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왜 자신을 불렀는지, 또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명의식과 종의 의식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탁구선수였던 양영자 선수를 기억하십니까? 그분의 간증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탁구를 시작한 저는 중학생 때 국가 대표로 선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부터 테니스 엘보우라는 팔꿈치의 심한 통증으로 선수생명을 위협받았습니다. 진통 주사를 맞지 않으면 경기에 나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기를 6년, 진통주사의 효과는 계속 떨어져 갔습니다. 그런데 18살의 어린 나이로 이제는 마지막 출전이라 생각했던 도쿄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서 뜻밖에도 중국 선수들을 모두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노력과 치료에도 불구하고 병은 낫지 않고 약화되어 갔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 간구해 보라는 권유를 듣고 이것이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별 생각 없이 기도원에 가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저에게 임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했을 때, 6년 동안 저를 고질적으로 괴롭히던 테니스엘보우가 극적으로 치료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건으로 제 삶의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이젠 저의 명예가 아니라 제가 만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라켓을 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시련은 닥쳐왔습니다. 또다시 저는 간염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간염환자를 대표단에 소속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저는 대표 선수단에서 제외되는 쓰라림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절망도 포기도 하지 않았고, 열심히 라켓을 잡고 연습하였습니다. 결국 다시 국가대표에 복귀할 수 있었고 '86 아시아 게임‘에서 현정화 선수와 더불어 중국 팀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염은 계속 심해졌고 모두들 이제는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마다 저를 일으키셔서 저로 '88 서울 올림픽‘ 때도 국가대표로 출전하게 하셨습니다.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제 몸도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가눌 수조차 없었습니다. 현정화 선수와 함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한 경기 한 경기를 치렀습니다. 결국 중국과 또 다시 만난 복식 결승전... 결승전 당일 우리는 두 손을 마주잡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아무도 넘을 수 없을 것이라던 중국 탁구의 벽을 우리는 기도로 넘어섰던 것입니다. 기도로 우리는 올림픽 금메달을 조국의 목에 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몽골에서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며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리석게 산다.'고 걱정하지만 그들에게 저는 고백합니다. 예수님만이 저의 소망이시고 기쁨이요 힘이요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가치는 금메달이 아니라 천국의 면류관이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늘찬양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 새롭게 변화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삶의 목적이 바뀝니다. 운동을 하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합니다.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일을 해도 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합니다. 이것이 예수 믿고 변화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개인의 성공과 부귀영화를 위하여 살기보다는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구하며 사는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로 변화되어 나타나는 축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삶의 역할이 변화되었습니다.
삶의 목표가 변화된 사람은 그 목표에 합당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에게 바울의 역할을 밝히셨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그리스도는 먼 훗일을 생각하여 이미 바울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할 당신의 그릇으로 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로 하여금 곧 바로 사역에 임하게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아라비아 광야에 가서 3년 동안 사도로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준비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때 안디옥에는 최초로 이방인의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그 소식을 듣고 바나바라고 하는 신실한 목사를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었으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안디옥교회는 더욱 폭발적인 부흥의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자기 혼자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동역자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준비된 사람 사울을 다소에 가서 데리고 옵니다. 아주 중요한 인재를 발굴한 것입니다. 둘이 일 년 동안 큰 무리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행 11:26). 결국 안디옥교회는 놀라운 부흥과 함께 예루살렘교회의 어려움을 도울 수 있을 정도의 실력 있는 교회로 급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안디옥교회가 이러한 놀라운 성장을 맛보고 있을 때 성령님은 교회로 하여금 금식기도를 하게하셨습니다. 그때 성령님의 지시가 임하였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행 13:2) 안디옥교회는 성령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최초 이방 선교사로 파송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삶의 목표에 합당한 역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선교사였습니다. 두 사람의 일차 전도여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바나바에 의해서 사역이 주도되었으나 곧 바로 선교 사역의 주도권은 바울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봅니다. 사도행전 13장 9절에서부터 사울이라는 이름 대신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는 것을 보는데 이때부터 선교의 주도권을 바울이 잡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해야 할 역할을 바로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바나바의 희생이 뒷받침되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된 바울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않고 가서 복음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뿌린 씨가 잘 자라도록 잘 보살펴 주는 신실함을 다하는 충직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가는 곳마다 동족의 핍박과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회당에서도, 풍랑 중의 배 안에서도, 감옥에서도, 아그립바 왕이나 가이사 앞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교회를 위협하고 성도들을 잔해하였으나, 예수님을 만난 후로는 완전히 그 삶의 모습이 역전되어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위하고, 교회를 성장시키고, 성도 수를 더욱 늘리는 데 힘썼습니다. 바울을 통해서 세계복음화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성을 다하고 있나 돌아보십시다. 주님을 만나 변화되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썩어질 구습과 옛 생활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만나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전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여러분은 삶의 가치관이 변화되었습니까? 삶의 목적이 변화되었습니까? 더 나아가 삶의 역할이 변화되었습니까? 한 사람이 변화되면 세계도 변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한 사람이 변화되면 늘찬양교회가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만나 변화된 사도 바울처럼 변화된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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