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주일설교

소경의 변화 (변화설교 52번째)

늘찬양 2013. 11. 22. 21:46

 ♣ 소경의 변화 ♣

       요 9:13-41,2013.11.24.늘찬양교회

 

‘눈이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뭔가를 잘 줍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가 그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남들은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을 저는 자주 발견합니다. 그래서 돈을 자주 줍는 행운을 갖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차를 타고 가다가도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지갑을 발견하고 줍기도 합니다. 이렇듯 눈이 보배인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정말 보배로운 눈은 ... 돈을 줍고, 길가다 산삼을 발견하고 그래

서 부자가 되는 행운을 얻는 것보다도 더 귀한 생명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신비한 세계, 은혜의 세계, 영적 믿음의 세계, 영적인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복이 있습니다.

오늘은 실로암 연못에서 가서 눈을 씻음으로 닫혀져 있던 눈이 열리고 더 나아가 신비한 은혜의 영적 눈까지 열린 소경의 변화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Ⅰ. 숨겨진 교만과 위선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제자들이 그 소경을 보고서는 예수님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눅 9:1)하고 질문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질문하는 요지는 무엇일까요? 그들 속에 소경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사랑 때문일까요? 아니면 어떤 다른 생각이 숨어있어서 그러는 것일까요? 그 당시 유대인들은 치유가 불가능한 몹쓸 질병들에 대하여는 그들이 하나님께 잘못한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아 문둥병, 중풍병, 앉은뱅이, 벙어리, 소경과 같은 질병에 걸린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전통 사상 역시 저주나 불행한 일을 당하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거나 조상을 잘 못 만나서 그런 것으로 잘못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자신들과 소경을 비교해 볼 때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임을 은근히 자랑하기 위해서 내뱉은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들 속에는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 남을 비교하며 은근히 비방하는 말을 서슴없이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모습이 제자들만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많이 숨어있습니다. 그런 반면 나면서부터 소경인 이 사람은 보지 못한다는 것 하나 때문에 어려서부터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으며,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며, 죄인이 아니면서도 죄인의 굴레를 쓰고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한 채 불우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슬픈 인생이었습니다. 이런 소경을 도와주지 못할망정 정죄하고 비난하는 제자들과 바리새인들 … 이들에게 바른 인생관과 겸손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3절에 기록된 것처럼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말씀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7절)고 명령하였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직접 머리에 손을 얹으셔서 안수 기도를 통해 고쳐주셨는데 오늘은 불결하게도 침을 여러 번 뱉어 진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바른 것입니다.

Ⅱ. 눈을 떠서 보게 된 소경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명령을 받은 소경은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었을 때 그의 눈이 밝아져 보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할렐루야! 소경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세상을 지금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황홀하고 멋진 세상입니다. 말로만 듣고 손으로 만져보았던 것들이 자기의 눈으로 실제 보게 되니 얼마나 신기하고 기쁜지!... 참으로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한참동안을 그렇게 혼자서 기뻐하다가 문득... "아니지,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얼른 예수님께 가서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지...." 그래서 예수님이 계시던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미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디로 가셨을까?...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예수님에 행방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소경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예수님의 행적을 물으면서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니는 중에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저가 소경으로 길에 앉아 구걸하던 걸인이 맞도다 그런데 정말 저가 눈을 뜨고 건강한 모습으로 걸어 다니네...” 하며 놀라움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아니다 어떻게 소경이 눈을 뜨겠는가? 외모만 그와 비슷한 사람이다.”하며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사실을 확인하고자 전에 소경된 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하는 말이 “나는 전에 당신들이 본 소경 걸인이 맞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이 또 묻습니다. “어떻게 네가 눈을 뜨게 되었느냐?” 소경은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11절)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도 흥분하며 “그렇다며 너를 고친 그분이 어디 계시냐?”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소동이 확대될 것을 염려한 무리들이 전에 소경 되었던 자를 급히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대의 의인이요, 종교 지도자로서 명예와 부를 누리던 자들이었습니다. 누가 죄인이라고 정죄할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타인을 죄인이라고 정죄하면서 권위와 품위를 인정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바리새인들 앞에 서자 전에 소경된 자는 약간의 긴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근엄한 표정으로 묻습니다. “네가 어떻게 보게 되었느냐?”(15절) 전에 소경되었던 자가 당당하게 말합니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텐데 저가 내 눈을 뜨게 한 것을 보아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메시야, 보냄을 받은 자 등)이 맞도다. 그런데 왜 당신들은 성경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하면서도 이 사람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가?”(30-33절)하며 의아심 속에 반박하자 이들은 당황하였습니다. 기분이 상했던지 바리새인들은 “저가 죄 가운데 나서 우리를 가르치려 한다”(34절)고 구박하며 소경 되었던 자를 마을 밖으로 내어 쫓았습니다(요 9:35).

소경이 눈을 떴으면 놀라워하고 기뻐하고 축하해 주어야 할텐데.... 오히려 쫓아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세요... 축하해 주는 마음은커녕... 오히려 그를 붙잡아 문책하며 더 나아가 이제는 저가 안식일 날 병을 고침 받았다는 것을 핑계로 예수님까지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속에도 구원자 예수님, 사랑과 은혜의 예수님, 능력의 예수님,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체험으로 알지 못하고 성경지식으로만, 교회의 관습과 직분의 권위로만 예수님을 알고 장로나 권사가 되어 교회와 성도들을 어렵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역시 영적 소경에서 벗어나서 성령의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명심해야할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한 번 형식에, 겉치레에 빠진 사람들은 처음 예수 믿기보다도 더욱 힘들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만일 본문의 소경이었다면 이 순간 무엇이 가장 의아하고 궁금했을까요? 그것은 자신은 본래부터 소경이라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동네 사람들이나 바리새인들은 눈을 뜨고서도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을 뜨고도 주님을 몰라보는 인생!.... 그것은 소경보다도 더 불쌍한 인생인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서도 모르는 바리새인들은 분명 앞을 못 보는 진짜 소경이요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 소경의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전에 소경 된 자가 사람들 앞에서 변호하는 장면과 또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고백하는 장면을 통해 믿음이 변화되는 과정을 통하여 진정한 믿음으로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있어지기를 소망합니다.

Ⅲ. 눈을 뜬소경의 영적 변화

1. 예수라 하는 사람(세상적인 눈)

눈을 뜬소경은 맨 처음 신앙적인 관심이 없이 세상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증거가 소경이 실로암 연못에 가서 눈을 씻고 두 눈을 뜨고 나서 마을로 돌아 왔을 때 그가 깨끗해진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대답할 때에 “예수라 하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11절)하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에 대하여 표현하기를 "예수라 하는 사람이.."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가 예수님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예수에 대해 아는 지식은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별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는 아직까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구원자 예수,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알고 영접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영적 체험이 필요합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들도 아마 눈을 뜬소경 정도의 신앙 가지고 믿음의 여정을 시작할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소경이 눈을 뜨게 된 것이 남들보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많음으로 인해 예수님이 감동을 받아서 눈을 뜨게 해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자원함으로 소경을 찾아와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심으로 눈을 떴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혜를 입고 눈을 뜨는 기적의 은총을 덧입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구원의 비밀이며, 은총의 선물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눈을 떴으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구원의 은혜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속에 담겨져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2. 선지자이니이다.(종교적인 눈)

소경은 세상적인 눈에서 조금 더 나아가 종교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눈 뜬 소경을 다시 불러 문책하기를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고 여기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지자니이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선지자는 그 당시에 유대사회의 영적인 지도자를 말합니다. 처음에 그는 '예수라 하는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했다고 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선지자'라 하는 그 사람이 나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세상적인 눈에서 종교적인 눈으로 한 단계 올라갔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도 그저 교회 문턱만 왔다갔다 밟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위대한 지도자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밤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누구라고 불렀습니까? "하나님께 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그랬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적인 지도자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로서 온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종교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뛰어 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할 때에... "예수님은 종교적인 지도자요 위대한 영적 지도자입니다 특별한 사람입니다. 우리와 다른 차원의 사람입니다" 하는 그 관점에서 뛰어 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도자나 위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모든 사람의 죄 값을 청산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처음에 예수를 믿으면 어떻습니까? 교회에 처음 나오게 되면... 설교를 들으면서도 뭐가 뭔지를 잘 모릅니다. 말씀의 내용이나 예배의 본질보다는... "목사님 설교 잘하더라, 목소리가 좋더라... 성가대 노래 듣기 좋더라..." 세상적인 눈으로만 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바뀝니다.

그런데... 이 소경 역시 맨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란 사람으로 알았고 이제는 한 단계 올라가서 종교적인 눈으로 선지자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27절을 보세요.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여기서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하는 말은 비웃는 말입니다.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눈을 뜨게 했다고 말했는데 왜 자꾸 묻느냐? 왜 자꾸 나를 귀찮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만큼 이 사람은 이제... 예수 쪽에 와 있습니다.

이렇듯 여러분의 신앙도 조금씩 성장하는 변화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10년 전이나 5년 전이나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죽은 믿음이거나 아직도 영적 소경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제자훈련에 참여하십시오. 그래서 더 깊이 있는 말씀연구를 통해 하나님을 바로 알아 가는 놀라운 영적 변화가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주여 내가 믿나이다.(신앙적인 눈)

눈뜬 소경의 세 번째 변화는 38절에 기록된 대로 "주여 내가 믿나이다."는 고백을 하기까지 변화가 된 것입니다. 세상적인 눈에서, 종교적인 눈으로 종교적인 눈에서 신앙적인 눈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소경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눈을 뜬 자는... 당연히, 반드시... 이 사람과 같은 믿음의 성장 과정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성장해야만 믿음입니다. 생명이 있는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고 잎이 나고...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듯이...생명 되신 예수로 말미암아 눈을 뜬 자는 이렇게 믿음이 성장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눈을 뜬 이 사람에게 있어서 이런 고백은 쉽지 않은 고백입니다. 눈뜬 소경이 바리새인들 앞에서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하느냐?”(27절) 질문하고, 또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는데 이 분이 나의 눈을 고친 것으로 보아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고서야 어떻게 내 눈을 뜨게 할 수 있겠느냐?”(32-33절) 할 때에 저들은 분노하며 34절에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출교를 가르치는 것으로 출교를 받은 사람은 그 사회로부터 완전 매장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들이 학교를 다닐 수도 없고, 직장에 취직할 수도 없습니다. 마켓에 가서 물건을 사지도 못하고 주민등록증도 발급 받지 못합니다. 완전히 사람들이나 사회로부터 왕따가 되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출교라는 무서운 징벌입니다. 아직도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흰두교와 이스람권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출교를 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까지 믿음이 성장한 눈뜬 소경에게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눈을 뜨게 한 그 사람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36절에 있는 대로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소경이라서 주님을 보지 못했고... 눈을 뜨고 난 후 처음으로 주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앞에 있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그분을 믿고 싶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그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럴 때에 주님께서 37절 말씀에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바로 그라고 하실 때...그는 즉시 "주여 내가 믿나이다.“고 주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할렐루야!

4. 절하는 지라 (경배하는 신앙)

눈뜬 소경은 어느새 신앙적인 눈을 가진 사람으로 더 나아가 경배하는 신앙인으로 까지 성장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영접한 자들에게는 이런 믿음의 성장이 일어나야 합니다. 특별히 본문 38절을 보세요.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그랬습니다. 여기서 절한다는 의미는 신적인 경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면서 그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을 경배하는 자리까지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성숙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경배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면서 제대로 예배하지 않는 것, 믿음이 좋다고 하면서 경배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것... 이것은 믿음의 참된 성장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 늘찬양교회 성도님들이 단순하게 예수님을 고백하고 종교적인 신앙생활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찬양과 경배의 자리까지 나와서 진실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로 거듭나는 변화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일반적인 세상지식 수준의 예수님으로 알고 머물고 있습니까? 아니면 종교적인 선지자 정도에 머물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까지 고백하는 믿음에 머물고 있습니까? 아니면 더 나아가 경배와 찬양의 신앙까지 머물고 있습니까? 내 안에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경배의 자리까지 가지 않으면 우리는 사소한 일에 대하여 낙심하고 비판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맙니다. 조그마한 시련과 환란이 와도 넘어지고 맙니다. 더 나아가 바리새인처럼 논쟁과 비판을 일삼고, 바리새인들처럼 고소하고, 바리새인들처럼 정죄하고 사람에게 짐을 지우고...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는 사람으로 머물고 맙니다. 지금 우리에게 문제는 교회 안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문제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목회자 'Aw. 토저'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알지 않는 한 아무도 그를 경배할 수 없다!"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알면... 하나님 앞에 경배하며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영적 눈먼 자에서 영적 눈뜬 자들로 우리의 모습, 우리의 신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영적 눈을 뜬 자는 세상에서 고통당하며 핍박당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는 것이라.”는 고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렇든 우리는 개인의 안락과 평안만을 구하며 살아가는 수준에서 하늘나라 영적대사의 사명을 가지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영적 눈을 뜬 자는 반드시 신앙이 성장해야합니다. 사람에서 선지자로, 선지자에서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더 나아가 모든 삶에서 범사에 감사하며 온전히 주님을 경배하는 순종의 자리까지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주님을 진실로 경배하는 영광의 자리에까지...신앙이 성장해 나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공부>

1. 제자들이 길가다 만난 소경을 보고 예수님께 이 사람이 소경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묻는 질문 속에 담긴 제자들의 본심

은 무엇일까요?

소경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사랑 때문이 아니라 제자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의로움의 교만 때문이다.

② 당시 소경, 문둥병환자, 중풍병환자, 벙어리들이 다 죄로 인해 몹쓸 질병에 걸렸다고 믿고 있었다.

③ 우리는 그런 질병에 걸리지 아니한 고로 자신들은 정직하고 깨끗하며 죄가 없는 의로운 자라는 교만과

더불어 소경을 죄인으로 취급하고 있다.

④ 소경은 죄인이 아니면서도 죄인의 굴레를 쓰고 왕따를 당하는 등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불우한 환경

속에 살고 있었다.

2.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였습니까?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하셨습니까?

‘이 사람이나 그 부모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심.

② 사람들을 정죄하고 조롱하기에 앞서 내가 저들을 도와줄 수 없는가를 살펴 복음과 은혜의 장으로 인도해

내야할 사명이 성도들에게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것이 빛으로 부름을 받은 성도의 사명이다.

③ 예수님은 진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령하셨다.

3.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실로암에 가서 씻음으로 눈을 뜬소경은 사람들로부터 누가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는 질문을 받았다. 이런 질문을 누가했으며 질문에 담긴 이들의 속

내는 무엇이었습니까?

① 실로암에 사는 많은 사람들과 바리새인들로부터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② 눈뜬 소경에 대한 관심보다는 안식일에 병고침을 행한 예수님에 대하여 질책과 원망의 마음이 더 많았다.

③ 소동하였다는 것은 눈을 뜨게 한 기적의 능력자 예수님에 대한 환호가 아니라 안식일의 규례를 범한 자에 대

한 징계가 있어야 한다는 분노의 목소리이다. 그 결과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일에 혈안이 되었다.

④ 이런 자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체험과 존경보다는 교회의 관습과 직분에 대하여 더 관심을 갖고 안

일 무사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에게서 쉽게 나타난다.

4. 눈을 뜬소경은 자신을 모해하며 질책하려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떤 의문점을 갖게 되는가? 그런 갈등 속에서 소경은 어떤 믿음의 발전과 확신을 가지게 됩니까?

▶ ① 자신은 날 때부터 소경인지라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귀로 듣기만 했다. 그런데 두 눈을 뜨고서 예수님을

만나본 이들은 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지 못하는가? 이들은 사물을 정확히 살펴볼 줄 아는

정상적인 두 눈을 가진 자들이 맞는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② 소경은 예수님을 변호하면서 맨 처음에는 ‘예수라 하는 사람’으로 육신적인 눈으로 예수를 보았다. 두 번째는

선지자라는 종교적인 눈으로 예수를 보았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경배하였다.

5. 후에 예수님을 만나서 “내가 네 눈을 뜨게 해준 장본인이다”는 응답을 받고 어떤 고백과

행동을 합니까? 이를 통해서 깨닫는 영적교훈은...

① ‘주여 내가 믿나이다.’고 엎드려 절하며 예수님을 경배하였다.

② 성숙한 믿음의 사람은 예수님을 구주로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경배하며 영광 돌리는

은혜의 자리 섬김의 자리, 예배의 자리까지 나가야 한다.

③ 믿음이 좋다고 하면서 주일성수를 빼먹는 등 예배생활을 게을리 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속에 주님에 대한

진정한 경배의 자세가 없는 것이다. 형식으로 만족하는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6. 눈뜬 소경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최고의 영적교훈은 무엇입니까?

① 눈뜬 소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나 자신은 어디까지 믿고 따르고 있는가? 를 돌아보게 한다.

② 영적 눈을 뜬 자들은 개인의 안락과 평안을 추구하는 수준의 신앙에서 머무는 자가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며

온전한 찬양의 제사로 삶의 매순간을 살아가는 자들임을 깨닫고 항상 주님을 예배하는 자로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