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님
눅 12:49~56, 2024.06.16.늘찬양교회
최근에 아이슬란드 기상청은 “그린다비크 북쪽 순드누카기가르 근처에서 분화가 시작됐다”며 “약 3.4㎞ 길이의 갈라진 틈에서 용암이 약 50m 높이로 분출돼 그린다비크를 향해 흐르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지역은 800년 동안 휴화산이었다가 활화산으로 바퀴었으며, 최근 6개월 동안 5번이나 폭발했습니다.
이런 화산폭발의 뉴스와 함께 불에 관한 비유를 전하게 되어 나름대로 감동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해 주신 말씀으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밝혀 주신 말씀이면서, 무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일기를 예상하고 분별하는 것처럼 시대의 상황을 보고 시대를 알아야 한다며 경고성 말씀으로 들려주신 내용입니다.
Ⅰ. 불을 땅에 던지러
성경에서 우리가 불이란 말을 접하게 될 때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심판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리셨을 때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여 하늘에서 땅에 불을 내리셨을 때 그것은 악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땅에 불을 던지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불”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성령”이라는 견해도 있고, “영적인 활동”이라는 의견도 있고 “심판”, “로마의 침략”, “신자에 대한 불신자의 적대감”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은 딱 한가지라고 꼬집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심판을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말씀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불을 땅에 던지러 왔는데 불이 아직 붙지 않아서 마음이 답답함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그분은 진정 불이 붙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불이 붙기를 원하셨는데 그 불은 어떤 불일까요?
1. 말씀의 불입니다.
예수님은 불같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시는 반면 잘못된 것들과 죄악 된 행동들에 대해서 날카롭게 책망하셨습니다. 심지어 성전에서 돈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을 업푸시면서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2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가하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서 말씀을 들려주셨을 때 저들이 고백하기를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마다 말씀으로 뜨겁게 사명을 받습니다. 변화를 요구받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자들은 사명자가 되어 변화된 삶을 살아갑니다. 이렇듯 살아있는 말씀을 내 말씀으로 받을 때 불같은 은혜가 임합니다.(렘 23:29)
2. 사랑과 희생의 불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나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침례란 십자가 고난을 가리킵니다. 마치 어린양이 제단 위에서 불에 태워지듯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인류에 대한 사랑과 인류를 위한 희생의 불로 자신의 몸을 사르셨습니다. 사실상 그분이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때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생애는 사랑과 희생의 불로 계속해서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비롯해 믿음의 사람들이 꺼지지 않는 사랑과 희생의 불이 되어 십자가의 전달자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3. 성령의 불입니다.
성령의 침례가 임하기 전까지는 예수님도 성령의 침례를 아직 받지 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성령의 침례가 임했을 때 하늘 문이 열리면서 하나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며 하나님께서 구원자로서의 명분을 세워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성령 침례를 받기 전까지 그 영광을 나타내기까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다시 말해 성령의 불을 받기 전까지 말씀과 성령을 가르쳐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깨달을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불의 속성 중에 하나가 불은 태울 것이 남아 있는 한 절대로 꺼지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번져갑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불을 그의 제자들에게 지펴 주셨습니다. 마가 다락방에 120 문도가 뜨겁게 기도할 때 오순절 거룩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2장 1~4절에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래서 그 불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우리는 땅에 “불을 던지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그 사명을 물려받은 제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도 이 땅에 불을 던지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큰불을 일으키어 곧 주위 사람들을 이 불길 속에 끌어들인다면 주님께서 그보다 더 기뻐하실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의 불을 던지셨습니다. 사랑과 희생의 불을 던지셨습니다. 성령의 불은 아직 던져지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이미 던지신 말씀의 불과 사랑과 희생의 불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불이 붙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불이 잘 붙지 않아 답답해하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앞서 신실치 못한 청지기 비유를 하셨는데 주인의 말을 들어 그의 뜻을 알면서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하는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이 불이 붙지 않은 사람입니다. 어쩌면 아직까지도 그분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열두 제자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주님이 던지신 불로 인해 불이 붙었습니까? 불이 붙었는지 그 증상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 불로 인해 우리 안의 미움, 질투, 시기, 다툼, 욕심 등이 타버렸습니까? 그 불로 인해 우리가 주님을 위한 열정으로 뜨거워지고 있습니까? 그 불로 인해 주님처럼 우리 자신을 희생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등잔에 불이 타오르고 있어 주위를 환하게 비취고 있습니까?
Ⅱ. 주님의 답답함
50절에 “나는 받을 침(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받으실 침(세)례는 다가오는 십자가의 고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은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세상에 생명을 주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길을 가는 것인데 그 고난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시면서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과 제자들이나 사람들의 기대가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답답하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다가 동문서답하는 경우를 만나면 얼마나 답답해합니까. 예수님의 마음은 바로 그런 상태였을 것입니다. 삼년동안 가르치고 보여주시고 했어도 큰소리만 쳤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 버릴 뿐 아니라 저주하며 부인하는 자리까지 간 제자들의 모습에 예수님의 답답함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다 이루시기까지는 그 답답한 마음을 계속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마음에 답답함을 주는 삶을 살지는 않는지요? 여전히 높은 자리를 찾고, 많은 것을 구하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며, 예수님을 팔아서 자기를 들어내고 자신의 배를 불리는 그런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은 구름을 보고 기상 상태를 예상합니다. 요즘은 과거와는 달리 거의 정확하게 일기예보를 해줍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한다던지 계획을 세울 때 기상 예보를 참고해서 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 아는데 주님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니 얼마나 주님은 답답하시겠습니까?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별치 못하느냐?”(56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의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십니까?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십자가 고난을 당하셔야 하셨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그토록 무서운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는데 아직도 그 고난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답답한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릴 수 있을 까요? 주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희생하셨는가를 깨닫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성도가 될 때 주님의 답답함이 풀어지지 않을까요?
Ⅲ. 화평이냐? 분쟁이냐?
51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 로라" 사실 이 말씀을 읽을 때 믿음이 약한 자들은 이 말씀이 과연 주님이 주신 말씀일까 하는 의심이 일던 적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해가 됩니다. 여러분 중에 주님의 말씀처럼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가족 간에 불화가 없던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습니까? 처음 예수를 믿을 때 믿지 않는 가족들과의 갈등이 심각했을 것입니다. 더불어 복음이 이 땅에 전파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까? 그 많은 박해와 순교의 역사를 우리는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납니까? 그 대답이 이미 말씀에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오신 목적이 “불을 던지기 위해서 오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그 복음이 내 속에서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또한 믿지 않는 이들과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단지 자신의 결점이나 감추어 주고 울화를 달래주거나 슬픔을 달래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 나약한 것에 불과하다면 굳이 분쟁이 일어날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변화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먼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죄부터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죄를 그저 눈감아버리는 것이 평화라고 해서 그냥 내버려둔다면 아무런 분쟁이 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동안 우리가 지니고 살던 모든 안이한 삶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는 자들은 인격이 변화고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남의 재물을 수탈하여 자신의 금고를 채우던 세리장이 변화되어서 타인을 위해 자신의 재물을 아낌없이 나누어주기도 하고, 예수믿는 자들을 잡아 가두던 그 포악한 사울이 변하여 위대한 전도자 바울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불의 가진 특성 때문입니다. 불의 가장 큰 특징은 태우는 것입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회사에서 퇴근하여 처가를 방문하였는데 그곳에서 마늘을 뽑고 난 부스러기들을 모아서 불로 태웠습니다. 그리고 태워진 잔해는 밭에 뿌려서 거름으로 녹아나서 땅을 기름지게 만들어 줍니다. 이렇듯 불은 내 속에 있는 죄를 태우고, 악한 본성을 태우고, 잘못된 인격을 태우고, 불의한 욕심을 태우고, 잘못된 개인주의를 태웁니다. 그래서 조화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빚어져 갈 사명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우리 주님은 아직도 불이 붙지 않아 이름만 번드레한 교인이 아니라 실제 삶에 예수의 영, 생명의 영을 불어넣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의 타성 때문에 무기력함 때문에 여전히 죄의 지배를 받는 삶, 육신의 영이 삶을 지배하는 삶이 아니라 불붙어 타오르는 열심을 갖고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성령의 사람으로 우리가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습니다. 이 불이 붙으면 소속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물과 기름이 결코 하나 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이렇게 구별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구별된 백성이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에게는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전쟁은 때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전쟁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우리가 눈으로 확연하게 볼 수 있는 육적인 전쟁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우리는 각오해야 합니다. 어떤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어야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먼저는 내 심령에 성령의 불이 붙어야 하고 나아가 그 불이 삶에 녹아나야 합니다.
그래서 더 좋은 씨앗과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한 알의 밀알로 거듭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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