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설교]나오미의 귀향
나오미의 귀향
룻기 1장 19~22절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고향! 듣기만 하여도 정겹고, 생각만 해도 푸근한 말입니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추석 명절이 다가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고향을 찾아, 친족을 찾아 이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찾는 열심은 대단합니다. 아마 세계에서 2등 가라면 서러워할 겁니다. ‘귀성 전쟁’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고향길이 고생길이지만, 기어코 고향을 찾아가야 직성이 풀리는 게 바로 우리 민족인 것입니다. 이따금 고향을 너무 따져서 부작용도 있지만 어쨌든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아름답습니다. 재미 교포 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미국 LA에 고향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작은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교회 모습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 교회 이름은 '언제나 그리운 고향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고향에 대해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얼른 생각해 봐도 우리에게는 고향 노래가 유난히 많습니다. 우리가 학창 시절 부르던 노래 중 오래도록 생각나는 것들도 대충 고향 노래입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 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고향의 봄, 홍난파 작),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을 눈에 어리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가고파, 이은상 시/김동진 곡) 모두 다 한국인의 심령 깊숙이 스며있는 노래들입니다.
이렇게 그립고 좋은 고향이기에 모든 이들이 고향을 찾는 것입니다. 특히 흥미롭고 주목할 것이 있는데... 여러분, 언제 우리가 고향 생각을 많이 합니까? 이런 명절말고 괴로울 때, 병들었을 때, 늙어졌을 때 고향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또 많은 사람들의 소원이 종국에는 그 육신이 고향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독 한국인만의 정서는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귀소본능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 육신의 고향이 그렇게 소중한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영혼의 고향이 소중하다는 사실입니다. 육신의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이 안타까운 그 이상으로 영혼의 고향을 잃어버린 ‘영적 실향민’은 정말 불쌍한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 영혼의 고향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하나님 품’, 그리고 장차 돌아갈 ‘하나님 나라’입니다. 전도서 12장 7절에 “흙(육신)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혼)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히브리서 11장 13-1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아브라함, 믿음의 조상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비록 고향을 떠나 있지만 항상 마음에 고향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넉넉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 나라가 멀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항상 하늘 나라를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 하나님이 비록 눈에 확연하게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영혼에 풍성함이 있는 사람입니다.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이 바로 그런 것이죠. 하나님을, 하늘 나라를 영혼의 고향 삼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영혼의 고향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지성이라고 할 만한 사르트르는 살아 생전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갈파했지만, 막상 임종시에는 자신에게 영혼의 고향이 없는 것은 한탄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아, 아, 나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구나!” 그러므로 여러분, 이 시간 각자 내 영혼의 고향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에게는 그리워하는, 그리고 푸근한 영혼의 고향이 있는가? 내가 장차 돌아갈 영혼의 고향이 있는가?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고향을 잃었다가 되찾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바로 나오미입니다. 이 사람을 통해 영혼의 고향이 얼마나 소중한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영혼의 고향을 다시 한 번 발견하시고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고향을 등진 나오미 가족
사사 시대에 베들레헴에 엘리멜렉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읍의 유지로서 비교적 유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흉년은 자연 재해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당시 사사 시대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다른 신을 섬기고 제멋대로 살던 영적, 도덕적 암흑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경종을 울리기 위해 자연 재해나 전쟁 등을 통해 징계를 하시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징계를 회피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이끌고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갑니다. 이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게 문제입니다.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 앞에서 당해야 되는데 하나님을 멀리 떠나 스스로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처럼 고향을 등지고 떠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약속의 땅입니다. 그 땅에 머물고 그 땅을 지키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땅을 떠나는 것은 종종 하나님을 멀리하고 떠나는 불신앙을 의미합니다. 더욱 모압 땅에 가서 이방 며느리를 본 것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행위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방 결혼을 금한 이유는 전적으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고향을 떠난 것은 단순한 이민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요, 신앙의 변질이었던 것입니다.
타향에서 환란 당한 나오미 가족
모압 땅에 간 지 얼마 안되어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두 아들도 연달아 죽습니다. 결국 나오미와 두 자부만 남게 되었습니다. 10여 년 만에 완전히 파산한 것입니다. 가족 다 잃고, 있던 재산 다 잃어버린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다 이렇습니다. 자기 혼자서 잘 살아갈 것 같지만 결국은 영적 파산자가 됩니다. 인간은 아무리 큰 소리 쳐도 하나님을 떠나서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영적 타향살이에는 뭔가 문제가 생깁니다. 종국에는 멸망하게 됩니다. 환란을 당한 나오미 가족의 이야기는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웅변적으로 말해 줍니다.
고향을 되찾은 나오미
나오미는 다행히 환란을 당한 후에 그동안 잊었던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을 기억했습니다. 마침 고향 소식을 들었는데(6절), 그곳에 흉년이 그치고 풍년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만 참았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생겼을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 생활은 항상 평탄하지만은 않음을 기억하십시오. 때로는 환란도, 고통도 찾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않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다 회복시켜 주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롬 8:28, 갈 6:9). 그런데 그걸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세상 욕심을 따라 하나님을 등지면 반드시 화가 있습니다. 피하려고 하던 환란과 고통보다 더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나오미가 그랬던 것입니다.
늦게나마 그녀는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염치없고 부끄럽고 자존심도 상했지만 무조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결단합니다. 그녀의 결단과 귀향 과정이 6절 이하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돌아가려 하여 ...”(6절), “... 돌아오려고 길을 떠나 ...”(7절), “이에 그 두 사람(나오미, 룻)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 ...”(19절).
나오미의 이런 결단은 분명 하나님께 돌아오는 회개였습니다. 그녀가 고향에 돌아갔을 때 마을 사람들이 알아보고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뭐라고 말합니까? 자기를 ‘나오미’(희락, 기쁨)라고 부르지 말고, 이제는 ‘마라’(괴로움, 쓴맛)로 부르라는 것입니다(20절). 그리고 이렇게 된 것이 다 자신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임을 겸손히 고백합니다(21절). 그녀는 고향 땅에 돌아온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영적인 고향인 하나님께 돌아온 것입니다.
귀향한 나오미의 축복
나오미가 고향에 돌아오자 하나님은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부끄러워서 겨우 왔는데 고향 사람들이 따뜻하게 맞이합니다(19절). 또 마침 돌아온 시기가 언제였나요? 보리 추수기(니산월, 양력 3-4월)였습니다(22절). 이스라엘의 율법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이삭을 다 베지 않고 남기기 때문에 그것만 주워도 충분히 먹고 삽니다. 살 길이 열린 겁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룻이 찾아간 곳이 묘하게도 나오미 가문을 위해 기업을 무를 자인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기업 무른다는 것은 어떤 가문이 망하면 제일 가까운 친족이 책임지는 관습입니다. 후손이 없으면 남은 여인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주고, 재산도 보상해 줍니다. 보아스는 마침 신앙이 좋은 부자여서 충분히 그럴 수 있었습니다. 결국 룻과 보아스가 결혼해서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 때 나오미가 맛본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룻 4:16-17). 씨가 마른 가문에 아들이 생겼습니다. 노년에 자기가 낳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 쓰러진 가문이 일어섭니다. 특히 그 후손 가운데 다윗 왕이 나고, 그리스도가 납니다. 온 동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축하를 받으며 기뻐하는 나오미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 고향이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육신의 고향도 좋지만 영혼의 고향은 더욱 좋은 것입니다. 나오미가 회개하고 영혼의 고향인 하나님께로 돌아오니까 모든 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나오미의 이 놀라운 축복의 사건은 누가복음 15장 11절 이하의 ‘탕자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잘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재산 탕진하고 돼지 치고 쥐엄 열매도 먹지 못하는 신세가 됩니다. 이때 비로소 아버지 집(고향)을 그리워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회개하고 돌아갑니다. 여러분, 그때 아버지가 어떻게 해 주셨습니까? 동구 밖에 매일 나가 기다리던 아버지가 멀리 돌아오는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얼싸안고 입을 맞춥니다. 가락지를 끼워 주고 새 옷을 입히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고 즐거워합니다(눅 15:20, 22-24). 탕자가 다른 것은 다 잘못했지만 단 한 가지 잘한 게 있는데, 아버지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비참에 빠졌던 나오미가 할 수 있었고, 해야 되었던 것은 오직 하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초라하고 부끄럽지만, 면목이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단지 돌아온 것 그 한 가지만 보시고 그녀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인간의 최선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천국을 소망하며 믿음 생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영혼의 고향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고향이 있습니다. 육신의 고향, 그리고 영혼의 고향입니다. 영혼의 고향으로 가는 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스스로 잘 살아 보겠다고 방황하면서 지은 모든 죄를 십자가 피로 대속하신 예수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혼의 고향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러므로 여러분, 영혼의 고향 하나님 품 안에 안기십시오! 매일 매일. 그리고 그분 안에 있는 참 기쁨과 평안을 맛보십시오. 누리십시오. 때로는 인생이 힘들고 피곤할지라도 하나님품 안에 안기면 또 다시 위로하시고, 모든 것을 책임 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또 한 가지, 언젠가 우리의 인생이 다하는 그 날 우리는 영원한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먼 것 같지만, 한 시 앞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 예수님 손을 잡고 우리는 영원한 고향에 갈 겁니다. 하늘 나라! 그곳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것입니다.
추석 명절! 육신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찾아보는 계절입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에게 영혼의 고향에 관한 깊은 묵상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함께 모인 가족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 가족들이 영혼의 고향 하나님의 품 안에 안겨 참 기쁨과 소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고행을 등진 나오미가 아니라 고행을 찾아 귀향한 나오미의 복된 모습으로 내내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오미의 귀향
룻기 1장 19~22절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고향! 듣기만 하여도 정겹고, 생각만 해도 푸근한 말입니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추석 명절이 다가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고향을 찾아, 친족을 찾아 이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찾는 열심은 대단합니다. 아마 세계에서 2등 가라면 서러워할 겁니다. ‘귀성 전쟁’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고향길이 고생길이지만, 기어코 고향을 찾아가야 직성이 풀리는 게 바로 우리 민족인 것입니다. 이따금 고향을 너무 따져서 부작용도 있지만 어쨌든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아름답습니다. 재미 교포 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미국 LA에 고향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작은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교회 모습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 교회 이름은 '언제나 그리운 고향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고향에 대해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얼른 생각해 봐도 우리에게는 고향 노래가 유난히 많습니다. 우리가 학창 시절 부르던 노래 중 오래도록 생각나는 것들도 대충 고향 노래입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 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고향의 봄, 홍난파 작),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을 눈에 어리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가고파, 이은상 시/김동진 곡) 모두 다 한국인의 심령 깊숙이 스며있는 노래들입니다.
이렇게 그립고 좋은 고향이기에 모든 이들이 고향을 찾는 것입니다. 특히 흥미롭고 주목할 것이 있는데... 여러분, 언제 우리가 고향 생각을 많이 합니까? 이런 명절말고 괴로울 때, 병들었을 때, 늙어졌을 때 고향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또 많은 사람들의 소원이 종국에는 그 육신이 고향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독 한국인만의 정서는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귀소본능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 육신의 고향이 그렇게 소중한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영혼의 고향이 소중하다는 사실입니다. 육신의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이 안타까운 그 이상으로 영혼의 고향을 잃어버린 ‘영적 실향민’은 정말 불쌍한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 영혼의 고향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하나님 품’, 그리고 장차 돌아갈 ‘하나님 나라’입니다. 전도서 12장 7절에 “흙(육신)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혼)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히브리서 11장 13-1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아브라함, 믿음의 조상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비록 고향을 떠나 있지만 항상 마음에 고향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넉넉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 나라가 멀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항상 하늘 나라를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 하나님이 비록 눈에 확연하게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영혼에 풍성함이 있는 사람입니다.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이 바로 그런 것이죠. 하나님을, 하늘 나라를 영혼의 고향 삼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가장 복된 인생입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영혼의 고향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지성이라고 할 만한 사르트르는 살아 생전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갈파했지만, 막상 임종시에는 자신에게 영혼의 고향이 없는 것은 한탄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아, 아, 나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구나!” 그러므로 여러분, 이 시간 각자 내 영혼의 고향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에게는 그리워하는, 그리고 푸근한 영혼의 고향이 있는가? 내가 장차 돌아갈 영혼의 고향이 있는가?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고향을 잃었다가 되찾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바로 나오미입니다. 이 사람을 통해 영혼의 고향이 얼마나 소중한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영혼의 고향을 다시 한 번 발견하시고 복된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고향을 등진 나오미 가족
사사 시대에 베들레헴에 엘리멜렉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읍의 유지로서 비교적 유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흉년은 자연 재해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당시 사사 시대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다른 신을 섬기고 제멋대로 살던 영적, 도덕적 암흑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경종을 울리기 위해 자연 재해나 전쟁 등을 통해 징계를 하시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징계를 회피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이끌고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갑니다. 이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게 문제입니다.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 앞에서 당해야 되는데 하나님을 멀리 떠나 스스로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처럼 고향을 등지고 떠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약속의 땅입니다. 그 땅에 머물고 그 땅을 지키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땅을 떠나는 것은 종종 하나님을 멀리하고 떠나는 불신앙을 의미합니다. 더욱 모압 땅에 가서 이방 며느리를 본 것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행위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방 결혼을 금한 이유는 전적으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고향을 떠난 것은 단순한 이민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요, 신앙의 변질이었던 것입니다.
타향에서 환란 당한 나오미 가족
모압 땅에 간 지 얼마 안되어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두 아들도 연달아 죽습니다. 결국 나오미와 두 자부만 남게 되었습니다. 10여 년 만에 완전히 파산한 것입니다. 가족 다 잃고, 있던 재산 다 잃어버린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다 이렇습니다. 자기 혼자서 잘 살아갈 것 같지만 결국은 영적 파산자가 됩니다. 인간은 아무리 큰 소리 쳐도 하나님을 떠나서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영적 타향살이에는 뭔가 문제가 생깁니다. 종국에는 멸망하게 됩니다. 환란을 당한 나오미 가족의 이야기는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웅변적으로 말해 줍니다.
고향을 되찾은 나오미
나오미는 다행히 환란을 당한 후에 그동안 잊었던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을 기억했습니다. 마침 고향 소식을 들었는데(6절), 그곳에 흉년이 그치고 풍년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만 참았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생겼을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 생활은 항상 평탄하지만은 않음을 기억하십시오. 때로는 환란도, 고통도 찾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않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다 회복시켜 주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롬 8:28, 갈 6:9). 그런데 그걸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세상 욕심을 따라 하나님을 등지면 반드시 화가 있습니다. 피하려고 하던 환란과 고통보다 더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나오미가 그랬던 것입니다.
늦게나마 그녀는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염치없고 부끄럽고 자존심도 상했지만 무조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결단합니다. 그녀의 결단과 귀향 과정이 6절 이하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돌아가려 하여 ...”(6절), “... 돌아오려고 길을 떠나 ...”(7절), “이에 그 두 사람(나오미, 룻)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 ...”(19절).
나오미의 이런 결단은 분명 하나님께 돌아오는 회개였습니다. 그녀가 고향에 돌아갔을 때 마을 사람들이 알아보고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뭐라고 말합니까? 자기를 ‘나오미’(희락, 기쁨)라고 부르지 말고, 이제는 ‘마라’(괴로움, 쓴맛)로 부르라는 것입니다(20절). 그리고 이렇게 된 것이 다 자신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임을 겸손히 고백합니다(21절). 그녀는 고향 땅에 돌아온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영적인 고향인 하나님께 돌아온 것입니다.
귀향한 나오미의 축복
나오미가 고향에 돌아오자 하나님은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부끄러워서 겨우 왔는데 고향 사람들이 따뜻하게 맞이합니다(19절). 또 마침 돌아온 시기가 언제였나요? 보리 추수기(니산월, 양력 3-4월)였습니다(22절). 이스라엘의 율법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이삭을 다 베지 않고 남기기 때문에 그것만 주워도 충분히 먹고 삽니다. 살 길이 열린 겁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룻이 찾아간 곳이 묘하게도 나오미 가문을 위해 기업을 무를 자인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기업 무른다는 것은 어떤 가문이 망하면 제일 가까운 친족이 책임지는 관습입니다. 후손이 없으면 남은 여인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주고, 재산도 보상해 줍니다. 보아스는 마침 신앙이 좋은 부자여서 충분히 그럴 수 있었습니다. 결국 룻과 보아스가 결혼해서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 때 나오미가 맛본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룻 4:16-17). 씨가 마른 가문에 아들이 생겼습니다. 노년에 자기가 낳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 쓰러진 가문이 일어섭니다. 특히 그 후손 가운데 다윗 왕이 나고, 그리스도가 납니다. 온 동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축하를 받으며 기뻐하는 나오미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 고향이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육신의 고향도 좋지만 영혼의 고향은 더욱 좋은 것입니다. 나오미가 회개하고 영혼의 고향인 하나님께로 돌아오니까 모든 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나오미의 이 놀라운 축복의 사건은 누가복음 15장 11절 이하의 ‘탕자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잘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재산 탕진하고 돼지 치고 쥐엄 열매도 먹지 못하는 신세가 됩니다. 이때 비로소 아버지 집(고향)을 그리워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회개하고 돌아갑니다. 여러분, 그때 아버지가 어떻게 해 주셨습니까? 동구 밖에 매일 나가 기다리던 아버지가 멀리 돌아오는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얼싸안고 입을 맞춥니다. 가락지를 끼워 주고 새 옷을 입히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고 즐거워합니다(눅 15:20, 22-24). 탕자가 다른 것은 다 잘못했지만 단 한 가지 잘한 게 있는데, 아버지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비참에 빠졌던 나오미가 할 수 있었고, 해야 되었던 것은 오직 하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초라하고 부끄럽지만, 면목이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단지 돌아온 것 그 한 가지만 보시고 그녀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인간의 최선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천국을 소망하며 믿음 생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영혼의 고향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고향이 있습니다. 육신의 고향, 그리고 영혼의 고향입니다. 영혼의 고향으로 가는 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스스로 잘 살아 보겠다고 방황하면서 지은 모든 죄를 십자가 피로 대속하신 예수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혼의 고향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러므로 여러분, 영혼의 고향 하나님 품 안에 안기십시오! 매일 매일. 그리고 그분 안에 있는 참 기쁨과 평안을 맛보십시오. 누리십시오. 때로는 인생이 힘들고 피곤할지라도 하나님품 안에 안기면 또 다시 위로하시고, 모든 것을 책임 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또 한 가지, 언젠가 우리의 인생이 다하는 그 날 우리는 영원한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먼 것 같지만, 한 시 앞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 예수님 손을 잡고 우리는 영원한 고향에 갈 겁니다. 하늘 나라! 그곳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것입니다.
추석 명절! 육신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찾아보는 계절입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에게 영혼의 고향에 관한 깊은 묵상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함께 모인 가족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 가족들이 영혼의 고향 하나님의 품 안에 안겨 참 기쁨과 소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고행을 등진 나오미가 아니라 고행을 찾아 귀향한 나오미의 복된 모습으로 내내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인터넷로고스선교회
글쓴이 : lemalogo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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