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찬양강해

202장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 찬양강해 597번째 입니다. -

늘찬양 2014. 3. 10. 22:54

202장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241)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천진스럽고 쾌활한 동심(童心)의 세계로 젖어드는 느낌을 받는 성경 주제 찬양으로 말씀을 통해 누리는 기쁨(1), 돌이킴(2), 찬양(3), 사랑(4), 헌신(5)을 노래하고 있으며 특별히 귀하고 반가운 말씀 중에 날 사랑한다는 말과 후렴의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를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작사작곡은 불우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음악교사가 되어 루트, 캐디 등과 함께 곡을 출판하기도 하였으나 무디를 만난 후 노래하는 전도자가 되어 하나님께 헌신한 필립 폴 블리스(P.P.Blies;1838-1876)가 어린이들의 찬송소리에 감명을 받고 1874년 만들었다.

 

 

1절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귀하고 중하신 말씀 일세

기쁘고 반가운 말씀 중에 날 사랑한단 말 참 좋도다

주께서 나를 사랑하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께서 나를 사랑하니 나는 참 기쁘다

 

1, 귀하고 중하신 말씀, 기쁘고 반가운 말씀 중에 최고는 날 사랑한단 말

 

요한복음 1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하였으며, 베드로전서 1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또한 베드로후서 1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의 말씀을 통해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찬송가 1절 가사에 있듯이 귀하고 중하신 말씀으로 알고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문자로 기록된 말씀이긴 하지만 하나의 문자의 나열이나 문장의 미려함이나 그 내용이 갖는 스토리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자체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며 승리하게 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412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십여 년 전에 영국 런던의 한 편집기자가 국회의원, 대학교수, 사업가, 작가 등등 사회 각계의 주요 인물 100여 명을 대상으로 만일 당신이 3년간 밀폐된 생활을 한다면 꼭 지니고 갈 세 권의 책은 어떤 것이며, 또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들 중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소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거나 아예 불신자였습니다. 그러나 98%의 사람들이 첫 번째 책으로 성경을 꼽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우리가 고난을 당하거나 소외되었을 때에, 성경이야말로 위로와 용기를 주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단순한 교훈집이나 어떤 종교의 경전과 같은 책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어렸을 때 처녀의 몸으로 등극하여 64년간 재임하면서, 영국 역사상 최고의 황금시대를 이뤘습니다. 한번은 아프리카 우간다 왕의 방문을 받고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폐하! 어떻게 하여 이처럼 아름다운 문화를 이루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습니까?” 그의 물음에 빅토리아 여왕은 대답 대신 곁에 있는 낡은 성경을 하나 들고서 우리나라는 이 책에 기초를 삼고 그 위에 나라를 세웠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계신 말씀입니다. 능력의 말씀입니다. 모든 분들에게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영양과 에너지, 영양분, 비타민 A, B, C, D를 비롯한 종합비타민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가득합니다. 이 말씀 안에서는 연약한 사람이 없고, 잘못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취제를 발견한 심프슨경은 29살에 에딘버러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수술할 때 마다 사람들이 몸부림치고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매우 괴로웠습니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팔다리를 끊을 때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모두 소리 소리를 며칠째 지르니까 이분이 고민합니다. “이것을 안 아프게 수술한 길이 없을까?”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열심히 읽었는데 창세기 21절에서 답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갈비뼈를 취하신 다음에 살로 이식해서 채우고, 그 다음에 여자를 만들었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잠들게 하면 수술이 되겠구나. 안 아프겠구나.’ ‘사람을 잠들게 하는 길이 없을까? 잠들게 하면 갈비뼈를 빼내어 가도 모르는 구나.’ 여러분, 그렇죠? 마취한 후 있어 보세요, 뭘 빼가도 몰라요. 그렇게 이분이 마취제를 발견합니다. 클로로포름을 발견해서 빅토리아 여왕이 왕자를 분만할 때 사용합니다. 조금도 못 견디는 난산이었는데 이분이 마취 치료를 하고 수술을 잘 해서, 이분이 그 후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고 성경을 보면 온갖 지혜가 다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살려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가까이하면 믿음이 살아납니다. 말씀을 믿으면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하게 얻습니다.

 

 

2절 구속의 은혜를 저버리고 어긋난 딴 길로 가다가도

예수의 사랑만 생각하면 곧 다시 예수께 돌아오리

 

2, 딴 길로 가다가도 예수의 구속의 은혜만 생각하면 곧 다시 돌아오리

 

누가복음 1513절입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먼 나라에 가라는 말씀의 의미는 이제까지의 모든 끈을 끊어버리고 할 수만 있으면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멀리 떠나 버렸습니다. 어긋난 딴 길로 갔습니다.”(찬송가 2) 갈 때는 잘 살아보겠다고 다짐도 했을 것입니다. 보란 듯이 성공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겠다고 생각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면 삶이 내 각오와는 다르게 전개됩니다. 그래서 이 탕자가 멀리 가서 방탕하고 놀고 즐기고 재산을 탕진하고 흥청망청 다 탕진하여 버렸습니다.

 

돈이 다 떨어지니까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친구들도 다 떠나가고 있을 곳도 마땅치 않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흉년까지 닥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비로소 궁핍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집에 얹혀살게 되었는데, 주인이 저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습니다. 그는 춥고 배고팠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그것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배가 고프고 힘이 들었습니다. 너무나도 비참한 생활이었고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비참한 궁핍은 영혼의 궁핍입니다. 둘째 아들에게 있어서 정신과 영혼의 궁핍은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나 어그러진 길로 간 사람들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아도취에 빠져, 물질의 풍요로움에 빠져 세상쾌락을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집나간 탕자의 모습처럼 영혼이 궁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하게 되고, 방탕하게 되고, 타락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 반면 영적 하나님의 자녀들은 전심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살아갑니다. 물질의 풍요로움보다 세상명예와 쾌락보다 말씀, 설교, 예배, 묵상, 간절한 기도 등을 은혜의 도구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이런 귀한 은혜의 수단을 잃어버리고 영적타락의 길로 들어섰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아주 혹독한 궁핍세계로 이끌어 가십니다. 마치 둘째 아들이 친구들의 버림과 배고픔과 외로움의 고통 속에서 아버지를 기억하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갖가지 시련과 환난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찾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회복입니다.

 

고생이 극에 달했을 때 둘째 아들은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신을 바로 차리게 된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정신이 차리면서 한 첫 번째 말이 본문 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본문의 핵심은 잃어버렸던 아버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겪고 있는 죽음과 같은 궁핍의 궁극적인 원인이 단지 물질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였습니다. 전에는 아버지의 집에서 아들로 살아가는 것이 속박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것이 행복이요, 기쁨이요, 자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마음에 작정한 것을 즉시 행동으로 옮깁니다. 본문 20절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 가니라 ... ” 아버지의 돈을 다 날려버린 실패자의 모습으로 초췌한 얼굴에 다 찢어진 옷을 입고 거지와 같은 복장으로 아버지 집을 찾아간다는 것은 죽기보다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수치심과 두려움 속에 축 늘어진 어깨를 한 채 힘없이 아버지 집으로 향하고 있는 둘째 아들의 모습...하지만 우리는 아버지 집에 생명이 있음을 알고 부족한 모습 그대로 실패자의 모습 그대로 어그러진 길에서 돌이켜 주님 품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인자하심과 베푸심을 맛보면서 은혜 안에, 믿음의 축복과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회복의 은혜 속에 살아가는 복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절 구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예수의 이름을 찬양하리

영원히 찬양할 나의 노래 예수의 이름이 귀하도다

 

3, 영원히 찬양할 나의 노래는 예수의 이름이 귀하도다.

 

누가복음 1520절 하반 절입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둘째 아들이 실패자의 모습으로 낙심가운데 힘없이 집으로 향하고 있을 때 집과는 아직 멀리 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한눈에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얼마나 학수고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는 식사를 하면서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항상 집을 떠난 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던 것입니다. 지금도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동일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 들어설 때까지 하나님을 잊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여러분들은 잊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오래 참으시며, 여러분들을 기다리십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귀향을 결단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용서와 사랑을 베푸십니다.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이렇게 말합니다.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22) 이 말은 그를 품꾼이 아닌 둘째 아들로 다시 받아 주는 행위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존귀를 상징하는 금가락지를 끼우고, 새사람을 상징하는 새신을 신겨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합니다(24).

 

얼마나 감격적인 장면입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아들의 권세가 다시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의 아들로 회복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품꾼의 하나로만 봐 주어도 감지덕지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를 아들로 취급해 준 것이었습니다. 아들의 권세를 회복시켜 준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죄인들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친절과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두 개의 갈림길을 만납니다. 한 길은 그렇게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이고, 또 한 길은 하나님께로 돌이켜 다시 사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집에 돌아온 후 둘째 아들의 은 어떠했겠습니까? 아버지와의 만남은 늘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그 입에서 불평과 원망은 사라졌고 오로지 감사 찬송만 넘쳐났을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면서 매일 매일을 감격으로 지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회복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는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때는 감사하고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루 빨리 내 입에서 구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예수의 이름을 찬양하며 예수의 이름을 높이며(찬송가 3) 살아가는 기쁨의 감격이 되살아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절 주 예수 날 사랑하시오니 나 또한 예수를 사랑하네

날 구원하시려 내려오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네

 

4, 날 사랑하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네 나 또한 주를 위해 헌신하리

 

수제자 베드로는 주님의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주님을 다 버리고 달아날 지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나이다."(26:33)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고백을 하는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否認)하리라(34)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베드로는 마태복음 2669-75절에 나오는 대로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합니다. 한번은 성전 바깥뜰에 앉았다가 한 비자(婢子)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하는 말에 당황해 하면서 그것도 여러 사람들 앞에서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했습니다. 조금 후에 다른 비자가 "이 사람은 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71) 할 때에 이번에는 더 강도 높게 맹세하면서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72)고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곁에 둘러섰던 사람들이 당신의 어투(갈릴리지역 사투리)를 보니 너도 진실로 나사렛 예수 당이다(73)고 할 때에, 더 다급해진 베드로는 이번에는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74) 저주하면서 까지 부인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까지 하면서 떠났던 수제자 베드로를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 바다에서 다시 만나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21:15)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16절과 17절에 연속적으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왜 주님께서는 이렇게 똑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하고 계신 것일까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15.16,17)고 대답하는 베드로의 대답이 미덥지 못했던 탓일까요?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의 나약함을 아셨고 또 그렇게 고기를 잡으러 나갈 수밖에 없었던 제자들의 형편도 다 이해하시고 꾸중이 아닌 이미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친히 생선과 떡을 준비해 오신 주님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왜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렇게 힘든 대답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하여 베드로에게 물어보고 계신 것일까요?

 

제 느낌으로는 아직까지 베드로 속에 남아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을 수 있는 미안한 마음, 죄 성, 부끄러움과 죄책감 등을 치유하시고자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세 번씩이나 질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떠났던 죄스러운 마음, 열등감, 죄책감에서 벗어나서 담대하게 주님 앞에서 자신의 진실한 사랑의 고백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 줌으로서 베드로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를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엄마한테 큰 잘못을 저질러 놓고 나서는 미안한 마음에 금방 말을 꺼내지 못하고 이리궁실 저리궁실 하면서 엄마! 엄마!”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예수님은 이러한 베드로의 마음과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한 발 앞서 용서와 회복의 영을 주시고자 세 번씩이나 되풀이하며 질문하신 것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한심한 자신의 허물을 속죄할 수 있도록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기회를 베풀어주실 때 베드로의 감격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주님께서 이날 아침! 그 귀한 기회를 베드로에게 허락지 않으셨던 들 베드로의 심령에 새겨졌던 상처는 치유되지 못했을 것이고,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영적 억압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이후 베드로가 위대한 사도로서 그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날 아침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도록 자신의 마음과 결단을 표시할 수 있도록 기회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였습니다. 이렇게 귀한 주님의 사랑을 필립 폴 블리스(P.P.Blies)는 찬송가 4절에 주 예수 날 사랑하시오니 나 또한 예수를 사랑하네...”라는

가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안목으로 바라볼 때 우리에게 있는 모든 실수와 허물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나를 구원하실 기회요, 나를 다시금 큰 일꾼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회요, 겸손해질 수 있는 기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신 것이 구원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또 한 번의 기회를 간구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용서가 무엇입니까? 또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다시 기회를 허락받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까? 왜 주님께서 죽음을 깨트리시고 영원히 부활하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의 기쁨과 평화를 가지고 참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15-17)며 구체적으로 회복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배신자였던 내게 새 삶의 기회를 주시고 사명을 주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베드로는 이후에 오순절 성령 충만함을 받고 성전 미문에 앉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걸으라.”(3:6)며 잡아 일으키며 저가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으며, 부활의 복음을 전하매 하루에 삼천 명씩 오천 명씩 회개하고 예수께로 돌아오는 부흥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우리 모두 날 구원하시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죄를 십자가에 대속하시고(찬송가 4) 약속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사 부활의 산 소망을 주신 주님을 구세주로 믿고 주의 자녀가 되어 회복과 용서와 자유함의 축복을 누리며 전하는 믿음의 백성들로 거듭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절 주 예수 날 사랑하시오니 마귀가 놀라서 물러가네

주 나를 이렇게 사랑하니 그 사랑 어떻게 보답할까

 

5, 예수 날 사랑하시니 마귀가 놀라서 물러가네 그 사랑 어떻게 보답할까

 

겉모습과는 달리 행동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의 이중성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피상적인 외모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면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믿음생활 하는 사람들이 예수와 마귀를 제대로 잘 모르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잃게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을 제대로 살려면 예수를 알고 또한 마귀를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마귀의 본질을 바로 알아서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매사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21:15,16,17)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때 주님은 베드로의 이중성과 나약함을 잘 아시면서도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15-17)며 구체적으로 회복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귀한 사명과 부르심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의 본질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떠났던 죄스러운 마음, 열등감, 죄책감에서 벗어나서 담대하게 주님 앞에서 자신의 진실한 사랑의 고백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 주신 주님의 사랑을 통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10:10) 그 사랑 앞에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구원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함을 얻는다.”는 것을 깨닫고 담대하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마귀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놈이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예수님을 전하느냐? 누가 네 말을 믿겠느냐? 너는 거짓말쟁이다.”며 그 마음에 항소

하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5:32)는 주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깨닫고 더 나아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와 사랑의 은혜를 덧입고 또 오순절 성령 충만함의 능력을 통하여 마음속에 갈등과 분쟁이 생길 때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리가 아니고 마귀의 소리라는 것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담대하게 피 묻은 예수 십자가의 복음과 주님의 말씀을 증언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루에 삼천 명씩 오천 명씩 회개하고 예수께로 돌아오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사도 베드로의 복음 전도는 안디옥 교회에도 나타났고 고린도 교회에도 나타났고 로마교회에도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는 그가 돌이켜 로마로 들어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순교자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베드로가 경험했던 회복의 은혜와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마귀가 나를 억누르며 유혹할 때 어떤 경우에도 주 예수는 날 사랑한다. 나를 낙심과 절망으로 빠뜨리는 마귀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찬송가 5)며 명령할 때 우리의 믿음의 발걸음은 항상 활기차고 은혜 넘치며 감사 찬양하는 승리의 삶이 될 것입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진정으로 거듭난 영적 체험과 주님의 참 사랑을 가지고 끝까지 싫어버린바 되지 아니하시고 붙들어 날마다 새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주님의 사랑을 전합시다. 내 영혼에 부활의 영으로 다시 오셔서 나를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회복의 영을 전합시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회복하셨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회복하십니다. 우리 모두 이 귀한 회복의 영에 참여하며 주님의 영광을 찬양합시다. 주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4:7).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