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장 할렐루야 할렐루야 (160장)
마 28:7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마태복음 28장 1~7절을 배경으로 부활절 아침에 여인들이 예수의 무덤에 갔다가 천사로부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특별히 처음과 끝에 할렐루야가 각각 수미쌍관식(질문과 대답형식) 구성을 보여주며, '찬송 부르세'는 본시 전체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고 있다.
작사자는 15세기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이며, 찬송작가, 또 뛰어난 문장가로서 프란체스코회 수도회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념하는 여러 권의 저서와 많은 라틴어 시와 수필을 남긴 장 티스랑(J.Tisserand;?~1494)에 의하여 1490년 작사되었으며 찬송 곡은 1851년 니일(Neill)에 의하여 영어로 번역하여 찬송가의 곡으로 사용되었다.
1절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다 함께 찬송 부르자 큰 영광의 왕 우리 주
이 날에 다시 사셨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1절, 큰 영광의 왕 이날 다시 사셨으니 다함께 할렐루야 찬송 부르세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셨다’함은 성경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다 사하여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말씀대로 사흘 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서, 우리 모두에 부활할 수 있는 이김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부활절의 기쁨은 죄로 인하여 사망과, 저주와 형벌에서 우리가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몸 된 교회에 주일마다 모여 예배드리는 것도 이 부활의 사실을 근거로 하고, 이 내용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물론이지만, 예수님 당시에도 "죽은 자에 어찌 부활이 있다고 하느냐?" (고전 15:12)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나오느냐?" (35절)며 믿지를 못합니다. 그런 사실을 보지 못했고 그런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부활이 사실이며, 많은 증인이 지금도 태반이나 살아있다고 답변하면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너희 믿음도 헛되어,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전 15:13-14,17-19)고 강조하였습니다.
이렇듯 부활은 믿음의 핵심이요, 기독교의 중심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왜 부활이 필요하며 강조되어야 하며 사실인가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기독교로서의 존재가치가 상실되어, 더 이상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5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으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들에게와 맨 나중에 바울 자신에게도 보이셨다고 증거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달려 돌아가신 하나님 사랑의 극치요, 확증이심과 동시에 세상 사망권세를 깨뜨려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부활의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우리들입니다. 부활의 전제는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죄라고는 하나도 알지 못하시는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온 인류의 죄를 예수님에게 몽땅 담당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죽으셨다함은 인간은 죄인임은 물론 죄 아래 태어나서 형벌로 죽을 심판을 기다리는 자라는 것을 전제합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바늘귀만 한 가능성도 없습니다. 도무지 방법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신자요, 이 사실을 모를 뿐 아니라 가르쳐주어도 부인하는 자가 불신자입니다. 이렇게 방법이 없고, 소망이 없고, 어떤 가능성조차 없는 우리를 하나님은 사랑하시어 구원의 방법으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죽으십니다. 십자가위에서 피 흘려 죽으십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고통 받으시고, 찢겨 죽으십니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사 53:5-6).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십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십니다(요 19:30). 진 빛을 다 결제했다. 다 갚았다 하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죽으신 예수님은 반드시 살아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부활도 없고, 잠자는 자들의 부활도 없으며 모든 복음도 다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이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된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실입니다(고전 15:4). 더불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 이것이 예수님께서 그리고 바울이 전한 복음의 기초이며, 핵심이요, 근거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함은 우리의 부활을 보증합니다. 첫 열매인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어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 속한 우리 모두의 부활입니다.
“다 함께 찬송 부르자 큰 영광의 왕 우리 주 이 날에 다시 사셨네 할렐루야! 할렐루야!”(찬송가 1절)
2절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 부활하신 새벽에 그 충성스런 여인들
무덤을 찾아 나섰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2절, 부활하신 새벽 아침에 충성스런 여인들 무덤 찾아 나섰네 할렐루야
찬송가 2절은 “주 부활하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나섰던 세 명의 충성스런 여인”
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전날, 금요일 오후 3시에 주님께서?다 이루었다?(요 19:30)라는 말씀을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백부장으로부터 예수님이 죽은 것을 확인한 후, 아리마대 요셉의 요청에 따라 그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넘겨주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잘 싸서 자신이 죽으면 사용하려고 했던 무덤에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바위로 만든 무덤에 안치시키고 돌을 굴려 무덤 문을 막아 놓았습니다(42절). 그런데 마가복음 15장 47절을 보면, 그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놓아 둔 곳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인들은 그저 바라만 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슬피 울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주일 새벽 이른 아침에 충성스런 세 여인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예수님께서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고, 손과 발은 못 박혀 찢어졌고, 옆구리는 창에 찔렸고, 수많은 매를 맞음으로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가셨기 때문에, 피투성이인 예수님의 시신을 닦아내어 빠른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사다 두었던 향품을 들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막 16:1). 주님께서 금요일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다음 날 무덤을 찾아가야 되지만, 유대인들은 토요일인 안식일에는 많이 걸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유대법에 따르면 특별한 경우, 성전이나 회당에 가기 위해서 2,000 규빗, 약 900미터 정도까지 걷는 것은 허용했지만, 그 이상은 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 여인은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셋째 날 새벽미명에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
충성스런 세 여인은 무덤으로 가면서도 “누가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무덤을 막아놓은 돌문을 굴려줄까?”(3절)하고 걱정했습니다. 4절을 보면 이 돌은 “심히 큰 돌이라”고 했습니다. 심히 큰 돌은 무엇을 말합니까? 철학자 사르트르에 의하면 이 돌은 '벽'이요, 하이데거는 '절망'이라고 했고, 키에르케고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인생은 저마다 우리 앞에 가로막혀 있는 돌무덤으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이 돌을 굴려 주리요!” 그러면서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충성스런 여인들은 탄식으로만 끝나지 않고 슬픔과 염려와 두려움을 않은 채 무덤까지 찾아왔습니다. 문제 속에 빠져 좌절하고 있기 보다는 문제를 안고 주님을 찾아갔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런 돌무덤을 수없이 만나게 됩니다. 엄청난 무게의 장애물로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을 짓누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이런 장애물로 인하여 주님의 깊으신 사랑과 뜻을 깨닫고 감사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욥은 욥기서 42장 5절에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고백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신앙이 더 성숙하게 하시려고...주님을 더 신뢰하고 더 의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시는 은혜의 고난도 있습니다. 고난이 없을 때에는 잘 몰랐었는데 고난이라는 터널을 통과하고 난 이후에 주님의 뜻을 깨닫고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사야 53장 5-6절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셨고 우리의 죄악과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더불어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모든 죄를 멀리 옮기셨습니다(시 103:12). 예수님은 골고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와 무거운 짐을 다 담당하시고 평강의 길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런 귀한 은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힘으로는 돌을 옮겨놓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나섰던 충성스런 세 여인들처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는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주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뵙고 부활의 영광과 기쁨에 참여하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절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흰 옷을 입은 천사가세 여인에게 하는 말
주 이미 살아나셨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3절, 천사가 여인에게 하는 말 주 이미 살아나셨도다 할렐루야
무덤에 도착한 세 여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절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 간 것을 보고?놀랍게도 그 육중한 돌문이 옆으로 옮겨져 굴 안이 열려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시신을 누군가가 훔쳐간 것으로 알고 즉시 제자들에게 찾아가 알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함께 한숨에 달려서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들어갔습니다.
6절과 7절을 보겠습니다.?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무덤 안에는 주님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와 수건만 놓여 있을 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말씀하신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빈 무덤을 남긴 것입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이것이 우리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기독교의 최대의 자랑은 빈 무덤입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의 창시자는 죽은 후, 그들의 무덤이 남아 있지만 예수님의 무덤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이 무덤 안을 들여다 본 후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요 20:15)고 물으셨습니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15절)고 물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뒤에 서 계시면서 이름까지 부를 정도로 찾아오셨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여전히 빈 무덤만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방향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을 가지고 산다 하면서 때때로 좌절과 실패를 이유로 무덤만을 쳐다보는 삶을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어찌하여 우느냐?의 질문은 너의 방향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의 자세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등지고 서 있는 상태는 아닙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마주 대하였는데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심한 슬픔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깨닫지 못하고 그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옳습니다. 세상을 향하여 세상만 바라보게 되면 절망과 눈물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돌아서서 부활하신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완전히 돌아서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 해결이 있습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향할 때 마리아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무덤을 찾던 신앙이 이제 무덤을 내려가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염려하며, 슬퍼하며 올라가던 모습이 변하여 찬송하며 기쁨으로 제자들을 향해 달려갑니다.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야 마리아는 비로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힘들고 지쳐서 울고 싶을 때, 여러분 앞에 찾아오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눈물을 흘리며 서 있는 내 앞에 찾아오신 부활하신 주님을 향할 때 모든 슬픔과 고통이 끝이 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눈물의 근원이 없어집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인생의 비극이 끝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는 데 왜 울고 있느냐고...” 이제 부활신앙을 가지고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부활의 소식을 담대하게 전하는 부활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절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 뵙지 않고 믿는 자 그 믿음 아름다워라
영원한 생명 얻으리 할렐루야 할렐루야
4절, 주 뵙지 않고 부활 신앙 갖는 자 그 믿음 아름답도다 할렐루야
요한복음 20장 24절 이하에 보면 도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에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 뒤에 도마가 제자들이 모인 곳을 왔을 때, 제자들은 도마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25절) 그러자 도마는 그들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절)
아마도 도마는 예수님이 자기가 없는 사이에 제자들을 찾아오셨다는 사실에 기분이 좀 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심하는 도마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도마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절)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기의 두 눈으로 분명하게 목격한 도마는 그 즉시 예수님께 자기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 더 이상 도마는 의심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수십 년 후에는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에서 순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오셔서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절) 도마처럼 우리도 그 모든 의심을 버리고 확고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삶의 현장으로 우리를 찾아와 주십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서, 찬양 속에서, 말씀 속에서 날마다 매 순간마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에도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마리아야." 우리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슬픔을 씻어주시고 기쁨을 심어 주실 것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6절)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의 평강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라."(행 1:5)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영적으로 재무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세상의 모든 환란을 담대하게 이겨내고 승리의 복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5절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 부활하신 기쁜 날 우리들 마음 다하여
즐거운 찬송 부르세 할렐루야 할렐루야
5절, 주 부활하신 기쁜 날 마음 다하여 할렐루야 찬송 부르세
예수의 부활은 인류에게 큰 기쁨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이 기쁜 날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할렐루야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 왜 그렇게 기쁜날 입니까?
첫째,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 기쁜 것은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바로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죄 값은 사망”(롬 6:23)이라는 말씀대로입니다. 누구도 이 죄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선하게 살아라. 도덕과 윤리를 지키라”고 말은 할 수 있으나 “내가 너의 죄를 사하였느니라.”(마 9:5) 이 말은 아무도 못합니다. 할 수도 없습니다. 죄는 벌이 따릅니다. 이것을 누가 피할 수 있습니까? 죄는 불행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죄를 친히 담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사 54:5-6). 더욱이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완전한 속죄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이 되는 날입니다.
둘째, 승리를 보장받았기 때문에 기쁨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승리를 선언하신 날입니다. “다 이루었다.”(요 19:30)는 말씀을 성취하신 날입니다. 이긴다는 것처럼 좋은 게 없습니다. 이겨야 합니다. 운동선수가 시합에 나가서 매 게임마다 집니다. 지는 선수는 선수대접을 못 받습니다. 군대가 전투를 합니다. 졌습니다. 이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겨야 삽니다. 이겨야 환영받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이깁시다. 영적인 전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부활신앙으로 승리합시다. 승리는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영광입니다. 왜 낙심하십니까? 예수께서는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것같이 우리도 예수의 부활신앙을 가지고 날마다 승리의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부활은 소망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주셨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좇아 영원한 생명의 부활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언제 부활하느냐? 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가 죽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죽었다면 주님이 공중에 강림하실 때 무덤이 열리고 부활하게 됩니다. 우리 살아남은 자들은 공중에 휴거됩니다. 이때 부활은 1차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계속 무덤 속에 있다가 예수께서 공중 혼연 잔치와 천년왕국이후에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받기 위하여 사망의 부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20:6)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왜 자살합니까?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살은 지옥행이기 때문에 더욱 비극입니다. 자살하는 이유는 힘들다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괴롭다고 호소합니다. 하기야 자살하는 이의 심정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게 예수의 부활입니다. 예수의 부활신앙으로 희망을 가지세요. 믿는 자는 죽어도 삽니다.
이 귀한 부활의 기쁨을 우리 맘을 다하여 “할렐루야! 할렐루야!”(찬송가 5절) 즐거운 찬송 부르며 부활의 주님께 영광 돌리는 귀한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 > 찬양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157장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기도- 찬양강해 602번째 곡 (0) | 2014.03.31 |
---|---|
155장 - 십자가를 지고 -찬양강해 601번째 곡 (0) | 2014.03.28 |
187장 비둘기 같이 온유한 (찬양강해 598번째) (0) | 2014.03.17 |
202장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 찬양강해 597번째 입니다. - (0) | 2014.03.10 |
238장 해 지는 저편 (0) | 2014.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