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찬양강해

157장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기도- 찬양강해 602번째 곡

늘찬양 2014. 3. 31. 22:43

157장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기도

27:46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겟세마네 동산에서 엘리 엘리 부르시며 최후기도를 하시고 우리 위해 고난의 길 가신 주님 뒤를 좇아 나도 걷게 하소서의 내용을 담고 있는 고난 찬송으로. 월간 크리스천 창조문예를 통해 수필가로 등단한 김광영(1944~ )장로가 1989년 지병의 재발로 걷지도 못하는 고통중 주님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며 위로를 받고 작사하였다. 숭실대 출판부장, 광운대, 상지대, 숭의여대 외래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곡은 한국가곡창작학회회장, 총회신학교 종교음악과 교수, 인천임마누엘교회 지휘자를 역임한 김정양(1941~2002)교수가 1999년 작곡하였다.

 

 

1절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기도 하시고

갈보리 산 십자가를 죄인 대신 지셨네

엘리 엘리 부르시며 고통당한 예수여

우리 위해 괴로운 짐 주님 홀로 지셨네

 

1,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 기도하신 예수님 갈보리 십자가 지셨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잡히시기 전 날 밤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고 제자들에게 이제 예수님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 중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듣고서는 당장에 나서서 말하기를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26:33) 그렇게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베드로의 다짐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나 제자들이 지금은 그렇게 다짐을 하지만 결국은 주님을 부인하고 모두 다 도망가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 동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겟세마네'란 아람어로 '기름 짜는 기계' 라는 뜻으로서 아마도 예수님께서 몸에서 기름을 짜내듯, 땀방울이 피 방울처럼 떨어지도록 기도하셨다는 것에서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 밤이 지나고 나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 일은 어쩔 수 없이 당하게 된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선택하신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주님의 마음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습니다.

 

당시에 로마 제국은 그렇게 잔인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에 중대한 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시국사범들에 대해서만은 아주 끔찍한 형벌로 다스렸는데 그 끔찍한 형벌들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형벌이 바로 십자가 형벌이었습니다. 이 형벌은 죄수의 손과 발목에 못을 쳐서 나무 십자가에 매달아 놓는 간단한 형벌인데 실제로 죄수가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게 되면 그 달린 사람의 몸무게 때문에 뼈마디가 끊어져 나가는 그런 고통을 느끼게 되고 심장은 점 점 압박을 받으면서 호흡이 힘들어 지고, 계속해서 피를 흘리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아주 끔찍한 형벌입니다. 대체로 이렇게 사람들이 십자가 달려서 죽을 때 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시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그 고통이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주님께서도 이런 십자가의 형벌과 고통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아프고 힘든 것은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시는 순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는 아픔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가 단절되었듯이 주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그 몸에 입는 순간 주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입니다. 그런 슬픔과 어두움의 고통을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더니.”(27:45)의 말씀이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역시도 그 침묵의 정적을 깨뜨리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46)고 외치셨습니다. 히브리서 57절을 보면 이 사건을 두고 말씀하시기를 주님은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귓가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 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며 부르짖는 주님의 기도의 음성과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외치며 고통당하신 예수님(찬송가 1)의 부르짖음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이 순간 바로 이 부르짖음은, 그에게 있어서는 어떤 인내심도 어떤 자제력도 막을 수가 없는 최고의 슬픔이었으며, 또한 최고의 고통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버림받는 고통! 그것이 바로 최고의 슬픔이요 고통이었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아파하며 고민하며 고통스러워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위해 괴로운 짐 홀로 지셨습니다.”(찬송가 1) 주님이 우리를 생각하지 않으셨다면 그렇게 고통하며 기도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생각하지 않으셨다면 당장에라도 주님의 천사들을 불러서 이 땅을 심판하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자신이 만드신 사람들에게 자신이 잡혀 죽으실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대신 죽지 않으면 우리가 멸망해야 되니까 주님은 이 길을 중단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강권하시는 그 사랑이 기쁨으로 그 길을 걸어가도록 힘주셨습니다.

 

 

2절 무슨 죄로 우리 주님 십자가를 지셨나

하나님 뜻 이루려고 고난의 길 가셨네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우리 주님 예수여

환난 날이 닥쳐와도 주를 보게 하소서

 

2,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 하나님 뜻 이루려고 고난의 길 가셨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역사에 대해서 책도 많이 나왔고 영화도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1988년 미국 마틴 스콜세지 감독, 윌리엄 데포우, 하비 케이틀 주연의 예수의 마지막 유혹’(Last Temptation of Christ)이란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상영이 금지되었죠. 그러다가 스카라 극장에서 잠깐 상영되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의 반대로 곧 막을 내렸습니다. 이 영화는 '예수'라는 인간의 관점에서 육신의 고통과 유혹을 이겨내는 '강한 인간예수'의 모습을 잘 다루고 있습니다. 한번 그 내용을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사역 초기부터 유혹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4:3),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6),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9)며 사탄이 유혹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 모든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10). 그런데 이런 유혹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시는 그 마지막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상상 속에서 작가가 영화한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작가의 상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온갖 멸시와 조롱과 아픔을 당하고 계십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을 비롯하여 지나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향하여 조롱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지금 십자가 위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27:42) 할 때에 예수님이 생각합니다. “그래, 내가 십자가를 지지 않고 포기하고 보통 인간으로 내려가 버린다면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예수님은 우리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대신 지셔야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뜻을 버리고 십자가 위에서 이 고통을 다 버리고 편안하게 내려가서 저들과 같이 내가 세상에서 보통 사람으로 살아간다면!.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 땀 흘리며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다가오는 십자가의 고통과 부담이 너무 커서 하나님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그냥 지나갈 수만 있다면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고 인간 구원의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26:39) 그렇게 예수님이 기도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생각한 것과 똑같이 말할 수 없는 모멸감과 말할 수 없는 아픔을 지금 예수님이 참고 있습니다. ‘그래! 여기서 내려가자! 십자가를 지지 말자....’ 그런데 십자가에서 내려간다면 그의 사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역을 포기했기 때문에... 보통 인간으로 살아간다면... 아마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 가운데 가장 가깝게 따라왔던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을 것입니다. 아기를 낳게 되고 생활을 위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예수님도 생존 경쟁에 뛰어들어서 우리들과 똑같이 모든 노력을 경주하게 될 것이고, 또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 출세를 위해서 투쟁적 역사를 예수님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마 인간으로서는 더 좋을 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상을 하고 있는데...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계속해서 빨리 내려오라.” 소리치는 것을 듣고 예수가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은 심각한 고민을 합니다. 마지막 결정을 어떻게 해야 하나? 아니다. 나는 내려가면 절대 안 된다. 아버지가 인류 구원을 위해서 나에게 주신, 반드시 내가 져야할 십자가다. 이것을 내가 버리고 내려가면 안 된다. 나는 끝까지 이 십자가를 지고 죽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 마지막 자기의 머리를 스치는 유혹을 물리치고 내려오지 않고 끝까지 견디고 계셨습니다. 이때 막달라 마리아가 십자가 밑에 달려와서 말합니다. “예수여! 왜 이렇게 바보같이 고통을 참고 당신을 향해서 외치는 저 모멸감의 많은 소리를 들으면서 왜 이러고 계시나이까? 그러지 말고 저 사람들이 내려오라고 소리칠 때 빨리 내려갑시다. 그리고 평범하게 우리가 살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손에 박힌 못을 다 뽑아줍니다. 장면이 그렇게 나옵니다. “봐요! 아프지 않잖아요? 빨리 나를 따라와서 내려오세요.” 막달라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데리고 내려옵니다. “우리 평범하게 이렇게 살아요. 그러면 더 좋잖아요?” 그런데 마지막 스치는 마리아의 유혹까지 다 물리치고 아니다. 나는 절대로 안 내려간다.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죽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마지막 유혹을 물리치셨다는 그런 이야기가 영화의 스토리입니다.

 

여러분은 이 영화의 줄거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 다르게 결론이 날 것입니다. 어떻든 찬송가 2절의 가사에 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이루려고 고난의 길 가셨다.”는 내용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향판제도의 문제가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대주그룹 허재호(72) 전 회장에게 노역 일당 5억원의 '황제노역'을 하게 된 것이 향판 제도의 단점 때문에 생겨났다고...그런데 이것도 서울, 경기, 인천, 충청, 강원 지역을 주로 돌아다니는 경판이 있고, 전라도, 경상도 지역 내에서만 도는 향판이 있다고 합니다. 성적이 더 좋은 쪽이 경판이고, 본인의 희망에 따라 향판이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일종의 이런 향판 제도의 피해자가 되어서 바라바보다 더 악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내어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역의 군부책임자이었던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아무런 죄가 없음을 확인하고 지역 사람들의 원성과 탄원이 두려워서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27:24)며 예수를 군병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라틴말로 갈보리’, 히브리말로 골고다해골이라는 뜻의 사형장으로 십자가를 지고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갈보리 산 위에서 아무 죄도 없이 처절하게 누구의 도움도 얻지 못한 채 온 백성에게 조롱과 멸시를 당하면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뭘 잘못했다고 그렇게 되셨습니까?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이래야만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구원의 진리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러(19:17) 여기 분명하게 자기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재판 과정은 잘못 되었어도 이 십자가는 내 몫이라는 겁니다. 아버지가 내게 주신 사명이다. 그래서 내가져야 한다.” 누가복음 2222절에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너는 화가 있을 지로다.”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인류 구원의 방법이다. 그러나 너는 나한테 죄를 지어서 너는 화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8:34)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우리가 바울을 위대하다고 생각합니까? 사나 죽으나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나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십자가를 지겠노라.”(1:24)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의 십자가를 졌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고난의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소에 나는 주님을 위하여 뭐든지, 주님을 위해서는 내 생명까지라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약속해놓고 정말 십자가가 다가올 때는 베드로처럼 다 도망갑니다. 우리 신앙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서 나타납니다. 십자가가 싫은 겁니다. 바로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 여기입니다. ‘내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 것인가, 아니면 버릴 것인가?’ 그것입니다.

 

찬송가 2절에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우리 주님 예수여 환난 날이 닥쳐와도 주를 보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십자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오 나의 십자가여 내가 버렸던 나의 십자가여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다시 오기를 기다린 나의 십자가여 주님이 달려 돌아가신 그 십자가에 나 또한 죽게 되니 감격의 마음으로 그대를 맞이하노라. 나 얼마나 그대를 버리고 울었던가! 그대가 내게 다시 돌아오게 됨이 나에게 얼마나 큰 감사인가 그대는 오늘 나를 주님 곁으로 인도하니 나 이제 그때 품에 달리겠노라 주님은 똑바로 달리셨으므로 나는 거꾸로 달리겠노라.” 그래서 거꾸로 달려 순교하고 죽었습니다. 안드레는 옆으로 매달려 죽겠다고 해서 옆으로 매달려 순교 당했으며 도마는 동인도에 가서 죽창에 찔려 순교했고 야고보는 최초 순교의 피를 흘렸고 맛디아는 돌에 맞아 순교했고 마태는 에티오피아에 가서,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누가는 그리스에서, 바돌로메는 전신 껍질을 벗기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환난 날이 닥쳐와도 주님 바라보고 기쁨으로 십자가를 집시다. 주님은 오늘도 누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져 줄 것인가?” 끊임없이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 사순절, 고난주간 주님! 나를 써주세요.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렇게 결심하고 담대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절 다 이뤘다 하신 주님 내가 바라봅니다

내 가는 길 험하여도 주님의 길 비할까

주님 가신 골고다 길 나도 걷게 하시고

주의 뜻과 그의 나라 간구하게 하소서

 

3, 내 가는 길 험하여도 주님 가신 골고다 길 나도 걷게 하소서

 

갈라디아서 6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는 바울의 신앙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십자가만이 자신의 가장 큰 자랑거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당시 치욕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던 십자가를 자신의 자랑거리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첫째, 바울의 자랑거리인 십자가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자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물론, 십자가는 신비적인 것도 아니며 단순히 상징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술적인 묘사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의 십자가는 역사적이요,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생애를 되돌려 놓은 "대 분수령"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 자랑할 것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당대의 자랑거리 중 하나는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의 특수층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엘리트 유대인의 최고 영광스러움은 가말리엘 문하생 출신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국어인 히브리어는 물론이고 헬라어에도 능통했던 어학의 천재였습니다. 그런 바울이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3:8). 전적으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어떤 것에 대해서 "자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찬양하고 높이거나 혹은 경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십자가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높이지 않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둘째, 바울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십자가

바울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리셨던 그 십자가였습니다. 예수께서 그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았었더라면, 바울이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목숨을 십자가에 걸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일어난 역사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다 이루었다."(19:30) 곧 구속이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늘 고민하던 한 가지는 자신 속에 두 마음이 있어서 한 마음은 주님의 십자가를 좇아 믿음으로 살아갈려는 마음이요 또 다른 마음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좇아 나타나려는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7:23)이 있어서 늘 갈등하고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이 갈등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연약한 바울을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인 쳐주시고 날마다 주의 사랑 안에 살아갈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시고 인도하심을 경험한 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17)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유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5:1).

 

셋째, 예수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17절에서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주 예수의 흔적들"은 어떤 것들인가요?" 바울이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거듭난 이후 갖가지 시련과 고난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고후 11:26) 이 모든 위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겨냥되었던 사탄의 화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에 육체로 계시지 않자 사탄을 예수를 대신하여 바울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이었기에 그는 고난 받는 기쁨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겼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주님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13절에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가는 길 험하여도 주님의 길 비할까!”(찬송가 3) 생각하고 주의 뜻과 그의 나라의 의를 구하며(찬송가 3) 기쁨으로 주님 가신 골고다의 길을 걸어가시기를(찬송가 3)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