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향기
고후 2:14~17,2020.10.11.늘찬양교회
로마 시대에는 정복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장군이 로마로 개선해서 돌아올 때는 전 로마 시민들이 나와서 주피터 신전까지 개선 행진을 하는 장군들과 군인들을 환영하며 축하해주었습니다. 그 행렬은 이렇습니다. 먼저 원로원 의원들이 선도를 섰고, 그 다음에는 나팔수들이 나팔을 불고 지나갔고, 그 다음에는 점령지에서 가져온 전리품이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제물로 바쳐질 황소가 지나갔고, 그 뒤에는 곧 처형하게 될 포로들이 사슬에 매인 채 끌려갔습니다. 그 뒤에 병정들이 줄을 이었고, 그 뒤에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따랐으며, 그 다음은 향을 태우는 제사장들이 향기로운 향기를 뿜으며 따라갑니다. 마지막으로 짙은 연기와 향기 속에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혁혁한 공을 세운 그 날의 주인공인 개선장군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전쟁에 참여했던 여러 장수들과 용맹스럽게 전쟁터에 나가 싸웠던 전사들이 행렬을 이루어졌습니다.
이 행렬에서 짙은 향기가 행렬에 참여한 사람은 물론이고 연도에 늘어선 사람들의 코에 강열하게 퍼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그 향을 맡으면서 그 의식의 의미를 깊이 가슴에 새기게 되는데 특히 승리한 장군과 군사들은 그 향기가 자신의 영광과 수고로움을 더욱 빛내주기 때문에 영광의 향기, 달콤한 향기로 여기며 큰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앞에 끌려가는 포로들에게는 목적지에 도착하면 바로 죽거나 처참하게 노예로 살다가 죽을 죽음의 향기입니다. 같은 향기가 로마 시민들과 전쟁에서 이기고 오는 군인들에게는 승리의 향기, 생명의 향기이고, 끌려오는 포로들에게는 죽음의 향기, 비참한 향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6절에서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을 쓸 때는 포로 신세인 죽음의 행렬에서 나오는 향기가 아니라 승리의 개선 행렬 속에 퍼지는 생명의 향기를 강조하며 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충만케하라.”(창 1:28)는 창조의 원리를 따라 오늘도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며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드러내는 향기는 단순히 몸에 뿌리는 향수가 아니라, 단순히 주일날 성경 책 들고 교회 와서 예배를 드리고 봉사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끝나는 수준이 아니라 삶에서 천국과 지옥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승리의 향기, 예수 생명의 향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Ⅰ. 세 종류의 그리스도인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 예수 생명의 향기가 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 향기를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입니다.
방향제라고 걸어놓기는 했는데 오래 되다보니 냄새가 나지를 않습니다. 향기가 다 날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앙생활이나 교회생활을 살펴보면 누가 봐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혹시나 몇 명의 사람들은 그가 교회도 다니고 직분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무엇인가가 빠져있어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존경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느껴지는 향기가 전혀 없기에 아무도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생화보다도 더 예쁘고 화려한 조화가 많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생화인지 조화인지 구별이 가지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생화보다 더 화려하고 더 자연스러운 조화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타한 모습에서 조화가 생화를 능가한다고 해도 결코 넘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향기입니다. 조화는 향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향을 맡아보면 조화인지 생화인지 바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예배를 마치고 늘 지나던 식당을 지나가는데 주일인데 식당의 문을 열고 장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값싸고 맛도 좋아서 택시기사 분들이 즐겨 찾는 작은 식당입니다. 그런데 식당 문에는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습니다.’ 붙여놓고 매주일 교회를 다니던 분이었는데...교회예배가 비대면 예배로 바뀌고 나서 교회 차량도 안 오니까? 이 참에 식당 문을 열고 장사를 하는 것입니다. 주일 날 문을 열고 장사를 하는 것을 탓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습니다.’는 문구를 붙일 정도이면 그래도 신앙심이 조금은 있겠구나? 여겼는데 ‘코로나19’ 앞에 여지없이 무너진 모습을 보고 내 가슴이 아파서 넋두리를 하는 것입니다.
‘코로나19’의 비대면 예배 속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마음을 모아 집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될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향기를 찾으십니다. 아무리 꾸미고 그럴듯하게 위장을 해도 주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의 위선을 한 눈에 알아보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리새인은 조화처럼 향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악취가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방향제라고 걸어놓기는 했는데 너무 오래됐고 어떻게 물기가 스며들었는지 썩어 악취가 나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내세웁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지금 00교회의 집사로서 교회에서 이런 봉사를 하고 있다고 장황하게 자기 신앙의 경력을 늘어놓습니다. 그런데 하는 일마다 부정적이고 남을 원망하며 남을 탓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이번에 청소년 상대로 성범죄, 아동학대,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의 명단이 디지털 교도소에
공개됐습니다. 정부가 솜방망이 처벌을 하니까? 시민들이 뿔나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성범죄자 사진, 이름, 키, 몸무게, 신체적 특징, 위험도, 범죄 내용까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인권침해의 논란이 있어 이를 폐쇄하고 주범을 잡아드렸는데도 또다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속에 자칭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악취를 느낍니다. 우리가 시궁창을 지날 때, 오물통 옆을 지날 때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처럼 악취가 나는 그리스도인들로 인하여 생명의 복음이 가려지고 있습니다.
셋째, 향기가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번 장마가 길고 습해서 그런지 곰팡이 냄새도 나는 것 같아서 방향제를 여러 개를 구입했습니다. 화장실용 방향제 같은 것은 ‘다이소’에서 사는데 이번에 구입 한 것은 독서실 책상에 놓으려고 합니다. 새것이라서 그런지 그 냄새가 방안을 진동합니다. 방문을 열면 전에는 땀 냄새에 곰팡이 냄새까지 났는데 지금은 향기로운 향기로 인해 기분이 좋습니다. 머리도 맑아지는 것만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향기로 부르셨습니다. 조화가 아닌 생명이 있는 꽃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생명을 쫓아 나타나는 향기로 말미암아 저들이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 썩은 향기가 풍겨나지 않도록 우리자신을 잘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방향제를 교체하여 주듯이 우리는 매일 말씀훈련,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임재하심의 훈련. 감사 찬양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저는 ‘지저스 콜링’이란 찬송큐티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이 큐티는 영적 내면을 강조하는 훈련이기에 자기노력을 통해 자기 의를 이루려는 부끄러운 경향이 많은 저에게는 더없이 좋은 안내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리스도인입니까? 향기를 잃어버린 그리스도인 입니까? 아니면 오히려 악취를 풍기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니면 향기가 나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자신을 깊이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잃었던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되찾기를 소망합니다.
Ⅱ. 그리스도의 향기
그러나 이런 그리스도의 향기의 구실과 역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역은 인간적인 능력이나 지혜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인도하심으로만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를 우리 심령에 담아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흔들고 가던 향로에서 향기가 난 이유는 그 안에 향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그리스도로 채워있으면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옵니다.
한 선생님이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걷다가 길에 떨어져 있는 종이를 발견하였습니다.
“바람에 나부끼는 저 종이를 주워 보아라.” 제자들이 종이를 줍자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냄새를 맡아보아라. 어떤 냄새가 나느냐?”, “향기가 납니다.”
“그래, 향료를 싸놓았던 종이었나 보다.”
조금 더 가다 보니 새끼줄이 보였었습니다.
“저 새끼줄을 주워서 냄새를 맡아보아라.”, “생선 비린내가 납니다.”
“생선을 묶었던 새끼줄이었나 보다.”
똑같은 새끼줄이라도 생선을 묶어 놓으면 비린내가 나고 똑같은 종이라도 향료를 싸놓으면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또 다른 한 글을 소개합니다.
「한 나그네가 한 덩이의 진흙을 얻었습니다. 그 진흙에서는 아름다운 향기가 발산 되었습
니다. 나그네가 물었습니다. 너는 바그다드의 진주냐? 진흙이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그럼 너는 인도의 사향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너는 무엇이냐?
나는 한 덩이의 진흙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향기가 나오느냐?
그 비결을 말해 드릴까요? 나는 백합화와 함께 오래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향료를 쌓았던 종이와 생선을 묶었던 새끼줄과 한 덩이 진흙에서 각각의 향기가 다르게 나타난 것은 그 안에 무엇을 담았느냐? 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방법도 간단합니다. 내 안에 예수의 심정, 십자가의 은혜를 많이 담으면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한국교회가 성도들을 목사의 성도, 목사의 일꾼으로만 키웠지 주님의 성도로 키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성도로 키웠다면 ‘코로나19’로 인해 교회 밖에서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계속 퍼져 나가야 하는데 반대로 교회를 비판하는 소리만 커지고 있다는 것은 교회 밖의 일꾼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로 그리스도의 편지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개인의 영성이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혼자 십자가의 영성과 믿음을 유지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가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규칙적인 말씀훈련, 찬송훈련과 같은 ‘큐티 생활’이 필요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찬송큐티를 통해 주님을 늘 생각하고 묵상하며 임재를 구하는 훈련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가야 합니다. 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다보면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하면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둘째,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흔들고 가던 향로에서 향기가 난 이유는 그 안에 담겨있던 향이 자기를 태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는 제사 지낼 때 향을 피웠습니다. 향나무를 잘게 썰어서는 숯을 담은 향로 위에 뿌렸습니다. 그 향나무가 타면서 짙은 향을 피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수고하고, 희생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는 더욱 짙게 피어납니다. 남들을 위해 헌신하고, 주를 위해 충성할 때 그 향이 더욱 짙어집니다.
아가서의 저자 솔로몬은 사랑하는 여인 술람미를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라고 부릅니다.
드넓은 평원에 백합화들이 만발합니다. 그런데 그 백합화 사이사이에는 가시나무들이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연약한 줄기의 백합화들이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그러면 곁에 있는 가시나무의 가시에 연약한 백합화의 줄기가 찔리고, 꽃잎이 찢어집니다. 백합화는 가시에 찢기면서 그 안에 감추고 있던 아름다운 향기를 풍겨냅니다. 가시에 찔리면 찔릴수록 백합화는 더욱 진한 향기를 풍겨냅니다.
백합화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 모양보다는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향기 때문입니다. 그 향기는 가시에 찔리는 고난을 통해서 아름답게 풍겨납니다. 히말라야 높은 지대에서 가장 추운 날 가장 깊은 밤에 채취한 장미로 만든 향수가 가장 고가의 향수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평안한 삶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고난이나 시련과 같은 깊은 고통을 통해서 진정 아름다운 향기를 풍겨낼 수 있습니다.
폐결핵과 직장암 그리고 수많은 질병으로 몇 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었던 미우라 아야꼬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드리지 못할 기도가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는 기적이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말씀이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가까이 갈 수 없는 성소가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우러러 볼 수 없는 얼굴이 따로 있습니다.
병들지 않고서는 나는 인간이 될 수조차도 없었습니다. 」
그는 고난을 통해서 참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코로나19’의 위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향기를 발하는 축복의 기회로 승화 시키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널리 뿌려져야 가치가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향이 든 향로를 흔들면서 향을 흩날렸습니다. 향 가루를 손으로 뿌리면서 향기를 퍼뜨렸습니다. 제사장들은 할 수 있으면 널리 널리 많은 사람들이 이 향을 맡을 수 있도록 뿌렸던 것입니다.
꽃들이 향기를 날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벌과 나비를 부르기 위해서입니다. 그 향기로 벌과 나비를 불러들여 가루받이를 잘 하기 위해서입니다. 벌과 나비는 그 향을 맡아 꽃을 찾으면 그 안에서 달콤한 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인 이유는 뿌려지고 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향기는 숨어있거나 감춰져 있으면 안 됩니다. 널리 뿌려지고 퍼져야 향기 자체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내야 합니다. 말로, 행동으로, 삶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 향기를 맡는 사람들이 복음의 꿀을 먹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온 삶을 담은 냄새를 풍기며 살아갑니다. 그 냄새는 말로, 행동으로, 표정으로 삶으로 나오는 냄새입니다. 치열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치열한 냄새가 납니다. 말하지 않아도 얼굴이 표정이, 행동이 그 삶의 냄새를 말해줍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냄새는 실제로 방향제와 같은 냄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이 풍기는 분위기와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사도 바울은 분명한 신분 정의를 내려줍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나타내는 향기를 표현한 낱말입니다. 향기는 좋은 냄새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이 배어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냄새가 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곧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이 향기는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모습으로 풍기고, 믿음․소망․사랑으로 더욱 풍성하게 삶에 나타나야 합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서는 어떤 향기가 납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금까지 나는 어떤 향기를 풍기며 살았는지를 돌아보기 원합니다. 생명의 향기로 살았는가? 아니면 악취였는가? 내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 에 따라 그 향기가 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내 속에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고 생명이 되는 것이 없다면 얼른 주님께로 돌아와 주님의 임재와 동행을 그리워하며 성령의 인도하심과 세워주심을 좇으며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욕심 없이 살다보면 어느새 내 안에서도 예수님의 향기가 풍겨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믿음의 백성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 >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독감의 이해와 극복 (0) | 2020.11.21 |
---|---|
그리스도의 사신 (0) | 2020.11.07 |
은퇴빈곤 (0) | 2020.09.26 |
펜데믹 이후 내 인생설계법 (0) | 2020.09.19 |
그리스도의 편지(비유설교) (0) | 2020.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