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2주에는 비유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주 제목은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요약본 입니다.원본은 '늘찬양하는 삶'
을 검색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편지
고후 3:1-6,2020.09.13.늘찬양교회
전화와 핸드폰, 팩스와 이메일, 카톡과 페이스 북, 인스타그램 같은 인터넷 매체들을 통해 빠르고 편리하게 글과 사진들을 전송하다 보니 편지를 이용하는 일이 적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편지가 이용되고 있습니다. 편지는 긴급한 사정으로 인하여 내가 갈 수 없을 때 내 마음과 뜻과 소식을 담아 상대방에게 전하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21세기 인터넷 매체가 극도로 활성화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취인이 하나님으로 되어 있는 편지가 매년 수천 통씩 예루살렘의 우체국으로 배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수취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는 편지에는 "좋은 직장과 좋은 아내를 얻어서 행복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빨리요."라고 쓰여 있기도 하고, 자신의 잘못된 죄를 상세하게 기록해놓고 “하나님! 저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라며 용서를 구하는 내용도 많이 온다고 합니다. 아마도 지금은 “하나님! 빨리 코로나가 끝나서 친구들과 뛰어놀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이 담긴 편지가 가장 많이 배달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Ⅰ. 편지의 용도
1. 소통의 용도.
옛날에 글을 전혀 배우지 못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딸네 집에 가서 몇 달이 되어도 오지를 않아, 아내를 보고 싶은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글자를 모르니까 소 다섯 마리를 종이에 그려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아내인 할머니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할머니 역시 글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대신 감 세 개를 그려서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두 분이 서로의 그림을 보고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소 다섯 마리의 그림은 “오소!” 감 세 개의 그림은 “감세!” 라는 뜻으로 충분히 의사가 소통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지 삼년이 되고, 오년이 되고, 십년이 되었으면, 어떤 사람들이 보아도, 단 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예수 믿은 지 오년 혹 십년이 되어도, 소 다섯 마리나, 감 세 개의 편지처럼, ‘?’, ‘!’ 처럼 읽혀지지 못하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성도들이 한 분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2. 추천서로서의 편지
편지는 소식을 전달하는 방편인 동시에, 또 다른 기능으로 사람을 소개하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즉 편지는 추천서나 소개장의 일종인 것입니다. 취직을 하는 데도 추천서나 소개장이 필요하고, 사람을 만날 때도 그러한 것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판에 이러한 추천장을 새겨 주시면서, 우리를 자신의 사역자로 추천하셨습니다. 우리를 자신의 사자와 복음 전달자로 추천하신 것입니다.
3. 신임장으로서의 편지
편지는 하나의 소개장일 뿐만 아니라, 신임장을 뜻하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증명서를 필요로 합니다. 특히 국가와 국가 간의 외교 사절이 교환될 때에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대통령이나 수상이 대사를 외국에 파견할 때는, 신임장을 주어 그 나라의 대통령이나 수상으로부터 신임을 받게 합니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2절)고 했을 때, 성도들은 주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영적 대사로 신임장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분에 맞는 책임과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Ⅱ. 그리스도의 편지
우리를 향하여 오늘 본문 2절에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우리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을까요? 이 비유에는 몇 가지 중요한 영적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1. 예루살렘 교회의 추천서
바울을 배도하던 자들은 예루살렘 교회 내에 존재해 있던 유대주의자들로부터 추천장을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추천장을 내어 보이면서 “바울은 이런 추천장이 없다 하지만 우리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써준 추천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말로 정통성을 가진 교사이다.”며 바울의 가르침을 잘못된 사설로 매도하고 있었습니다. 추천서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에 대한 사도성과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반면 거짓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1절)고 묻습니다.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의 비난하는 말들이나 악평하는 말들에 대해서는 대꾸조차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비록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내준 추천서(천거서)를 가지고 있지만 나는 예루살렘 교회가 준 추천서 때문에 사도가 된 사람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고 사도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추천서가 필요 없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입니다(행26:12-18).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주님께서 위임해 주셨고, 주님께서 보장해 주셨는데, 어찌 사람의 추천서가 없다고 사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느냐' 그러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바울을 대적하는 대적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내준 추천서를 가지고 있다면, 나에게는 "너희가 추천서요, 너희가 편지이다" 그런 말입니다.
2. 바울이 받은 추천서
유대주의자들이 받아가지고 있었던 추천서와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바울의 편지와는 몇 가지 점에서 비교가 됩니다.
첫째, 적대자들이 가지고 있는 추천서는 당시 종이로 사용되던 파피루스에 쓰인 것이지만, 바울의 편지는 사람의 마음에 쓰인 것입니다.
둘째, 적대자들이 가지고 있는 추천서는 잉크나 먹으로 쓰인 것이지만, 바울의 편지는 하나님의 영으로 쓰인 것입니다.
셋째, 적대자들이 가지고 있는 추천서는 종이에 쓰인 것이기에 몇몇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바울의 편지는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편지이기에 모든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파피루스 종이에 쓰인 추천서를 가지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은 사람의 편지이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부름 받은 바울의 편지들인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이다." 즉 “그리스도께 속한 편지”라는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편지로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편지들입니까? 문서로 쓰인 추천서와 같은 편지를 받아들고 다시 말해 어느 교회 목사, 장로, 집사라는 명함을 들고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아니면 행함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로, 편지로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 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Ⅲ. 편지의 내용
먼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바라는 ‘그리스도인의 편지’의 의미에는 기쁨과 생명의 소식을 담은 내용의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이 되기 전 예수 믿는 자들은 잡아다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값없이 받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앞장서서 전해주기를 간절히 소망하였습니다.
둘째로 십자가 구원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해주고 싶은 두 번째 중요한 편지의 내용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할 때에, 죄에 빠져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있을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셨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8)
그런데 아직까지도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데, 그 놀라우신 사랑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어야 할 그리스도의 편지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우리의 모습으로 우리가 받은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삶에서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내도록 그들 앞에 공개된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Ⅳ. 편지의 발송자
편지는 누구의 편지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구의 편지냐에 따라서 받는 사람의 기쁨이 달라집니다. 어떤 미국 사람이 프랑스에 관광을 갔다가 파리에 있는 어느 골동품 가게에 들렀습니다. 이것저것 구경하는 가운데 진열장에 전시되어 있는 진주 목걸이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오래되고 낡은 것이라서 이미 색깔은 다 바랬지만, 진주 목걸이에 장식되어 있는 장식품이 그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냐고 물어보았더니 500달러를 내라고 했습니다. 그는 좀 비싼 듯 했지만 장식품이 마음에 들어서 그것을 샀습니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미국으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한동안 자기의 보석 상자에 넣어서 그대로 방치해 두었습니다.
그러다 한 번은 급히 돈이 필요해서 프랑스에서 샀던 그 진주목걸이를 팔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래된 것이라서 과연 얼마나 값을 쳐줄지 호기심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집 근처에 있는 보석상에 가지고 갔더니, 보석상 주인은 그 진주 목걸이를 손위에 올려놓고 두꺼운 돋보기를 가지고 한참동안 감정을 하더니, 상기된 표정으로 뜻밖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20,000달러를 주겠습니다. 제게 파십시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500달러를 주고 샀는데 20,000달러를 주겠다니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정신을 좀 가다듬기 위해서 일단 그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날 그는 그것을 가지고 꽤 알려진 골동품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그 골동품 가게의 주인도 한참동안 감정을 하더니 옆에 있던 몇 사람을 불러 자기들끼리 회의를 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50,000달러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이 진주 목걸이를 제게 파십시오."
그는 더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솔직하게 골동품 가게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색깔이 다 바랜 진주 목걸이인데 왜 그렇게 값이 많이 나갑니까?" 그러자 골동품 가게 주인은 의외라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아직도 모르고 계셨습니까?" 그러면서 가지고 있던 돋보기를 진주 목걸이에 들이대면서 자세히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 거기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조세핀에게. 황제 나폴레옹으로부터." 그리고 오른편에는 나폴레옹 황제의 친필사인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가게 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진주 목걸이의 자체만으로는 값이 얼마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적혀 있는 글씨와 친필 사인(sign) 때문에 그렇게 값이 많이 나가는 것입니다." 목걸이 자체가 귀중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위대한 영웅 나폴레옹의 사인이 있기에 값나가는 목걸이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영혼이 왜 귀중합니까? 왜 우리 인생이 값나가는 인생이 되었습니까? 우리의 몸에 그리스도의 사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편지로 나아갈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몸에 당신의 친필 사인을 해 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은 가졌노라."(갈 6:17)
여러분, 우리의 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겨진 그리스도의 흔적,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 예수의 흔적이 우리를 귀한 존재로 만들어 줍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로 세상에 나가도 결코 망신당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증인들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2절)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들입니다. 편지의 사명은 상대방에게 배달되어져 익혀질 때에 진정한 값어치가 있습니다. 성도는 나 홀로 그리스도인으로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로 우리의 이웃과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읽히어지는 반가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서, 성도의 사명과 본분을 다하는 아름다운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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