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주일설교

금하지 말라(1)

늘찬양 2022. 9. 4. 19:22

금하지 말라(1)

9:38-40, 22.09.11.늘찬양교회

 

 

어떤 대기업에서 아프리카에 신발을 수출하기 위한 사전 시장을 조사하려고 2명의 사원을 아프리카 현지로 보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모든 조사를 마치고 본사로 돌아와서 사장에게 보고합니다. 한 사람은 아프리카 사람들은 한 사람도 신발을 신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는 무한한 시장성을 갖고 있습니다.”라는 긍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반면 다른 사람은 아프리카인들은 한 사람도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한 켤레의 신발도 팔 수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라는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열두 정탐꾼의 이야기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의 정탐꾼은 우리는 그곳의 사람들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다는 보고를 하면서 우리는 저 땅을 차지할 수 없다며 부정적으로 보고했지만, 단지 두 명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고 고백하며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14:7-9)고 보고했습니다.

 

똑같은 현장을 보고도 두 사람과 두 종류의 보고가 서로 다른 것은 보고자의 가치관과 믿음이 달라서 일어난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현상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바른 믿음의 고백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 금하였나이다.

 

요즘 시대엔 여러 종류의 특허권이 있습니다. 제가 어떤 글을 쓰고 유투브에서 다운을 받아 그 글에 연결하여 올렸는데 페이스북에서 저작권 침해라며 올린 글이 내려졌습니다. 이런 음원만이 아니라 각종 지적 재산권이 있습니다. 지적 재산권은 인간의 창조적 활동 또는 경험 등을 통해 창출하거나 발견한 지식·정보·기술이나 표현, 표시 그밖에 무형적인 것으로서 재산적 가치가 실현될 수 있는 지적창작물에 부여된 재산에 관한 권리를 말합니다. 사람 이름도 마찬가지고 사진도 초상권 침해에 해당합니다. 인격권을 존중하여 다른 사람의 이름이나 사진을 가지고 사업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렇듯 특허권은 개발한 사람에게만 그것을 만들고 사용하도록 특별히 허락하는 독점 권한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것을 만들거나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귀신을 쫓는 일도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는지 예수의 제자가 아닌 그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을 사용하여 귀신을 쫓아내자 요한이라는 제자가 그 사람에게 다가가 이런 행동을 더는 하지 말라.”며 금지령을 선포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특허를 침해했고, 명의를 도용했고, 지식재산을 허가 없이 사용했다고 지적하면서 내용증명을 보내고 고소하겠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9:38)고 자랑스럽게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요한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금한 이유가 주의 제자이니까 스승을 보호하려고 그에게 그 일을 하지 말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지 스승을 보호하려는 차원만은 아니었습니다.

 

앞에 나오는 마가복음 914~18절에 보면 예수의 제자들이 사람들로부터 귀신을 쫓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결과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18)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라며 믿음이 없다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고 자신들과 함께하지도 않은 이름도 알 수 없는 사람이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고 하니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제자들의 명예에 금이 갔을까요? 자신들은 할 수 없었던 일을 했다는 놀라움과 함께 시기심과 미움이 생겨나기도 했을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이런 부끄럽고 연약한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다 원인이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귀신을 내어 쫓는다든지 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주 관심사는 오로지 서로 누가 크냐”, “누가 더 위대한가?”, “누가 더 중요한가?” 에만 쏠려있었습니다. (9:33-37)

 

마치 여권이 민생에는 관심도 없고 새 정권을 잡은 후 서로 누가 크냐? 누가 더 위대하냐? 는 싸움 속에 눈엣가시 같은 이 대표를 징계하는 등의 이전투구(泥田鬪狗)를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 금하지 말라

 

예수님은 제자 요한의 보고를 받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9:39-41).

 

금하지 말라고 하시며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39,41)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런 일은 벌 받을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상 받을 일이라고 하셨다.” 금할 일이 아니라 반대로 권할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귀신 쫓는 것을 자신만 독점하거나 제자들만 행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제자들에게 일을 맡겨 내보내실 때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6:7)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고, 제자들과 같이 다니는 사람도 아닌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았는지우리가 그것을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외관상으로 사도들과 같이 부름을 받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바람이 임으로 부는 것처럼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성령이 역사할 때에 많은 사람이 성령 충만함을 받고 예수의 이름으로 빛 되고 소금 된 삶을 살고 능력을 행하며 살았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마 이런 사람들이 그 당시에 많았을 것입니다."(Matthew Henry 주석참조)

 

본문과 같은 일은 민수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칠십 장로들이 회막에 모였을 때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석지 않은 '엘닷''메닷'이 성령을 힘입어 예언을 하였는데 한 소년이 모세에게 이것을 고하였고 옆에 있던 여호수아가 그것을 "금하소서"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1:29)며 여호수아를 책망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면 금할 이유가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복음은 독점이 아닙니다. 능력도 독점이 아닙니다. 전도도 독점이 아닙니다. 교회도 독점이 아닙니다. 너그러움입니다. 개방입니다. 개혁입니다. 새로움을 향한 도전입니다. 우리를 따르지 아니할지라도 금하지 않는 게 너그러움입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는 말씀도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대접하는 자에게 보상함도 너그러움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금하지 말라,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39,41)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복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복음을 선별하여 허락하지 말고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선별된 몇몇 사람이나 선택된 특정한 민족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침례 요한은 증거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29)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3:16)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물론이요. 복음을 박해하고 방해하는 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 잘못된 열심

 

오늘날 기독교에는 많은 교파가 있습니다. 특별히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교파와 교단이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보다 교회의 전통을 중시하고 신앙보다는 제도를 강조하다 보니 쉽게 갈라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장로교인들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순복음교인, 성결교, 침례교, 감리교인들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교단이 서로 다투고 하나 되지 못하는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잘난 사람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자기 생각이, 자기 해석이 최고라고 주장하며

으뜸이 되고자, 최고가 되고자, 큰 사람이 되고자 다툰 제자들처럼

으뜸이 되려는 사람, 최고가 되려는 사람, 자기 생각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국교회에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한국 교회에서는 누가 더 오래 교회를 다녔느냐?, 누가 더 많이 일했느냐?, 누가 더 중요하냐?”를 따지려는 잘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주보에 헌금 이름이 기재되어 나왔는데 누구 이름이 먼저 나왔나? 누가 먼저 소개되었는가? 가 중요관심사입니다. 그래서 수석 장로라는 말도 공공연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석 장로 이름이 다른 장로 이름보다 뒤에 기록되어있거나 장로 이름이 권사나 평신도보다 뒤에 나오면 난리가 납니다. 이 일로 교회에서 쫓겨나는 당회장도 있습니다. 참으로 가관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크기를 따져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크기를 따져 일하는 데가 아닙니다. 가끔, "그런 일은 집사들이 해야지"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 일'이 무엇인지 모르지만'그런 일'을 권사, 장로, 목사가 하면 안 됩니까? 어떤 일은 집사가 하는 것이고, 어떤 일은 청년들이 하는 것으로 제한되어 있습니까?

 

교회 각 부서, 팀의 대표인 회장, 팀장을장로, 권사만 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그가 집사일지라도, 직분이 없는 사람이라도예수 믿는 신실함과 교회를 사랑하는 진실한 애정이 있다면 누구든지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지 않는 일을,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에 하는 사람이 있거든 박수치고, 감사하며함께 하지 못한 죄송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하지마! 나도 안 하는데 왜 당신이 해. 당신은 그런 거 하면 안 돼.”라고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을 내어 쫓은 어떤 사람에게 금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금합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지요.

 

지금도 한국교회 안에는 이런 계층과 계층 간의 갈등, 세대와 세대 간의 갈등, 지역과 지역 간의 갈등, 학연, 혈연, 지연 옛날 교인, 새교인의 갈등이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득권 의식, 잘못된 편향의식, 성경보다는 교회의 전통을 더 중시하고, 신앙보다는 제도를 강조하고, 은혜나 사랑보다는 규율과 교리를 강조하는 그런 잘못된 모습을 개혁하지 않는 한 가나안 교인들은 영원히 교회 안으로 다시금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 천국에서 상 받을 자

 

오늘 본문 비유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귀신 쫓는 것을 말하다가 왜 갑자기 상 받을 일이 나오냐? 는 것입니다.(38-41) 처음 내용과 그다음 내용이 단절되어 보이지만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39절의 금하지 말라는 것과 41절의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하는 구절이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예수 이름으로 소자에게 물 한 그릇을 내어주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능력자의 행동처럼 보이고 소자에게 물 한 그릇 내어주는 일은 작은 자의 행동처럼 보이지만 두 가지 일 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소중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누구냐? 는 질문에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준 자라는 말씀 속에서(10:42) 우리는 물 한 그릇 내어주는 섬김과 희생정신, 봉사 정신, 예수 사랑의 정신이 아니면 귀신 쫓아내는 능력도 크게 칭찬이나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에서 수석 장로나 평신도 그런 직분이나 어떤 권위, 행적들보다도 너그러움, 양보, 이해, 용서, 사랑, 희생, 섬김 등의 화목으로 십자가의 하모니를 교회와 이웃을 위해 냉수 한 그릇 섬기듯 섬기지, 아니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신 쫓는 능력 행함도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내어주는 섬김의 행함도 모두다 천국에서 상 받을 수 있도록 진실한 마음, 십자가 사랑의 정신으로 행할 때 한국교회도 살고 우리의 믿음도 더 아름답고 귀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천편일률적인 사람들, 다 판에 박은 주장과 언어는 기독교회가 가지는 특성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나, 오직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지만, 하나가 되라고 하여 다양성을 포기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찬양대에 전부 소프라노만 있다고 하면 결코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지 못합니다. 소프라노에 알토와 테너와 베이스가 어우러질 때 아름답고 웅장한 하모니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더 크냐? 어떤 목사, 어떤 장로가 더 큰 일을 하느냐? 그런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내어주는 섬김,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면 그 어떤 행위도 능력도 하늘나라에서 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귀한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일꾼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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