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찬양강해

찬양의 십계명

늘찬양 2006. 11. 10. 23:08

찬양의 십계명 / 김민식

 

아무리 평범한 광경도 시인이 보면 시가 나오고 화가가 보면 그림이 나오고 작곡가가 보면 노래가 나온다. 하나님이 우주적인 사랑을 총동원하여 당신에게 허락하신 소중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당신의 입술에서 살아있는 감탄사가 메말라있다는 것은 영적인 종합검진 결과가 나온 것처럼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인간에게 이토록 다채로운 감각통로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가. 사단은 그 소중한 감각의 길을 통하여 모든 악취 나고 더러운 오물을 쏟아 붓고 있다.
승리하는 성도는 영감의 통로를 날마다 깨끗하게 청소한다. 그리함으로써 모든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의 청결성을 유지한다. 자신을 성도라 칭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하신 일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성도의 자격이 없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자가 아니라 그 분의 아름다우심과 광대하심 앞에 인생사의 전반이 얼마나 사소하며 티끌 같은지를 고백하며 호흡과 생명으로 찬양을 빚어내는 사람이다. 사울은 왕의 자리에 집착하였으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좌로 가든지 우로 가든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늘 만족하였고 욥은 있음과 없음의 한계를 뛰어 넘어 사단의 교활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았다.
앞으로 현대인들, 특히 젊은이들은 짜릿해 지고 몽롱해 지는 일이라면 도덕성과 양심을 불문하고 자신을 내던질 것이다. 그들에겐 실상은 가상이 되고 가상은 실상이 되는 역전현상이 일반화 될 것이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과 나의 실존적인 만남을 두려워하면서 끝없는 집착과 탐닉 속에 영혼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정말 사단은 제 철을 만났듯이 보인다. 그러나 영광의 하나님은 반드시 이 시대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영광을 보이실 줄로 나는 믿는다.
청년들이여! 그대의 수금으로 이 시대의 미친 기운을 진정시켜라. 푸른 영혼들의 연합된 찬송으로 빌립보 감옥의 옥문이 깨지는 역사를 재현하라.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전도서 11:9)

비단 이 청춘의 의미는 육체적인 젊은이들만을 말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일반적인 경향처럼 자신을 젊어 보이게 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어리석은 군상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시간의 성숙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창조하려고 사단의 사주를 받아 몸부림을 치는 기괴한 영혼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죄와 죽음이 해결되지 않는 한, 다윗이 말한 구원의 즐거움을 소유하지 못하는 한, 인간은 채워지지 않는 목마른 잔에 모래를 퍼담으며 그렇게 뒤엉켜 구르다가 그렇게 지옥불에 던져질 것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시편 19:1-6)

다윗은 메마른 언덕에 서서 하늘과 대 자연을 우러러보며 이렇게 놀라운 시편을 자아냈다. 다윗은 그 흔한 졸업장도 학위증도 없었다. 다만 그는 하나님과 대화 전문가, 자연이 주는 지혜 전문가로 잘 자라고 있었다. 우리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작은 공간과 시간에 하나님을 감금하고 그 나머지 영역을 계산된 자유로 채우지만 다윗은 자신의 전존재에 즐거이 하나님을 영접하고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잘 조율된 악기로 삼아 항상 하나님에게 자신을 연주하여 드렸다. 다윗의 눈에 대자연과 우주와 그 안에 가득한 질서가 기가 막힌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일사불란했으며 어떤 불만의 시간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부인할 수 없었다. 양치는 자에겐 모든 것이 열악한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 세상 누구도 표현한 적이 없는 풍요로움의 시를 노래한 그 비밀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승리의 비결이다. 태양의 온기에서 숨은 자가 없듯이 하나님이 뿌리시는 은총의 햇빛에서 숨을 자가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과연 찬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회중과 함께 힘차게 찬양하면서, 때로는 혼자소리로 조용히 읖조리면서 음표 하나 하나마다 영적인 추억이 새겨진 노래들을 부르는 동안에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잘 알려진 경배 찬양곡 중에 ‘주의 거룩하심 생각할 때’라는 곡이 있다.

주의 거룩하심 생각할 때
주의 크신 사랑 느낄 때
주의 영광의 빛 나의 생활 비춰 주실 때
주가 주신 기쁨 맛볼 때에
주의 사랑 속에 나 잠길 때
주의 영광의 빛 나의 생활 비춰 주실 때
경배하리 경배하리 나 사는 동안 주께 경배해
경배하리 경배하리 나 사는 동안 주께 경배해

무심코 생각 없이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이 노래 속에 찬양의 위대한 기본 태도가 암시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편 기자는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라고 말했는데 나 역시 찬양 속에서 찬양의 놀라운 원리와 비밀을 자주 만나게 된다.
찬양을 작사하고 작곡하는 사람들은 그 어떤 영적 행위보다 더욱 고감도의 영감에 붙들리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감각과 은사를 가진 작가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부르고 불러도 계속 은혜가 샘솟는 생명력있는 노래를 만들 수 있다. 마치 맑은 물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처럼 잘 만들어진 한 곡의 찬양곡은 엄청난 힘과 풍부한 수원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 우리 함께 위에 기록된 가사 중에 숨기워진 찬양의 원리를 탐색해 보자. 숨겨진 그림을 찾는 어린아이처럼 작은 흥분과 호기심을 품어도 좋을 것이다.

첫째, 찬양할 때는 ‘주의 거룩하심을 생각하라’
둘째, 찬양할 때는 ‘주의 크신 사랑을 느껴라’
셋째, 찬양할 때는 ‘주의 주신 기쁨을 맛 보라’
넷째, 찬양할 때는 ‘주의 사랑 속에 잠겨라’

사랑하는 연인이 다정히 데이트를 할 때, 그들은 정해진 시간을 의무감에 사로잡혀 억지로 때우는 식으로 함께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흐르는 시간을 아쉬워 하며 마치 그의 전 인생이 그 한 순간을 위하여 준비해 온 것처럼 정성을 다해 서로를 느끼며 누린다. 연애하는 시간은 결코 생산적이지 않지만 그 시간에 사로 잡힌 두 사람은 그 비효율적인 낭비를 황홀해하며 서로의 숨소리 하나도 놓치려 하지 않는다.
찬양은 우리가 하나님을 탐닉하고 만끽하는 시간이다. 세속에 찌든 오감이 다시 하나님에게 총동원되고 영과 육의 모든 감각이 파릇파릇하게 살아나는 부활의 시간이다.
기왕에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에 포로 된 인생이라면 모르지만 우리는 이미 그 사랑의 맛을 알고 그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감각하는 능력은 육상 선수에게 뛰는 능력처럼 너무나 기본적인 조건이다. 감각할 수 없는 사람에게 맛있는 음식과 부드러운 의복은 오히려 고통이 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4:8)

한 교회의 찬양이 살아난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 속한 모든 영혼들이 집단적으로 하나님에게 민감성을 회복하고 영육 간에 주님을 향한 새로운 태도와 습관을 형성하며 그 놀라운 하늘의 감동으로 범사가 지배된다는 것이다. 그런 교인들로 가득한 교회는 부흥하고 신바람이 날 수밖에 없다.
나는 “ - - - 할 수밖에 없다”는 표현을 좋아한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다. 제공된 원인은 예정된 열매를 맺을 뿐이다. 이것이 찬양의 대 원칙이다.
생각하고, 느끼고, 맛보고, 잠기는 능동적인 태도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자연스럽게 그러나 억제할 수 없이 바치는 정서적인 선물이며 사랑의 예물이다. 찬양을 통하여 축복의 원인을 제공하라. 승리의 조건을 구축하라.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들고 내려온 두 개의 돌 판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무런 갈등이나 망설임이 없이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순종하기에 합당한 열 가지의 계명들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찬양에도 열 가지의 계명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 오랜 동안 생각해 왔다. 찬양의 바람직한 자세와 원리를 자신과 성도들에게 알게 하기 위하여 다양한 표현과 방법들을 연구하기도 했다. 이제 이어지는 모든 기록들을 통하여 지금까지 한국의 신앙의 뿌리를 끌어안고 품어 길러준 한국적인 영적 토양에 두 발을 견고히 딛고 신토불이의 마음으로 찬양의 십계명을 풀어 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복스러운 사명인 ‘찬양하는 일’과 ‘찬양케 하는 일’은 나에게 사명이자 직업인 동시에 즐거움이며 끝없는 훈련이다. 그리고 찬양하는 일은 나의 성품을 바꾸었고 내 안에 정말 실감되는 시편 23 번지의 초장과 시내를 만나게 해 주었다. 남들은 찬양을 성도의 의무로 거북하게 챙기는 동안에 나는 찬양을 성도의 위대한 특권으로 누려왔다.
지금도 우리는 인삼의 효능과 놀라운 성분을 다 알지 못하는 것처럼 찬양에는 아직 다 발굴되지 못한 엄청난 위로와 치유와 회복과 성장과 변화의 에너지가 있다.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여기는 그만큼의 존재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조금 바꾸어 사용해 보면 이렇게 될 것이다.
“찬양은 당신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그 만큼만 역사하는 힘이다” 라고.
지금도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찬양의 능력을 경험하고 싶어서 애태우고 갖가지 방법을 적용하여 노력을 하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원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위대한 찬양의 사람인 다윗은 어떤 찬양의 패러다임을 지닌 사람이었기에 그 혼란과 유혹과 위험과 고난 중에도 늘 찬송의 축복을 놓치지 않았을까?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라고 다윗만큼 찬양을 누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다양한 도움과 경험들로 인하여 다윗보다 더 유리한 환경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일단 이 장에서 나는 찬양을 음악적인 대상으로 보지 않으려고 한다. 찬양을 음악적인 대상으로 보는 순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음악적인 한계와 열등감에 시달리게 되고 나아가 찬양의 한계와 열등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찬양은 음악적인 문제가 결코 아님을 나는 많은 현장의 경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다. 오늘도 수많은 음치들이 천군 천사들과 화답하며 찬송 생활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음악적인 능력을 내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의 제단에서 중심을 불태워 드리는 위대한 찬송의 사람들을 나는 경외심을 품고 상상해 본다.
연인 앞에서 남보다 뛰어나지 못한 외모를 미안해하며, 그러하기에 더욱 진지한 얼굴과 진실한 마음으로 상대를 감각해 주는 성실한 연인처럼 나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우러르기 원한다.
가능한 한 한 순간도 단절되지 아니하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느끼며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시편 63:8) 이 말씀처럼 아주 느리더라도 결코 멈추지 않고 하나님에게 더욱 민감해져 가는 그런 영혼이고 싶다.
이제 찬양의 십계명 중에 첫 계명을 만나 본다.

1. 기뻐하며 찬양하라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 하니이다“ (시편 4:7)

찬양이 제품이라면 그 원자재는 기쁨이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을 세상적인 소유인 곡식과 포도주보다 더욱 소중히 여기고 실감하는 기본 능력이 없이는 진정한 찬양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세상적인 사람에겐 성경적인 기쁨이란 있을 수 없다. 그들이 자랑하는 기쁨은 마치 모조 다이아몬드처럼 외양은 비슷하지만 본질은 싸구려일 뿐이다.
심리학자들도 기쁨에 등급이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저속한 동기로 인하여 생산된 기쁨은 곧바로 두뇌에서 네거티브 피드백이 생겨나서 곡선이 급격히 추락한다. 저속한 동기로 쾌락을 추구할 때, 기쁨을 느끼게 하는 화학적인 작용을 내 안에서 스스로 억제하도록 하나님이 구조적으로 설계하셨다는 얘기이다.
식욕이나 성욕의 만족 같은 세상적인 즐거움은 감각이 충족되는 즉시 그 대상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거나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차원이 높은 기쁨은 억제하는 기제가 작용하지 않는다. 이런 특별한 절제 기능이 우리 몸 안에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가치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통하여 우리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급의 기쁨을 만나게 된다. 이 위대한 즐거움은 하나님이 당신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자들을 위하여 감추어 두신 위대한 선물이다. 이 선물을 받고 그 맛을 아는 사람은 세상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구체적인 힘을 얻게 된다. 그 놀라운 즐거움! 누리고 또 누리고 맛보고 또 맛보아도 결코 그 강도가 쇠하지 아니하는 아름답고 위대한 중독성에 기꺼이 나의 전부를 던지게 된다. 모든 종류의 세상적인 중독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파괴하지만 하늘로서 오는 기쁨에 중독된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유익을 받아 누린다.

당신이 진정으로 찬양의 위대한 비경을 탐험하기 원한다면 먼저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에 대하여 진심으로 동의하고 지적으로 인식하고 가슴으로 인정을 하라. 다시 말하거니와 이 첫 번째 계단을 통과하지 않고는 결코 다음 계단으로 나아 갈 수 없다. 정직하게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당신은 주님 앞에서보다 세상 속에서 더 즐거워하지는 않는가? 만일 당신의 신앙 생활 중, 이런 측면에서 정리되지 못한 자신의 충동이나 습관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다면 찬양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영적 생활의 균형과 성장을 위해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우리는 실패하게 만드는 것은 커 보이는 문제들이 아니다. 무시해도 좋아 보일 만큼 작은 문제들이 우리를 넘어지게 만든다. 대부분의 성도들의 고민은 성장하지 않는 믿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도리어 나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신앙이 성장하여 나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나도 알지 못하는 나의 깊은 곳에서는 신앙 성장 억제 작전이 극비리에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을 최우선으로 인정하고 실제적으로 추구하는 내적인 시스템이 없다면 아직 그 사람은 광야 길을 더 걸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십 년이나 광야에서 혹독하게 훈련하신 이유는 애굽에서 찌들어 나온 그 노예 근성들을 바꾸어 가나안의 패역한 문화를 정복할 수 있는 믿음과 순종의 용사들로 회복하시기 위한 시간들이었다. 마치 소금에 찌든 자반 고등어를 다 펄떡이는 싱싱한 고등어로 회복시켜 망망한 바다에 풀어놓으시기 위함처럼 하나님은 찬양이라는 무공해의 흐름 속에 우리를 잠기게 하신다.
찬송가 204장 3절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두 번째 줄의 내용은 찬양이 지향하는 가장 높은 정상이다. 세상과 나는 감각되지 않고 하나님을 감각하는 역동성으로 가득한 심령은 그 모습 그대로 하늘의 축제와 일치한다. 마귀는 성도를 넘어뜨리기 전에 그로 하여금 자신에게 과민하게 만든다. 자기 과민은 이미 넘어짐이며 영원한 실패이다. 창세기 3장의 아담과 이브의 범죄도 결국 자기 과민이며 교만과 불 신앙과 반항의 산물이다.
찬양의 본질이 하나님과 나의 위대한 일치라면 그 순수한 본질을 방해하는 것과의 싸움은 찬양의 필수적인 제식 훈련에 해당될 것이다. 올바른 자세로 차렷이 되지 않으면 군인으로써 빵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찬양에서 성공하면 모든 것에서 성공한다’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시편 4편 7절에서 곡식은 배부름의 문제이며 포도주는 취함의 문제이다. 영적인 우리들도 배부름과 취함이 필요하다. 취함이 없는 배부름은 비문화적이며 배부름이 없는 취함은 독선과 아집과 실속 없는 자기 변명으로 치우칠 뿐이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모든 배부름과 모든 취함의 완전한 충족이며 만족이다.
우리가 소리내어 노래하며 이 엄연한 사실을 온 몸과 마음으로 인정하는 동안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너무나 놀랍게 전혀 새로운 내적인 인식과 거룩한 동기의 시스템을 허락 받게 된다. 물론 하루 저녁 눈물 콧물 찬양 집회를 경험했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그 충격적인 경험의 잔상이 잦아들고 다시 건조한 옛 모습으로 돌아가는 당혹감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우리는 찬양의 사람이 된다.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일곱 번 목욕하라는 엘리사의 명령에 진노하고 돌아서려 한 것처럼 당신은 이 시간 찬양의 찰랑이는 물결에 당신의 존재를 맡기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억지 순종이라도 좋다. 찬양하라. 아니, 찬양의 파도에 자신을 왕창 던져 버려라.

2. 감사하며 찬양하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시편 118:28)

찬양은 나의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지 남의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신이 자신을 인간들에게 기꺼이 소유시킨 적이 있는가? 나의 부처님, 나의 알라신, 나의 삼신할매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러야 제 맛이다. ‘나의’와 ‘하나님’이라는 두 단어가 만날 때 그 곳에는 신앙과 신학의 진수가 배어 나온다.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면서 마음에 안심과 용기와 희망이 솟는다면 당신은 이미 찬양의 기초 체력이 다져진 사람이다. 언제라도 이렇게 주님을 조용히 속삭여 부르는 것만으로도 당면한 시험과 환난으로부터 자신을 신비롭게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까지 영혼을 훈련하라.
찬양하는 마음이 음악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표출이 될 때, 나의 굳어짐과 무디어짐과 어두워짐은 더 이상 나의 영적인 날개 짓을 방해하지 못한다. 따지고 보면 찬양의 가장 큰 장애물은 언제나 나 자신이다.
만일 어떤 처녀에게 잘생긴 청년이 다가 와서 “너는 나의 것이야. 하지만 나의 너의 것이 아니야”라고 말한다면 어떤 처녀도 그 마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면 그 배후에는 ‘나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마땅한 고백이 동반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노래하는 동안에 두 손을 들고 ‘나의 하나님’을 느끼려 노력한다면 동시에 ‘나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가운데 즐거이 드려진 존재’임을 인정하는 마음도 바쳐야 한다.
우리는 찬양은 너무나 이기적이다. 아니, 어쩌면 더 이기적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찬양이 허락하는 최선의 결과를 놓치고 차선의 열매만을 먹어왔다면 진정한 이기심이 아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 하나님이 내게 행하시는 모든 일에 대하여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진심으로 동의하고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조금도 불손한 저항을 품지 않는 것이 감사함이다. 감사할만한 조건을 확인하고 보이는 감사는 두뇌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감사 반응일 뿐 진정한 승리와 순종을 바탕에 둔 위대한 감사는 아니다. 감사는 기쁨과 함께 찬양의 중요한 원자재이다. 아무리 주문이 많이 들어와도 원자재가 없으면 생산을 못하고 출고를 할 수 없다. 그저 목구멍만 울리는 소리는 찬양이 아니다. 심장과 심정과 심령이 함께 울려야 한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화목을 상실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그 성호를 찬양하지 않으려는 자신을 복종시켜 그렇게 하게 만드는 과정이 찬양이며 그 결과는 나에게 엄청난 유익으로 돌아온다.

우리들이 익히 알고 다 즐겨 부르는 작은 소품 찬양 곡 중에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곡이 있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대개는 이 노래를 가볍고 중요하지 않은 곡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나는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신 좋으심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은 찬양의 가장 중요한 기본이다.
역대하 20장에는 모압과 암몬과 세일산, 삼개국 연합군의 엄청난 공격에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한 유다와 여호사밧의 이야기가 나온다. 왕과 백성들은 그 위험 앞에 조작적인 만용을 보이지 않고 즉시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에게 의지한다. 5절로 12까지의 기가 막힌 여호사밧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야하시엘을 통하여 전쟁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위로와 약속을 받는다.
그들은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군대 앞에 행하며 여호와께 찬송하였다. 참으로 이상한 전략이 아닌가? 군대 앞에 중무장한 특공대를 보내어도 아쉬울 판에 전혀 전투력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성가대가 앞장을 선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미친 짓임에 틈림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전략이다.
그런데 그 노래하는 자들의 노래하는 내용이 가관이다. 다급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재촉하며 그들을 대신하여 속히 내려와 싸우시라는 노래를 불러야 할 판에 이미 모든 것이 끝나고 승리를 얻은 무리의 자축하는 노래 같은 내용이 선포되고 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지만 보라!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그들을 치러 온 자들을 자멸시키시는 기적을 일으키신다. 이 장면은 방송국의 스튜디오를 연상시킨다. 프로그램의 최고 책임자인 PD는 주조정실에 앉아 있으므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현장에는 PD를 대신하는 AD가 뛰어 다니며 PD의 뜻을 그대로 전하고 시행한다. 하늘의 왕께서 손을 드시니 유대 백성은 ‘큐!’를 외쳤고 하나님은 당신의 완전하신 사랑과 구원을 시행하셨다.

아무리 위험과 환난이 닥쳐와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근심과 염려와 두려움은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들처럼 나의 모든 삶의 전쟁과도 같은 싸움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인줄로 알고 그 성가대가 부른 노래를 우리도 함께 부르기만 하면 된다. 다만 그 노래를 부르기 전에 온전한 감사로 하나님과 우리 모두의 마음이 조율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지혜로운 자녀라면 자신에게 무엇인가 필요한 것이 있을 때에 그 문제의 유일한 해결자인 아버지에게 다가 가서 먼저 대뜸 본론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다급한 용건을 뒤로하고 먼저 사랑스럽게 아버지의 인자하심과 좋으심을 인정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문제의 해결자이신 아빠의 마음으로 녹이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물 흐르듯이 모든 것은 해결된다.
그러나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가? 잘 나갈 때는 하나님을 잊고 살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응급실에 뛰어드는 환자들처럼 사이렌을 울리면서 하나님에게 달려온다. 마치 나의 용건을 해결해 주기 위하여 내게 고용되어진 주치의나 법률 고문처럼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마음은 아프다. 당신을 소홀히 여김으로써 하나님의 자존심이 상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좋으심을 그 정도밖에 누리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함이 안타까우신 것이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즉시 ‘좋으신 하나님’을 조용히 불러라. 한 절을 부르는데 25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4절까지 부르는데 2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순간의 짧은 투자는 하나님의 복병을 일으키고 당신의 하루의 영적인 그리고 육적인 싸움을 당신에게 속한 싸움에서 하나님에게 속한 싸움으로 전환시킬 것이다.
한가지 주책스러운 부탁이 있다면 이 찬양을 부를 때 중간에 나오는 ‘참’자에 가슴이 뭉클하도록 감동을 담아보라는 것이다. 이 ‘참’자를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서 노래 전체의 빛깔과 농도가 달라진다. 그리고 그 ‘참’자는 당신의 하루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드려지는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하고 진실하게 만들 것이다. 순 진짜 참기름처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편 50:23)

이 말씀에 의지해 본다면 제사의 원자재는 감사라는 결론이 나온다. 마음이 빠진 제사를 하나님은 얼마나 혐오하셨는지 모른다. 지금 수 만 개의 교회에서 천 만 명이 넘는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는 동안 하나님의 구원을 볼만한 영적 제사는 얼마나 될 것인가? 하나님은 부피를 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정도를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너무나 크신 하나님에게 인간이 드리는 부피는 이미 무의미하다.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과부의 동전을 귀히 여기신 예수님 앞에 우리의 찬양과 예배는 어떤 저울로 측량이 될 것인가?

감사하며 찬양하라! 찬양할 때는 무조건 온 마음으로 감사하라. 찬양하는 동안에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관찰하라.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마그마처럼 이글거리는 감사의 열정이 없다면 그 찬양은 밑둥이 잘린 나무와도 같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찬양을 골격으로 삼고 있다. 찬양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지으신 위대한 목적이다. 유대 백성들이 민족적인 위기 앞에서 선불하는 감사로 하나님의 기적을 선사 받았다면 우리도 그 원리를 배워서 삶에 적용해야 한다. 물을 긷는 펌프에 먼저 한 바가지의 물을 붓지 않으면 물이 올라오지 않는 것처럼 환경을 초월하는 선불 감사로 가득한 당신의 찬양은 하나님의 보좌를 진동하고 그 구원을 눈으로 보게 하는 기적의 ‘큐!’가 될 것이다.

3. 쉬지 말고 찬양하라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편 68:17)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
(시편 71:14)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 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시편 119:164)

만일 하나님이 월,수,금은 우리의 짐을 지시고 화,목,토는 우리를 도우시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은 쉽게도 파업하고 직무를 유기 하지만 하나님이 하루만 파업을 하신다면 우주는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고 우주의 질서와 만민의 생명도 하루아침에 끝장이 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쉬지 말고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 시간도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분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님이시다.
쉬지 말고 찬양하라는 것은 줄기차게 노래를 부르라는 것이 아니다. 찬양은 곡조 붙은 기도라고 한다. 옳은 말이다. 기도에 곡조가 붙으면 자동차의 터보엔진처럼 출력이 상승할 것이다. 쉬지 말고 찬양하라는 말은 주님과 하루 종일 고감도 교신을 유지하면서 주안에 내가, 내 안에 주가 사는 경험을 지속적으로 누리라는 말이다.
아무리 교회에서 멋진 찬양을 부르고 훌륭한 프로그램을 공연해도 그 찬양의 결과가 삶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헬스클럽에서 멋진 근육을 만들었지만 일터와 집에서 그 힘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 근육은 도리어 비웃음의 대상만 될 뿐이다.

듣는 사람을 녹이고 울리는 찬양을 부르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 찬양이 삶에 녹아들어 범사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일이다. 쉬지 말고 찬양하려면 찬양이 그 성품 안에 스며들어야 한다. 지금부터 찬양해야지라고 생각하고 주섬주섬 찬양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내 안에서는 찬양마당이 후끈하게 달아오르고 있어야 한다.
첫사랑에 빠지면 그 사랑하는 사람의 느낌과 기억을 아무리 떨치려고 해도 떨쳐지지 않는다. 만일 그 사랑이 안타까운 짝사랑이라면 결국 그는 그리움과 괴로움으로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웃지 못하고 급기야는 상사병으로 죽기까지 한다. 사랑은 마음의 현상인데 그 사랑이 젊고 싱싱한 청년을 죽이기까지 할 수 있는 위력을 발휘한다. 이 비유는 비록 파괴적인 비유이지만 그 의미를 뒤집어 본다면 하나님을 향하여 나 자신은 물론 어떤 환경도 방해하지 못하는 영적인 흐름이 생길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강물이 하루는 동에서 서로 흐르고 하루는 서에서 동으로 흐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의 강물은 순간마다 흐름의 방향이 바뀐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음란이 아닌가? 한 여인이 한 남자에게 모든 것을 바쳤으면 그는 더 이상 다른 남자에게로 어떤 종류의 기울어짐이나 흘러 넘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사랑은 그 모든 아름다운 범람을 단 한 사람에게만 허락한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사랑은 처음에는 감정에 근거하여 시작하지만 차후에는 약속에 근거하여 유지된다. 찬양도 마찬가지이다.

쉬지 말고 찬양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순간마다 감미로운 주의 임재를 누릴 것임이요. 사랑 때문에 신분도 재산도 생명도 거는 것이 인간인데 가장 아름다우신 하나님, 다윗이 시편 8편 1절에서 고백한대로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외칠 수밖에 없을 만큼 아름다운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우리들은 얼마나 한결같은 흐름으로 하나님에게 쏟아져 들어가야 하는가?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루에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겠다고 서원하고 있다. 일곱 번이라는 숫자는 완전 수이다. 하루 종일 멈추지 않고 찬양을 내면에서 또는 외면화하여 이어가겠다는 결심이다. 잠시도 쉬지 않고 어떤 정서가 특정한 대상을 향하여 주어지기 위해서는 강한 미움이나 강한 사랑에 근거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격렬하고 역동하는 정서를 근원으로 하지 않으면 쉬지 말고 찬양하기란 어렵다.
이른 아침마다 제일 먼저 일어나 자녀들을 위하여 새벽밥을 짓고 정성을 다해서 도시락을 싸는 어머니들의 위대한 인내는 보상을 바라거나 의무감에 떠밀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로 하여금 힘겨운 새벽에도 자명종이 울리기 직전에 눈을 번쩍 뜨게 만드는 내적인 종소리는 사랑이다. 열 손가락을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는 속담처럼 즐거운 날이나 고통스러운 날이나 나를 찬송하게 만드는 위대한 근거는 나의 날들이 바로 하나님의 정하신 보배롭고 특별한 날들이며 이 날에 나는 즐거워하고 기뻐할 이유가 너무나 충분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편 118:24)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짐을 지신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위하여 날마다 찬송의 짐을 져야한다.
쉬지 말고 찬양하는 자는 쉬지 않고 승리할 것이다. 생활 속의 작은 승리에서부터 인생 전체를 놓고 벌이는 영적인 큰 싸움에서도 찬양은 위대한 팡파레가 될 것이다. 마귀가 하는 일은 사람에게 고난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유혹을 사용해서라도 사람의 입술에서 찬양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마귀도 천하만국 영광을 자신을 경배하는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 땅에서는 잠시 그들도 힘이 있다. 마귀를 한 번만 경배해도 천하를 다 얻을 수 있는데 그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만을 쉬지 않고 찬양하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승리인가? 실제로 대중음악을 하는 국내외의 음악인들 중에는 마귀의 도움을 받아 큰 히트를 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말로는 속히 쇠잔해 지고 인간의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진다. 마귀에 의지해서 얻어진 소득은 결코 그들에게 행복이 되지 않는다. 이 원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측면이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원칙을 벗어나서 살 수 없다.
신앙의 완성은 한 영혼이 쉬지 말고 찬양하는 모습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그 모습은 바로 천국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을 향하여 가지게 될 영원한 삶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쉬지 말고 찬양하는 사람은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양하도록 자신을 분발시킨다. ‘항상’ ‘더욱 더욱’의 의미에 주목하라. ‘잠간’이나 ‘쉬엄쉬엄’은 누구나 보일 수 있는 특성이다. 그러나 ‘항상’과 ‘더욱 더욱’은 모든 성공자들만이 보이는 위대한 공통점이다. ‘쉬지 말고’의 양대 바퀴는 항상 소망을 품는 것과 더욱 더욱 주를 찬송하는 열심이다. 소망과 열심만 잃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결코 절망은 없다. 소망과 열심의 동기가 사라진 부촌과 선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한다. 찬양은 우리가 더욱 뜨겁게 인생을 살아야 할 많은 이유들을 발견하게 해 준다. 이 놀랄만한 결과는 철학이나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을 거쳐서 새벽을 여는 찬란한 빛살처럼 나에게 주어진다.

4. 신령으로 찬양하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0)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와 간음한 뒤에 심각한 영적 장애를 겪게 된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온 우주를 두리번거리면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를 외치며 하나님과 단절을 괴로워하신 것처럼 그는 범죄의 결과가 찬송의 막힘으로 나타나는 것을 체험하며 경악하게 되었다.
시원하게 열린 화창한 영적 하늘 아래 언제나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한 다윗에게 그 답답함은 마치 무덤에 내려가는 자의 절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시편 51편에서 그가 간절히 통회하는 고백과 사죄의 요청과 영적인 관계의 회복을 갈망하는 마음은 3천년이 지닌 지금에도 여전히 감동의 진동을 품고 우리들의 마음을 공명시킨다. 그 괴로움은 아는 사람만이 알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마음을 차단한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그 암담한 상태 안에 있으면서도 그 괴로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괴로움은 아직 그가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그 범죄한 마음의 더 깊은 곳에는 마귀도 건드리지 못하는 투명한 영혼의 샘이 있음을 증명해 준다.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이 없이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처럼 영적인 청결이 선행되지 않고는 찬양에 관한 한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영으로 감각할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다윗은 찬양의 기교나 방법에서도 세계최고임에 틀림이 없는 사람이다. 그가 수금을 타면 얼마나 영적인 감동이 넘치는지 악신이 도망갈 정도로 치유력도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하나님에게 죄악을 고백하며 찬양의 회복을 갈망하고 있다. 영혼이 정직한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신비로운 유쾌함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 자유로움을 누리며 창공을 날개 짓 하는 영적인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영혼의 위대함이 아니라 영혼의 정직함이다. 백 만 개의 정밀한 첨단 부품을 자랑하는 우주선도 부속품 중에 하나만 잘못되면 큰 사고가 나듯이 우주선보다 더 정교한 우리 영혼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조화를 이룬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이 자리를 잡을 때 동시에 우주적인 찬양의 오케스트라도 우리 내면의 마당에 자리를 잡게 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시편 33:1)

그런데 정한 마음의 창조와 정직한 영의 새롭게 함은 내 권한 밖의 일이다.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찬송을 드리기 전에 죄악과 교만한 충동성에 물든 나의 중심을 정직으로 가득하게 채워야 하는데 인간이 교양과 철학과 노력은 아무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직 신령에 의지할 때에만 내 안에 정직이 주어지고 그 정직의 마땅한 결과인 찬양이 자유롭게 발산되어 진다.
의로움은 인간의 공로와 상관이 없다. 인간을 의롭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편에서만 가능하다.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것은 의인들의 특권인데 그 의인됨이 나의 노력과 관련이 없으니 찬양도 성령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찬송하려면 먼저 하나님 앞에 정직한 영혼이 되어라. 그 청결한 소원을 안고 하나님에게 내 안에 그러한 영의 세계가 열리도록 간구 하라. 이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과 언제나 일치하는 내용이므로 찬양을 위해 정직한 영은 달라고 간구 할 때는 대단히 즉각적으로 역사 하신다. 때로는 일생을 바꿀 만큼 강하게, 때로는 한 곡의 찬양을 감당할 만큼 적당하게 역사 하신다.
찬양을 드리기 전에 불꽃같은 주님의 눈동자 앞에 나의 영혼이 정직하게 해 달라는 기도는 필수적이다. 찬양은 본디 나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위대한 영적 작업이다. 찬양의 본질은 아름다움과 거룩함이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더 이상 우리 안에 그 아름다움과 거룩함이 남아 있지 않는다. 집에 샤워시설이 있어도 가끔은 사우나탕에 가는 이유는 그곳에 가야만 화끈한 탕과 시원한 탕을 왕복하며 혈액 순환을 활발하게 돌게 할 수 있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왕복하면 모든 혈관은 팽창하면서 피의 흐름을 강하게 한다. 때로는 그 혈액순환 때문에 갑자기 몸이 가려워지기도 한다. 찬양은 뜨거운 신령과 함께 냉정한 진정에 의지하는 일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우물가 여인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신약 시대는 구약과 달라서 예배가 공간과 방법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고집하는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인들이 고집하는 그리심 산의 경쟁이 무의미해지고 예수님은 언제나 어느 때나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라고 강조하셨다. 예배와 찬양의 의미는 거의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단어를 구분해서 보는 것은 오히려 성경의 요구를 헷갈리게 한다. 위의 말씀에서 ‘예배’ 대신에 ‘찬양’을 넣어도 결코 의미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찬양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찬양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라“

‘하나님이 찾는 자’는 ‘하나님을 찾는 자’이다. 서로가 찾고 있을 때에만 서로의 시선이 마주 칠 수 있다. 성경은 온통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찾으시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이야기로 가득해야 한다.
찬양은 감동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단팥이 빠진 찐빵처럼 내용이 없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감동은 인간이 음악적으로 조작해 낸 일회용 인스턴트 흥분이 아니라 내 안에서 성령님이 유발시키시는 순수한 감동을 말한다. 이 감동은 찬양을 받으실 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근거로 성령님의 거룩한 촉진에 의거한다.
많은 찬양집회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신령한 내적 준비와 반응보다 화려한 프로그램과 집단적인 분위기가 만드는 일시적인 흥분 상태의 형성에 주력하는 것을 본다. 물론 그런 시도의 결과로 많은 분들이 영적인 도움을 얻는 것은 사실이다. 찬양이 주는 열기 없이는 말씀에 대한 민감한 반응도, 자발적이고 뜨거운 기도도 터뜨리기 어렵다. 그러나 찬양의 의도가 겨우 다른 그 무엇의 준비에 불과하다면 그 찬양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시는 분의 의도에 먹칠을 하는 결과가 벌어진다.
성도는 무엇을 하든지 자기 민감성보다는 하나님께 민감한 태도를 지켜야 한다. 자기 민감성이 바로 마귀가 일하는 통로이며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올무가 된다. 찬양을 부르는 동안에 몸과 마음이 붕붕 뜨고 기분이 황홀해 지는 것은 자주 있는 경험이지만 그 경험이 반드시 성령님의 충만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사단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만 기분 좋으면 그것이 선이다. 네 자신을 황홀하게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따지지 말고 취하라”
나의 말이 지나치다면 용서하시기 바란다. 그러나 찬양 속에 도사리고 있는 영적인 위험이 분명히 실존하고 있다. 나는 분명히 찬양을 드린다고 애를 썼는데 하나님 편에서 찬양으로 열납 하시지 않는다면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며 영적인 낭비이다.
그래서 올바른 찬양을 위해서는 성령님이 주시는 하늘의 감동과 음악이나 분위기, 또는 나의 열심과 몰입이 유발시키는 일시적인 흥분의 차이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지속적이고 성경적인 유익을 낳는 찬양이 되도록 신령에 의지하여 겸손히 찬양하는 새로운 질서와 거룩한 습관을 내 안에 만들어 가자.

5. 진정으로 찬양하라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시편 147:1)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 하였나이다“ (시편 119:14)

위에서 우리는 신령에 의지하여 찬양하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령과 더불어 진정으로 찬양함은 못지 않게 중요하다. 신령이 사우나탕의 뜨거움이라면 진정은 차가운 탕에 해당한다. 차가움은 냉정함이다. 우리의 찬양에 냉정함의 요소가 필요하다는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이 차가움은 뜨거움이 식어버린 결과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뜨거움이 사라지고 더 이상 나를 이끌어갈 에너지가 고갈되는 순간에 진리에 입각하여 자신에게 또 다른 의미의 분발을 요구하는 것이다.
“찬송함은 아름답고 마땅하다”
아름다움이 나를 움직이지 못할 때는 마땅함이 위력을 발휘해야 한다. 서로 애인이 되기로 손가락을 마주 건 두 사람도 항상 서로의 아름다움에 취해서만 살 수는 없다. 때로는 서로에게 감동할 수 없는 순간에도 그들은 서로를 묶어주는 약속과 규범에 의하여 관계를 망가뜨리지 않고 사랑을 유지하고 즐거움을 숙성시켜 갈 수 있다. 만일 이 세상의 모든 부부들이 서로에게 더 이상 매력이 없고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 헤어진다면 이 땅에는 온전한 가정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도 창세기에 범죄한 아담과 이브에게 정떨어진 심정으로 즉각 포기 선언을 하셨다면 지금 우리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아직 우리가 살아서 찬양하며 복을 누리는 것은 우리가 예뻐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스스로 번복할 수 없으신 약속에 의거하는 것이다.

찬양에는 이런 양대 측면이 항상 상존 한다. 도무지 찬양할 기분이 내키지 않는 순간에도 자신에게 찬양할 것을 엄숙히 선포할 수 있는 내적인 카리스마를 가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기분대로만 살았다면 큰 위험이나 손실을 겪었을 수도 있다. 기분에 끌리면 충동적이 되며 충동적인 선택은 언제나 후회를 낳는다. 우리는 오랜 교육과 경험에 의하여 뜨거움과 차가움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 알고 있다. 인간은 자기 말만 듣는 동물이다. 아무리 인도자가 열정적으로 찬양을 이끌어 가도 자신이 자신에게 찬양할 것을 명령하지 않으면 입술이 열리지 않는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이 잘 아는 노래의 가사를 잘 보라. 가벼운 청유형인 ‘찬양할래?’도 아니고 미지근한 설득형인 ‘찬양하지’도 아닌 단호한 명령형인 ‘찬양하라’이다. 이 세상에는 자신에게 아무 것도 명령하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들이 너무나 많다. 언제나 감정이 의지를 이기는 인간형은 충동적이고 변명이 많으며 무책임하다.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귓가에서 속삭이는 마귀의 달콤한 속임수에 넘어가 선악과에게 손을 뻗치는 아담과 이브의 마음의 상태와 흡사하다. 감정이 달리는 말이라면 의지는 그 말 등에 올라앉은 기수와도 같다.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제 갈 길로 가는 교만과는 다른 말이다.

찬양은 마음이 고도로 하나님에게 순종되어진 상태인데 그 상태를 창조하거나 지속하기 위해서는 음악적인 작업과 함께 내면에 또 다른 긴장이 요구된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악보와 함께 지휘자를 동시에 주목해야 하는 원리와 동일하다. 한 쪽에만 몰두하다가는 전체적인 하모니에서 이탈하게 된다.
찬송의 아름다움이 마땅함을 인도하고 찬송의 마땅함이 아름다움을 지지하는 균형이 내면에 자리를 잡을 때 스스로도 선명히 확인할 수 있는 탄탄한 찬양의 탄력을 느낄 수 있다.

찬양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성경 제일의 찬송 책인 시편의 시작이 ‘복 있는 사람’으로 시작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인간적인 즐거움과 영적인 즐거움을 분리하여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교회에서는 찬양하는 즐거움으로 살지만 세상에 돌아오면 또 다른 무엇을 거리낌없이 추구한다. 이런 이원론적인 사고가 찬양의 흐름을 끊고 감사와 기쁨의 영적인 맥박을 약하게 만든다.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항상 하나님의 방법이 나의 방법보다 더 우선하게 되고 하나님을 나의 생활의 최종적인 권위로 인정하는 마음에서 권세 있는 찬양이 솟구치게 된다. 이런 태도는 진리에 대한 성실한 반응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 말씀에 대한 진실함이 없이는 찬양도 기반이 약하게 된다는 뜻이다.
많은 교회에서 찬양인도자를 세울 때 그가 얼마나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는지를 보지 않고 그의 음악적인 기량만을 염두에 둔다. 말씀에 매혹되지 않고 나아가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는 사람이 찬양을 인도하면 절대로 회중을 은혜의 깊은 곳으로 인도할 수 없다.
또한 소위 찬양 목회라는 이름 아래 말씀에 입각한 건강한 성장보다는 찬양을 중심으로 후끈한 분위기를 만드는 일에만 주력하다보면 결과적으로 뿌리가 약한 나무가 된다. 찬양은 참 좋은 것이지만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계획에 나를 일치시키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진정으로 좋은 것이 된다.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편 35:28)

혀가 주의 의를 말하는 것과 나의 입술이 주를 찬송하는 것은 동시적인 사건이다. 마치 발라드 대중 음악을 좋아하는 감상주의 팬처럼 하나님을 연인으로 설정하고 감각에 치우친 음악을 통해 그런 유사한 감정에 깊이 빠지게 되면 성경적인 찬양의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상업성을 지나치게 의식한 기독교 음반들이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그런 현상을 만들 수도 있다. 성경은 읽기 싫은데 찬양은 부르고 싶은 기현상이 나타나면 결과는 심각해 질 수 있다. 남녀가 만나서 즐기는 것은 좋은데 서로에 관해서는 이름조차 알고 싶어하지 않는 저속한 세태의 연장으로 느껴져서 나는 그런 현상이 두렵기까지 하다. 마귀가 역사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마귀가 역사하기 수월한 상황을 우리가 자초하는 격이라고는 말할 수는 있다.
나무가 시냇가에 심기우면 과실을 맺음과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은 당연한 결과이다. 찬양의 나무에 풍성한 실과와 엽록소 싱싱한 잎사귀가 없다면 우리는 당장 어디를 점검해야 할 것인가? 당연히 당장 뿌리의 상태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좋은 찬양꾼이 되려면 먼저 좋은 말씀꾼이 되어라. 찬양이 말씀을 대신할 수 없고 말씀이 찬양을 대신할 수 없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서로에 대한 감정과 서로에 대한 약속을 조화롭게 키우고 지켜야하는 것처럼 하나님에게 찬양하는 우리들도 신령에 입각한 뜨거움과 진정에 입각한 차가움을 잘 지켜야한다. 찬양의 아름다움이 신령의 측면이면 찬양의 마땅함은 진정의 측면이다. 감정은 환경의 영향을 받기 쉽다. 그러나 의지는 나를 짓누르는 환경을 거슬려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나를 이끌어 갈 수 있다.

찬양하는 일이 은사요 사명인 나에게도 찬양의 정서적인 기반이 흔들리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런 때에는 조용히 성경을 펼치거나 말씀을 암송하면서 나 자신에게 찬양을 명령한다. 그러면 대개의 경우에는 아무리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즉시 평강을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내적인 교제를 지속할 수 있게 된다. 이 소중한 능력에서 나의 행복의 대부분은 생산된다.
찬양의 근거가 되는 성구는 몇 절 외워두는 것이 좋다. 암송되어지는 말씀은 논리적인 이해를 떠나 양면에 날선 검처럼 나를 쪼개며 역사 하는 힘이 있다. 이 찬양의 십계명에 나오는 성경 말씀들은 내 안의 찬양을 깨우는데 특별한 힘이 있다.

6. 사모하며 찬양하라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사모하나이다“ (시편 63:1)

성도는 고난을 먹고 성장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자동적으로 쾌락과 평안을 추구하지만 인간의 그런 본성을 따라가서는 결코 성장도 성숙도 할 수 없다. 성경은 인간의 반항과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교훈적 기록이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열왕들의 기록은 절대로 예외가 없는 과학적인 공식을 보여주는 것처럼 순종과 축복, 불순종과 저주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 ‘그 지경’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저 지경’을 통하여 신앙이 성숙한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망가진 상황을 보고 우리는 ‘저 지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원치 않는 고난은 항상 놀라운 선물을 남기고 떠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끔 맞이하는 ‘이 지경’은 믿음의 눈으로 보면 진실한 찬양을 회복하는 위대한 기회가 된다.
찬양은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는 것이며 하나님을 찾는 것은 목마름이라는 정서로 비유할 때, 가장 적절한 표현이 되기도 한다.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메이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참소망
나의 몸 정성 다 바쳐서 주님 경배합니다

목마름이란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고통이다. 갖가지 고통 중에 목마름은 가장 강한 강도로 인간을 괴롭힌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면서 얼마나 목이 마르셨을까? 바짝 바짝 타 들어가는 갈라진 입술을 열어 예수님은 끝까지 물을 찾으시지 않으시고 아버지를 찾았다. 십자가상의 목마름은 가장 위대한 찬양의 모습이시다.
시편 기자는 간절히 주를 찾되 두 가지의 태도를 병행한다. 그 두 가지란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는 것이다. 찬양은 이 두 가지의 속성을 동시에 지닌다. 마음으로만 찬양하거나 육체로만 찬양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끌리게 마련이고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육체적으로 서로 다가가는 흡인력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랑하는 데에도 온 마음과 온 몸이 필요하듯이 찬양하는 데에도 온 마음과 온 몸이 동원되어야 한다.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찬양은 포장지에 불과하다. 찬양을 음악이라는 범주로 제한한다면 감미로운 멜로디와 잘 다듬어진 소리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진실한 중심이다. 구약의 유대인들이 형식과 규례는 따르면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진실하게 찾지 않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당신의 아픔을 토로하신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 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편 14:2-3)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사야 64:7)

사랑하면 서로를 찾게 되어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없는 것은 그 뿌리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토양이 없는 까닭이다. 당신은 주님을 생각하거나 예배드림이 진심으로 소중하고 즐거운가? 두 연인이 주중에 그리워하지 않고 주말에 만나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 두 사람의 사이에는 산뜻한 관심과 흥분보다는 나른한 타성이 작용하는 탓이다. 예수님과 나 사이는 어쩌면 아주 오래된 연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므로 싱그러운 긴장은 다 사라지고 의무감과 계산만이 작용하는 관계가 될 가능성도 많이 있다.
행동은 생각의 반영이다. 마음속에서 그리 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 생겨야 그 보이지 않는 설계도를 따라 구체적인 행동이 일어난다. 찬양이 자동차라면 사모함은 엔진에 해당된다. 음표 하나와 가사 한 줄에 모든 영적인 감성을 연결하고 언제 어느 때 찬양하더라도 최고의 감동을 생산할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마땅하다. 찬양을 통하여 사모하는 마음을 키우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더 깊고 민감한 교감이 생긴다.

찬양을 드릴 때, 몸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향한 나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전통이 오래거나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오랜 유교 문화는 표정을 감추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다. 아무리 기뻐도 그 기쁨을 안으로만 삭이고 아무리 괴로워도 짐짓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젊잖을 빼는 것이 양반의 자세였다. 그러나 찬양은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되기를 요구한다. 어린아이는 감정과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감정과 표정을 조작하면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다. 어린아이가 어른스러워지면 우리는 성숙하다고 칭찬을 하지만 그런 식으로 감정으로 내면에서 조작하는 습관이 들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모습을 보여 드리기가 어려워진다.
어떤 교회가 일정한 수준에서 더 이상 찬양의 진보를 보이지 않으면 그 중요한 장애물은 표현 양식에서 묵계로 동의되어진 어떤 선을 넘지 못하기 때문일 때가 많다. 아무리 감동이 밀려 와도 타인의 눈이 거북하고 무서워서 두 손을 올리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리지도 못하고 찬양의 감동을 안고 통성으로 기도하는 시간에서 하나님의 귀가 아니라 인간의 귀 때문에 소리를 내지 못하는 방어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찬양은 자유로움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처럼 찬양은 진리의 인격적인 본체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이므로 올바른 찬양을 드리면 필연적으로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어있다.

광야에서 불뱀이 이스라엘 민족을 물고 다니며 무수히 죽게 할 때에도 장대에 높이 매달린 놋뱀을 바라보면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찬양이라는 새로운 전망대에서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선명히 바라보는 그 행위 자체는 엄청난 치유력과 회복력을 내포한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시편 62:1)

세상에서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거나 얻을 수 없다. 반드시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자신의 문제에 대하여 스스로 아무 것도 지불할 것이 없는 존재임을 먼저 알게 한다. 우리는 죄와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소유나 힘으로 소정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신 하나님을 잠잠히, 결코 소란스럽지 않게 우러러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하기 전에는 잘나가던 사울도 평안하지가 못했다. 그는 과격한 열정으로 자신을 난폭하게 운행하며 인생의 길을 과속으로 질주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는 한 순간에 세상과 자신에 대하여 눈멀어버리고 예수님과 진리에 눈을 뜨게 되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인 바울로 거듭나게 된다.
나의 구원이 인간적인 열심이나 철학이나 노력이나 이성에서 오지 않고 사랑이시며 충만이시며 평강이신 하나님에게서 일방적으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늘 되새김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찬양의 샘이 열린다.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전 단원이 오보에 소리에 맞추어 튜닝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화려하게 소리를 내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완전하게 튜닝을 하는 것이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을 바랄 때, 그냥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옴을 알고 믿으며 바랄 때 한 자락 노래로 사라질 우리들의 찬송이 진정한 찬양으로 하늘에 상달이 된다.

찬양은 어떤 면에서 나를 시끄럽게 하는 과정이 아니라 나를 잠잠하게 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목소리가 크게 울리고 회중의 뜨거운 율동과 연주가 공간을 달구어도 찬양하는 자의 내면에서는 모든 파도가 잠자고 마귀의 울부짖음이 저 견고한 방탄 유리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경험이 찬양이다. 안에서 솟는 감동과 외부에서 강요된 흥분은 철저히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우리는 죽은 듯이 잠잠해야 한다. 찬양을 통하여 숨막히는 절정감을 맛보게 될 때에도 그런 느낌에 빠져드는 자신을 주목하지 말고 애써서 그 찬양의 목적이신 분에게 계속 나아가야 한다.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시편 143:6)

나는 어렸을 적에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가뭄에 쩍쩍 갈라진 논바닥을 본 경험이 있다. 이 구절을 보면 항상 그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경험한 어떤 토지의 모습보다 한국의 논바닥은 더욱 영혼의 갈증을 잘 드러내준다. 이 메마른 땅을 촉촉하게 적시고 생명이 사라진 공간에 새롭게 푸른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그 분은 그런 분이시기에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도 하다. 죽도록 목이 마른 사람의 생각에는 오직 물밖에 없을 것이다. 누가 물을 기억하라고 말하기 전에 그는 물이 주는 모든 감각을 오감을 총동원하여 그리워할 것이다. 찬양은 하나님을 마른땅같이 사모하는 아름다운 고통을 즐거이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이 영적인 갈증은 우리를 살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목마르지 않으면 즉시 세상을 향하여 목이 마르게 된다. 세상이 주는 물은 완전한 해갈을 약속하지 못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3-14)

찬양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는 사람과 전혀 다른 고통관을 가지고 산다. 모든 내적인 질서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균형을 유지할 때 그는 아무 것도 고통이 아니고 다 찬양의 온기와 진동으로 녹아짐으로써 새로운 축복으로 조형되는 것을 믿는다.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마른땅같이 주를 사모하는 것은 어떤 좋은 결과를 위한 힘겨운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지고의 기쁨이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다. 영혼의 상태가 여기까지 이르면 마귀와 세상은 그 성도의 영혼을 찬양할 수 없는 상태로 결박할 수 없다. 병상에서, 감옥에서, 전쟁터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그의 두려움과 곤고함은 그의 영혼을 더욱 찬미케 하는 자극제가 될 뿐이다.

7. 기억하며 찬양하라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시편 28:7)

대부분의 경우에 성도들이 찬양하는 이유는 앞으로 역사 하실 하나님에게 은혜와 축복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부르게 된다. 부흥회에 모여서 찬양하는 이유는 그 날, 놀랍도록 임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는 것이며 각종 찬양 모임에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이유는 이제 이 시간과 공간에 역사 하실 하나님의 황홀한 임재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절벽에 작은 틈이 없으면 등산가가 정상에 올라갈 수가 없다. 로프에 몸을 의지하고는 있지만 몸을 들어올리려면 발끝이 들어갈 작은 틈이 있어야 한다. 잠시 눈을 감고 영화나 TV에서 보았던 등산가의 팽팽한 모습을 상상해 보라. 우리의 찬양이 경배의 산을 올라가는 등산이라면 위에 묶인 로프와 함께 나의 두 발끝을 밀어 넣을 작은 틈이 있어야 한다. 그 찬양을 돕는 틈새는 바로 나의 도움이 되신 하나님의 수많은 흔적들이며 기억들이다.
찬양은 은혜의 기억력이 좋은 사람에게서 더욱 찬란하게 피어난다. 가급적이면 추상적인 기억보다는 그 날의 감정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구체적인 기억이 좋다. 숫자와 형태는 잊어 버려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영적인 이미지를 간직하고 기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놀라운 찬양의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
위의 말씀은 찬양의 삼 단계를 보여준다.
첫째는,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하나님이 내게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확고한 의미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기초적인 이미지가 풍부하지 못하면 찬양의 흐름이 자주 끊기고 내적인 분발을 유지할 근거가 빈약하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은 언제나 불확실함과 안개 같은 희미함으로 감추어져 있다. 안개가 잔뜩 끼어서 전방이 잘 안 보이는 도로를 차선만 믿고 자동차를 몰 수 있는 것은 저 차선이 이어지는 한 갑자기 절벽은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하신 분이시다. 그 분의 한결같으신 좋으심은 우리의 찬양이 수그러지지 않아도 좋은 힘찬 근거가 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며 방패이시다. 힘은 공격적인 필요의 응답이시며 방패는 방어적인 필요의 응답이시다. 늘 전쟁 속에서 살아야했던 다윗은 이 두 가지 측면의 보장이 얼마나 필요한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하나님의 이미지를 다양하게 내면의 창고에 축적을 해 왔다. 그리고 그 생생한 기억과 감동을 다시 꺼내어 놓을 때마다 오늘의 현실과 충돌하여 찬란한 빛으로 뿜어져 올라왔다. 지금까지 그리 하신 하나님은 영원히 나에게 그리 하실 것이라는 믿음만이 우리의 찬양을 영원하게 한다.

둘째는,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남의 간증에 의거하여 찬양을 드릴 수는 없다. 그 감동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다. 남의 체험이 아니라 나의 체험이 기초인 대공사이다. 모태 신앙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맞이하는 개인적인 체험을 통하여 위대한 결단으로 나아가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의지하는 자에게 언제나 도움이 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변하지 않는 속성상 도움을 청하는 자에게 무심하실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않으시다. 사람은 다 자기 같은 줄 아는 착각의 동물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자기 수준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은 무정하신 분이 아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루를 믿어도 그 분은 이미 그 사랑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도움이 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찬양을 드릴 때는 잠시 뒤를 돌아보는 백밀러를 보라. 주님과 함께 살아온 날들의 크고 작은 기적들은 헤아리며 오늘도 찬양할 이유가 너무나 충분함을 고백함이 마땅하다. 지금 당장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고 나의 부르짖음에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나를 섭리해 오신 하나님의 손길을 더듬어 보면 그 기억 속에서 부드럽고 커다란 손이 나와서 나를 다시 붙들어 주심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내게 어떤 분이신가?’와 그런 하나님이 ‘내게 어떻게 하셨는가?’를 깨달으면 이제 이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보일 수 있는 원인을 제공받게 된다.

세 번 째,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기쁨과 찬양은 늘 함께 다니는 파트너이다. 기쁨 없는 찬양과 찬양 없는 기쁨은 모조품이다. 이 문장은 능동적인 의지를 내포한다. 누가 시키거나 강요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뻐하며 찬송한다는 결심이다. 아무리 유능한 조직과 장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성도 하나 하나가 하나님께 기뻐하며 찬송할 내적인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젖은 장작을 태우는 것처럼 힘이 든다. 선교단이나 인도자는 한 성도와 하나님의 영적인 만남을 도와주는 촉매와 도우미의 역할로 만족해야 한다. 찬양을 이끄는 매개체가 지나친 힘을 발휘하려고 하면 결국 성도 하나 하나가 가져야할 자발적인 찬양 동기를 쇠약하게 만들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일정한 공간과 일정한 방식에 의해서만 찬양할 수 있는 의존적인 영성이 된다는 말이다. 이런 모습은 구약에서나 볼 수 있는 속성이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시편 107:8)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할 때 저절로 찬양은 터져 나온다. 찬양은 하나님을 정확히 바라본 자가 저절로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찬양의 방법은 획일화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도 안 된다. 참새의 소리가 있고 부엉이의 소리가 있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에게 하나님은 다양할 찬양의 방법을 나름대로 허락하셨다. 교회마다 남녀노소가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는데 무턱대고 한 가지 찬양 분위기를 강요함으로써 무리수가 빚어진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나는 ‘하나님의 성품에 중독 되라’는 말을 즐겨한다. 술에 중독 된 사람은 항상 술을 향하여 끌리는 충동이 있다. 도박에 중독 된 사람은 인간적인 의지로는 그 유혹을 끊기가 어렵다. 마찬가지로 이 중독성을 선한 방법으로 적용하면 항상 하나님을 향하여 갈망하는 영적인 초점을 이루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유 없이 무턱대고 찬양하는 법은 없다. 찬양의 이유가 되는 중요한 두 가지 테마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성품이라는 주님의 존재적인 속성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능력이다. 하나님에게 매혹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하여 놀라운 감정을 품지 않고 어떻게 찬양할 수 있겠는가? 올림픽의 결승전에서 신기한 능력을 보이는 선수들에게 세계인들은 찬탄의 박수와 갈채를 아낌없이 보낸다. 그러나 날마다 태양을 띄워 올리시며 기묘하게 자연을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솜씨에는 그만큼 반응하지 않는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은 내 영혼이 찬양하네

이 찬양을 백 번 천 번 부르면 무엇 하는가? 이 넓은 우주 공간에 치밀하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솜씨에 진심으로 놀라지 않는 삶은 또 하나의 거짓말이다. 나는 찬양의 출력이 떨어짐을 감지할 때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임을 깊이 묵상한다. 구원자이신 하나님과 축복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출발점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높이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찬양의 대 원칙을 이렇게 다시 정리할 수 있다. 무엇을 찬양하는가?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이다. 누가 찬양하는가? 다름 아닌 바로 ‘내 영혼’이다. 성가대의 훈련된 음악에 타율적인 감동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치밀하게 행하신 많은 흔적들을 인하여 바로 내가 찬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찬양은 음악의 은사를 받은 일부 성도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마귀는 이렇게 보편적이어야 할 찬양의 특권을 일부 계층에 국한시키고 모든 성도들을 그 경기장에서 관객석으로 내보려는 의도를 암암리에 펼쳐왔다.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내 마음과 내 몸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의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미 당신에게 찬양을 드릴만한 충분한 은사는 주어져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연미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성악가보다 아무도 의식해 주지 않는 늙은 할머니 성도의 엉망진창 새벽 찬양이 하나님의 보좌에 더 강하게 상달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당신도 그런 경험을 분명히 해 보았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찬양, 하나님의 보좌를 진동하는 찬양은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8. 믿음으로 찬양하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42:5)

찬양을 드리는 동안에 우리는 위대한 역전 드라마를 만나게 된다. 어떤 악조건 하에서도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어떤 위협 속에서도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어떤 방해와 불확실함 앞에서도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그렇기 때문에 내가 찬송하리로다’보다 더 위대한 영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고백하는 믿음에 있다. 고통스러운 환경을 대하면서 잠시 낙망하며 불안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영적인 평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현실과 자신을 차단하고 인간적인 정서를 말살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태가 아니다. 마음의 번뇌를 거부하거나 초월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서를 거세함으로써 위장된 평안을 얻기도 하지만 그 빈집에 결국 더 많은 귀신이 몰려 들어오게 된다.
온전한 찬양은 하나님이 환경을 통하여 부어주시는 모든 정서를 과감히 직면하고 그 대지 위에 두 다리를 세우고 두 팔을 드는 것이다.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오히려’ 찬송하는 역전의 승부 기질이 새로운 성품으로 내면에 자리를 잡게 하라. 이렇게 결심한 영혼에겐 마귀가 틈을 탈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 홀로 무풍지대에 두지 않으시고 당신과 함께 폭풍 속으로 가기를 좋아하신다. 안락함과 나른함은 영혼을 성장하게 하지 못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원칙이다. 언제까지나 젖먹이에 머물러서는 성숙한 찬양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고난은 찬양을 숙성하게 만드는 항아리이다.

위에 기록한 말씀으로 돌아가자. 한가지 특기할만한 사실은 말씀을 기록한 사람이 자신을 객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너’라는 2인칭으로 대하고 있다. 나는 나에게 나이지 어떻게 너가 될 수 있는가? 찬양은 어떻게 노래를 부르느냐의 문제보다 나의 내면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와 질서를 유지하느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내면을 냉정하게 관찰할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을 굴복시켜 찬송하는 자리로 이끌어 낼 수가 없다.
기쁨과 감사가 찬양의 중요한 원자재라면 낙망과 불안은 찬양의 중요한 걸림돌이다. 현대인들이 보편적으로 걸린 정신병적인 증세가 있다면 ‘지나친 염려’를 꼽을 수 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보험과 다양한 자기 방어 시스템은 현대인의 우울한 불안을 웅변으로 대언 한다. 실제로 근심의 90% 이상은 실현될 가능성이 없거나 실현되어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들이라고 한다. 만일 내 손으로 어쩔 수 없는 염려의 부분만 하나님의 손에 맡기어도 우리는 획기적인 평안을 얻을 것이다.

찬송과 낙망은 한 집에 살지 못한다. 사람의 마음은 참 신기해서 동시에 두 가지 정서를 다루지 못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한 가지 정서에 충실하면 상대적인 것은 자연히 쇠퇴하게 된다. 태양을 바라보면 일시적으로 주변을 제대로 볼 수 없듯이 태양을 지으신 하나님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경배한 후에는 영적인 시각의 변화를 겪게 된다. 낙망과 불안이 찬양으로 반전하는 그 사이에는 하나님을 바라봄이 있다. 언제나 도우심이 되시는 그 얼굴은 어떤 분이신가?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시편 62:7)

이런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찬양의 에너지이다. 수시로 흔들리는 믿음이 아니라 언제나 견고한 믿음이어야 한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쪽은 항상 사람 편이다. 하나님은 동일하신 모습으로 늘 내 곁에 계신다. 찬양하는 마음은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음을 즐겁게 고백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며 또한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 되시는 주님! 아직도 충분한 위로가 되시며 도우심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에 찬양할만한 넉넉한 이유가 자신에게 선포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 하루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작은 배를 저어 호수 저 편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피곤하신 예수님은 고물을 베고 잠이 드시고 마침 광풍이 일어 호수가 미친 듯이 요동하매 제자들은 아우성을 치며 예수님을 깨웠다.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이 호수를 잔잔하게 하시고 제자들에게 엄히 물으셨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마치 물건을 어디에 두었느냐 라고 물으시는 것처럼 믿음의 소재를 질문하시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아무리 찬양을 힘차게 부르고 공교하게 연주한다고 해도 그 안에 믿음이 녹아들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은 기쁘게 열납하시지 않는다. 믿음은 내가 능동적으로 사용하여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믿음이 그런 것이 아니고 나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라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꾸중을 들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풍랑이 일어나는 호수와도 같다. 찬양을 드리는 동안 내 안에 있는 작은 배에서 예수님을 깨울 것이 아니라 잠자는 믿음을 깨워야한다. 찬양을 단순히 음악적인 행위로 생각한다면 능동적인 믿음의 적용이라는 묵직한 단어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주님은 항상 열매가 아니라 나무에 관심이 있으시다.

성도는 모두 찬양인도자들이다. 그 대상은 많은 회중이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자신이라는 한 영혼을 리드하여 높고 깊은 찬양의 세계로 인도하는 책임이 있다. 찬양은 낙망과 불안 속에서 더욱 빛난다. 저절로 찬양할만한 신나고 형통한 시간보다 도무지 찬양할 수도 없고 숨마저 탁탁 막히는 순간에 나 자신을 복종시켜 찬양케 하는 영혼은 진정한 승리자이다.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내 마음을 지성소의 향기로 가득하게 하는 일이 더욱 위대한 승리이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큰 평안이 있고 또한 장애물이 없다. 불신자들도 평안과 형통을 얻기 위하여 나름대로 애를 쓰지만 그들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이미 지옥의 문턱에 닿아 있다. 믿음은 찬양의 문제이며 찬양은 믿음의 문제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했던가? 우리 영혼은 본디 광활한 하늘에 적합하게 창조되었으나 스스로 선택한 불순종과 반항심으로 인하여 지옥에 가까이 추락한 존재가 되었다.
추락하는 것도 자신의 선택의 결과였으니 다시 비상하여 오르는 것도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믿음은 찬양의 날개를 파닥이게 하는 근육이다. 작은 날개로 대륙을 횡단하는 철새처럼 우리 영혼의 근육도 지치지 않는 힘을 길러야한다.

9. 결단하며 찬양하라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9:14)

찬양은 그 사람의 언어와 마음가짐에 밀접하게 연관을 이루고 있다. 진실한 찬양자는 찬양이 노래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입술의 언어와 그 언어의 출처가 되는 마음의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얽혀 있음을 잘 안다. 마음의 깊은 곳에 미움이나 원망 같은 쓴 뿌리를 간직한 채로 하나님을 찬양하려고 하면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이 찬양을 힘들게 한다. 찬양이 열리고 찬양이 닫히는 열쇠는 내 손에 쥐어져있다.
찬양은 범사의 열매이다. 아름다운 찬양을 드리고자 열망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삶이 그 기반이 되어야 한다. 찬양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미 전인적인 삶에서 균형 잡힌 성공을 동시에 추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에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모든 것을 지으시고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분에게 즐거운 존재가 되어드리기만 하면 그는 상상할 수 없는 보상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 보상이 찬양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찬양의 이유는 오직 찬양뿐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 말씀에 소극적으로 응답하는 사람은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열심히 노래하고 호흡을 충실히 사용하여 하나님을 위해 소리칠 것이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아닌 그 무엇도 찬양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동시에 실천하다.
찬양은 다분히 정치적인 측면이 있다. 정치는 자신의 신념과 노선이 분명해야 한다. 소속이 희미하면 정치에서는 박쥐의 대접을 받는다. 성도는 땅의 권세가 아니라 하늘의 권세에 자신의 삶을 의탁한 사람이다. 단호한 결단이 없는 찬양은 자신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시편에 보면 수도 없이 많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해 찬양을 결단하는 기록이 나온다. 그 위대한 찬양자들도 항상 찬양의 불꽃에 물을 끼 얻는 마귀의 총체적인 방해와 싸웠다. 순간마다 자신 안에 있는 찬양의 동기와 열정을 점검하지 않으면 얼마나 신속히 그 찬양의 용광로가 식어버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객관화하여 정밀하게 관찰하고 미세한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함으로써 성공적인 영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찬양을 통하여 대단히 효과적으로 자신의 영적인 상태와 정서적인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찬양과 함께 하나님과 조화를 이룬 샬롬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영적인 수퍼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자고 하는 자는 마귀에게 쉽게 잡힌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을 알고 순간마다 겸손이 자신이 실상을 하나님에게 토로하고 의존하는 사람은 결코 끝까지 넘어지지는 않는다.
찬양이 생활화하면 필연적으로 인격적인 변화가 도래한다. 본질이 변한다라기 보다는 자신의 실상에 대하여 민감해지고 나아가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순발력이 생긴다. 수 십 년 도를 닦아도 도달할 수 없는 평화에 한 순간에 다가서기도 한다.
건강한 찬양은 새 삶에 대한 열망을 동반한다. 하나님에게 제대로 찬양을 드리고 나면 하나님의 방법이 즐거워지고 내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에 기꺼이 동의하고 순종하고 싶은 생각이 솟구친다.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편 146:2)

찬양은 젊은 시절 한 때를 장식하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아니다. 찬양은 평생을 두고 도전하고 정복해야하는 거룩한 목표이다. 나이가 들어 목소리가 쇠하고 얼굴에서 황금빛 광채가 사라져도 찬양은 그 안에서 끝없이 샘솟아야한다. 생전에 찬양, 평생에 찬송은 주와 함께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위대한 복을 예약하는 지혜로운 선택이다.

마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 군중들은 질량불변의 법칙에 매이지 아니하시는 경제 대통령의 가능성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하고 그 분을 억지로 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모시려는 정치적인 움직임이 발생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 호수 저편으로 보내신다. 불순한 군중에게서 제자들을 격리하시려는 의도였으리라. 그러나 배를 저어 가는 제자들의 화제는 예수님의 기적과 그 기적이 낳은 정치적 출세의 기회에 집중되고 급기야는 서열다툼과 연관이 있는 불화의 조짐도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엄청난 풍랑은 제자들로 하여금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았고 그들은 가장 순수한 외침인 구원의 요청으로 바다에서 울부짖는다. 멀리서 이 모든 일을 보신 예수님은 물위를 걸으사 제자들에게 다가 오시고 그들의 배에 오르시면서 풍랑을 잠재우는 당신의 신성을 보이신다.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 수께 절하여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마 14:32-33)

저녁 무렵, 제자들과 군중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며 경제적 동기로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 밤중에 풍랑이 일고 헛된 야망의 거품이 사라지니 그들은 경배적인 동기로 예수님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찬양은 이런 것이다. 경제적인 동기에서 경배적인 동기로 자신의 내적 강령이 바뀌는 것이다.
풍요와 다산을 신으로 여기던 가나안의 풍습이 아직 현대인들의 패러다임을 지배하고 있다. 많아지는 것, 강해지는 것, 높아지는 것, 명성을 떨치는 것, 우월한 존재가 되는 것 등의 매혹적인 동기들이 성도의 삶에 교묘히 스며들어와 영적인 계기판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가? 찬양의 시작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세상을 세상으로 정확히 인식하는 단계에 있다. 오병이어의 흥분이 사라지고 죽음에서 다시 생명을 얻어 낮은 겸손을 회복하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제대로 보이고 나아가 그 분은 자신들의 야망에 이용당할 분이 아니라 비천한 우리가 그 분의 목적에 포함이 된 것만이 큰 기쁨이요 영광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 것이다.

절대음이 흔들리면 오케스트라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원점이 움직이면 지도가 부정확해지는 것처럼 찬양을 드리는 우리도 진동하지 않는 영적 표준을 결단하며 음표 하나 하나를 소중히 울려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시편 108:1)

게으르거나 무책임한 사람은 약속을 하지도 않고 또한 나눈 약속을 지키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장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소중한 약속을 즐거이 나누며 성실하게 그것을 실천한다. 찬양은 하나님과의 약속이다. 순간마다 하나님 편으로 마음을 정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에게 찬양할 수 있는 심령을 달라고 부탁하기보다는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겠노라고 주도적인 결심을 보여드린다.
교회에서 함께 찬양예배를 드리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은 찬양이 살고 죽는 것이 모두 성령님의 뜻인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대단히 많은 부분에서 찬양을 드리는 자의 마음과 결단이 성패의 열쇠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생각에서 상상이 오고 상상에서 충동이 오며 충동이 행동을 유발한다. 생각에서 온전히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나중의 단계에서는 더욱 힘이 들어진다. 마음을 하나님에게 고정하면 지렛대의 버팀목을 안쪽으로 밀어 넣은 것처럼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기 쉬워진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고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악인은 불변의 가치와 안정된 기준이 없다. 그들은 자신의 배가 신이요 감각이 율법일 뿐이다.

평소의 일상 생활에서 영적이지 못하면 찬양을 드리는 순간에 갑자기 영적이 될 수 없다. 언제나 나의 언어와 묵상을 감찰하시고 기록하시는 분이 하늘에 계심을 인식하면 그는 예배와 일상의 벽을 허물고 찬미의 강물이 흐르는 생애를 창조할 수 있다.
찬양은 결단을 낳아야 한다. 그렇지 못한 찬양은 무정란 찬양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욱 아름답고 가치 있고 밀도 있는 삶을 살고 싶은 충동이 파도치지 않는 마음의 바다에는 아무리 멋진 음악의 범선을 띄워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약점과 결점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이다. 찬양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철저히 해부되는 순간에 그 환부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치유하여 주시기를 간구 하라.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이 가까이 느껴지는 순간에 응답이 역사 하는 힘이 가장 강하다. 찬양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이 달라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반응하는 내가 변화되기 때문이다.

10. 권세 있게 찬양하라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하려 하심이니이다“ (시편 8:2)

마귀를 무장 해제시키고 그 울부짖는 아가리를 결박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찬양에 있다. 현대인들은 찬양의 능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 믿음으로 노래하는 순간에 보이지 않는 마귀의 군대가 지리멸렬한다고 말해보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도 경험하기 위하여 겸손히 노력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찬양의 소중한 본질을 위협하는 두 가지의 위험이 있다. 한 편에서는 찬양의 능력을 무시하고 한 편에서는 찬양을 영적인 오락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성도의 삶은 결국 영적인 전쟁의 연속이며 그 전쟁은 찬양이라는 영적인 무기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하느냐 따라서 결과가 판가름난다.
나는 찬양 간증 사역으로 초청을 받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교회를 방문해 보았다. 각 교회마다 나름대로 형성된 찬양의 색깔이 있고 문화가 발견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에서 찬양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권능을 마음껏 누리고 발휘하는 곳은 그리 보지 못했다. 일단 찬양에 대하여 기대감조차 없는 것을 보면서 과연 그들이 찬양을 드리고 있는 동기와 열기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고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본 적이 대부분이다.
21세기의 목회는 찬양을 떠나서 결코 생각할 수 없다. 교회 지도자라면 누구나 예배 갱신의 당위성과 긴박성에 동의할 것이다. 교회가 모여지는 기본적인 이유인 예배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그 공동체는 결속되고 전진할 수 있는 힘의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현대인들은 강렬한 경험을 원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노래하는 대로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세상이 줄 수도 없는 그 무엇’이 하수와 강물처럼 넘치는 곳으로 교회는 변화하고 열려야 한다. 그럴 수 있도록 결정적인 매개체가 될 수 있는 놀라운 변수가 찬양에 있다. 찬양을 통하여 성도에게 주어진 위대한 자유와 특권을 아주 쉽게 깨닫고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사실, 현대 성도들은 신앙이 허락하는 권능과 특권의 범위를 잘 모르고 있다. 믿음을 향한 그들의 기대치는 하나님의 허락치에 비하여 대단히 낮은 수준이다. 유명한 예화대로 호화 여객선의 티켓에 여행하는 동안 누릴 수 있는 모든 식사와 서비스의 가격이 포함되어 있는데 어리석은 승객은 그것도 모르고 갑판에 외로이 서서 마른 식빵을 씹는 격이다.

찬양은 암행어사의 마패와도 같다. 우리를 통쾌하게 하는 영원한 테마인 춘향전의 압권은 역시 절개를 지키며 고난을 당하는 춘향이 앞에 임금의 이름이 그 권세를 보장하는 마패를 앞세워 이 도령이 들이닥치는 장면이다. 마패는 모든 사람들이, 특히 탐관오리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높이 들어 내세우는 것이다. 감추어진 마패는 산천초목을 떨게 하지 못한다. 찬양은 감추고 묻어두어도 저절로 돌아가는 자동기계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가동하고 행사해야 마땅한 권세이며 능력이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시편 40:3)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미할 때, 빌립보 감옥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옥터에 지진이 나서 흔들리고 모든 문이 맥없이 열려지고 죄수들을 매고 있던 착고들이 다 벗어졌던 것이다. 그 광경을 목도한 간수는 스스로 자결하려고 했다. 그 당시, 죄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탈옥하게 만든 간수는 대신 죽임을 당하는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찬양의 결과로 빚어진 현상 때문에 군인과 그의 가족들이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찬양의 결과는 영적인 해방이다. 찬양하는 자나 찬양을 듣고 보는 자나 다 기적의 파도에 휩쓸린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힘들고 답답한 일이 생기면 찬양하라. 찬양은 당신을 결박하는 세력에게서 무장을 해제시키고 더 이상을 당신을 억누르지 못하게 하는 힘을 발산한다.
쉽게 무너지는 의지와 제멋대로 요동치는 감정을 향해서도 찬양으로 명령하라. 나의 경험에 의하면 찬양을 드리는 즉시 내적인 질서가 회복되고 반복적으로 찬양하여 그 찬양으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반응하는 새로운 내적 시스템이 형성되기까지만 인내하면 그 후에는 사람이 달라진다.
물론 찬양을 드릴 때는 용사와 같다가 찬양을 멈추는 즉시 예전의 방어와 억압에 쉽사리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회중 찬양을 할 때는 모두가 열광적이다가도 막상 삶에서는 그 열기가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아빠와 함께 걸어가는 아들은 자기 반의 아무리 힘센 친구도 겁나지 않는다. 그 아빠의 보호권 안에서는 찬하무적의 당당함이 꼬마에게 있다. 우리도 찬양을 드릴 때는 영으로 떵떵거리며 노래하자. 나의 찬양의 목적이 되시는 분, 나의 찬양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 나의 찬양의 열매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분이 만군의 여호와가 아니신가?
찬양은 육체적인 치유가 가능하게 만드는 촉매제이며 심령의 쓴 뿌리를 쑥 잡아 뽑아주는 아귀힘이 강한 오른팔이다.

영으로 깨어있는 성도에겐 마귀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시대이다. 찬양이 살아나면 경직되었던 믿음과 소망과 사랑도 활동적인 모습으로 변한다. 근육과 힘줄에 아무런 이상이 없어도 신경선이 굳으면 전신 마비 환자가 되듯이 찬양은 신앙이라는 몸에 신경선에 해당되어서 모든 기관을 최고의 상태로 움직이게 하는 민감한 기능을 담당한다.
결코 찬양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 찬양이 신앙의 전부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찬양은 신앙의 전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고구려 벽화에 말을 달리며 활시위를 당시는 무사의 용맹스러운 그림을 본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달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달리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목표물을 발견하고 움직이는 상태에서도 온 마음으로 정조준을 유지한다. 우리도 이에 그런 모습으로 찬양을 드리자. 얼마나 멋진 곡을 얼마나 느낌 있고 신나게 불렀는가에 집착하지 말고 찬양을 몰아 하나님을 향하여 질주하는 중에도 내적인 회복과 외적인 승리와 지속적인 성장과 풍성한 열매를 생각하자.
찬양 속에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엄청난 그 무엇이 들어 있다. 찬양은 놀이공원의 자유이용권이다. 당신이 열망하고 침노하는 만큼 그 가능성과 비경을 열어줄 것이다. 자유이용권을 입장권 정도로만 사용하는 사람은 손해보는 사람이다. 자유이용권에는 모든 것에 대한 무한한 권리가 보장되어 있다.


지금까지 ‘찬양의 십계명’이라는 주제로 함께 많은 생각을 나누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찬양을 단순한 음악적인 행위로 생각하면 그것은 결정적인 이적 행위가 되고 만다. 이적 행위란 글자 그대로 적에게 이로운 행위이며 아군에게 해로운 행위이다. 우리의 영적인 적은 사단과 마귀들이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공간에서 정해진 노래들을 정해진 방법으로 부르고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의 주어진 책임량을 완수했다는 위안을 스스로 하는 동안 우리의 적들은 기가 막힌 계략으로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에 자범죄의 시한 폭탄을 장치하고 고범죄의 지뢰를 매설하며 영적인 전투력을 무력화시킬 수도 있는 부비트랩을 마음대로 장치하고 돌아다닐 것이다.
음악은 하나님을 향하여 드려지는 찬양의 필요 조건일수는 있지만 충분 조건일 수는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신명나는 노래 잔치가 아니다. 정서가 울림통이 되고 의지가 비파 줄이 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즐거워하는 영적인 가치관이 악보가 되어 한 박자의 쉼표도 허락하지 않고 줄기차게 주님께로 울려 드리는 영혼과 삶의 조화로운 콘서트이다.
찬양이 성품과 하나로 녹아지면 애쓰지 않아도 종일토록 하나님에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자신을 새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소리내어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내 영혼 깊은 그 곳에서는 찬란한 영광의 선율이 자유롭게 천사와 화답하며 울려 퍼지게 된다.
천국에 가면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하며 그 존전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그 하나뿐인 영원히 할 일을 지금부터 체질이 되게 하며 습관으로 정착되게 하라. 찬양이야말로 정말 좋아서 하는 가장 즐거운 일이 되게 하라. 죄로 인하여 일그러진 우리의 본성은 자연인의 상태에서는 찬양이 불가능하도록 구조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찬양의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쉴 수 없는 새로운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 현재,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생활의 표준으로 비추어 본다면 이런 미지의 영적 싸움을 반드시 시작할 필요가 있는가 의아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선택은 없다. 생명을 유지할 생각이라면 호흡이 선택 사항일 수 없는 것처럼 찬양은 영적인 존재들의 필수 불가결한 능력이며 기본적인 생명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