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의 십계명 / 김민식
아무리 평범한 광경도 시인이 보면 시가 나오고 화가가 보면 그림이 나오고 작곡가가 보면 노래가 나온다. 하나님이 우주적인 사랑을 총동원하여 당신에게 허락하신 소중한 일상을 살아가면서 당신의 입술에서 살아있는 감탄사가 메말라있다는 것은 영적인 종합검진 결과가 나온 것처럼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인간에게 이토록 다채로운 감각통로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가. 사단은 그 소중한 감각의 길을 통하여 모든 악취 나고 더러운 오물을 쏟아 붓고 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전도서 11:9) |
비단 이 청춘의 의미는 육체적인 젊은이들만을 말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일반적인 경향처럼 자신을 젊어 보이게 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어리석은 군상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시간의 성숙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창조하려고 사단의 사주를 받아 몸부림을 치는 기괴한 영혼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죄와 죽음이 해결되지 않는 한, 다윗이 말한 구원의 즐거움을 소유하지 못하는 한, 인간은 채워지지 않는 목마른 잔에 모래를 퍼담으며 그렇게 뒤엉켜 구르다가 그렇게 지옥불에 던져질 것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시편 19:1-6) 다윗은 메마른 언덕에 서서 하늘과 대 자연을 우러러보며 이렇게 놀라운 시편을 자아냈다. 다윗은 그 흔한 졸업장도 학위증도 없었다. 다만 그는 하나님과 대화 전문가, 자연이 주는 지혜 전문가로 잘 자라고 있었다. 우리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작은 공간과 시간에 하나님을 감금하고 그 나머지 영역을 계산된 자유로 채우지만 다윗은 자신의 전존재에 즐거이 하나님을 영접하고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잘 조율된 악기로 삼아 항상 하나님에게 자신을 연주하여 드렸다. 다윗의 눈에 대자연과 우주와 그 안에 가득한 질서가 기가 막힌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일사불란했으며 어떤 불만의 시간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부인할 수 없었다. 양치는 자에겐 모든 것이 열악한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 세상 누구도 표현한 적이 없는 풍요로움의 시를 노래한 그 비밀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승리의 비결이다. 태양의 온기에서 숨은 자가 없듯이 하나님이 뿌리시는 은총의 햇빛에서 숨을 자가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과연 찬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회중과 함께 힘차게 찬양하면서, 때로는 혼자소리로 조용히 읖조리면서 음표 하나 하나마다 영적인 추억이 새겨진 노래들을 부르는 동안에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주의 거룩하심 생각할 때 |
무심코 생각 없이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이 노래 속에 찬양의 위대한 기본 태도가 암시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편 기자는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라고 말했는데 나 역시 찬양 속에서 찬양의 놀라운 원리와 비밀을 자주 만나게 된다. 찬양을 작사하고 작곡하는 사람들은 그 어떤 영적 행위보다 더욱 고감도의 영감에 붙들리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감각과 은사를 가진 작가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부르고 불러도 계속 은혜가 샘솟는 생명력있는 노래를 만들 수 있다. 마치 맑은 물이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처럼 잘 만들어진 한 곡의 찬양곡은 엄청난 힘과 풍부한 수원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 우리 함께 위에 기록된 가사 중에 숨기워진 찬양의 원리를 탐색해 보자. 숨겨진 그림을 찾는 어린아이처럼 작은 흥분과 호기심을 품어도 좋을 것이다. 첫째, 찬양할 때는 ‘주의 거룩하심을 생각하라’ 둘째, 찬양할 때는 ‘주의 크신 사랑을 느껴라’ 셋째, 찬양할 때는 ‘주의 주신 기쁨을 맛 보라’ 넷째, 찬양할 때는 ‘주의 사랑 속에 잠겨라’ 사랑하는 연인이 다정히 데이트를 할 때, 그들은 정해진 시간을 의무감에 사로잡혀 억지로 때우는 식으로 함께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흐르는 시간을 아쉬워 하며 마치 그의 전 인생이 그 한 순간을 위하여 준비해 온 것처럼 정성을 다해 서로를 느끼며 누린다. 연애하는 시간은 결코 생산적이지 않지만 그 시간에 사로 잡힌 두 사람은 그 비효율적인 낭비를 황홀해하며 서로의 숨소리 하나도 놓치려 하지 않는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4:8) |
한 교회의 찬양이 살아난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 속한 모든 영혼들이 집단적으로 하나님에게 민감성을 회복하고 영육 간에 주님을 향한 새로운 태도와 습관을 형성하며 그 놀라운 하늘의 감동으로 범사가 지배된다는 것이다. 그런 교인들로 가득한 교회는 부흥하고 신바람이 날 수밖에 없다. 나는 “ - - - 할 수밖에 없다”는 표현을 좋아한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다. 제공된 원인은 예정된 열매를 맺을 뿐이다. 이것이 찬양의 대 원칙이다. 생각하고, 느끼고, 맛보고, 잠기는 능동적인 태도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자연스럽게 그러나 억제할 수 없이 바치는 정서적인 선물이며 사랑의 예물이다. 찬양을 통하여 축복의 원인을 제공하라. 승리의 조건을 구축하라.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들고 내려온 두 개의 돌 판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무런 갈등이나 망설임이 없이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순종하기에 합당한 열 가지의 계명들이 새겨져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복스러운 사명인 ‘찬양하는 일’과 ‘찬양케 하는 일’은 나에게 사명이자 직업인 동시에 즐거움이며 끝없는 훈련이다. 그리고 찬양하는 일은 나의 성품을 바꾸었고 내 안에 정말 실감되는 시편 23 번지의 초장과 시내를 만나게 해 주었다. 남들은 찬양을 성도의 의무로 거북하게 챙기는 동안에 나는 찬양을 성도의 위대한 특권으로 누려왔다.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여기는 그만큼의 존재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조금 바꾸어 사용해 보면 이렇게 될 것이다. 일단 이 장에서 나는 찬양을 음악적인 대상으로 보지 않으려고 한다. 찬양을 음악적인 대상으로 보는 순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음악적인 한계와 열등감에 시달리게 되고 나아가 찬양의 한계와 열등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찬양은 음악적인 문제가 결코 아님을 나는 많은 현장의 경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다. 오늘도 수많은 음치들이 천군 천사들과 화답하며 찬송 생활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음악적인 능력을 내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의 제단에서 중심을 불태워 드리는 위대한 찬송의 사람들을 나는 경외심을 품고 상상해 본다. |
1. 기뻐하며 찬양하라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 하니이다“ (시편 4:7) 찬양이 제품이라면 그 원자재는 기쁨이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을 세상적인 소유인 곡식과 포도주보다 더욱 소중히 여기고 실감하는 기본 능력이 없이는 진정한 찬양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세상적인 사람에겐 성경적인 기쁨이란 있을 수 없다. 그들이 자랑하는 기쁨은 마치 모조 다이아몬드처럼 외양은 비슷하지만 본질은 싸구려일 뿐이다. 당신이 진정으로 찬양의 위대한 비경을 탐험하기 원한다면 먼저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에 대하여 진심으로 동의하고 지적으로 인식하고 가슴으로 인정을 하라. 다시 말하거니와 이 첫 번째 계단을 통과하지 않고는 결코 다음 계단으로 나아 갈 수 없다. 정직하게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당신은 주님 앞에서보다 세상 속에서 더 즐거워하지는 않는가? 만일 당신의 신앙 생활 중, 이런 측면에서 정리되지 못한 자신의 충동이나 습관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다면 찬양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영적 생활의 균형과 성장을 위해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
우리는 실패하게 만드는 것은 커 보이는 문제들이 아니다. 무시해도 좋아 보일 만큼 작은 문제들이 우리를 넘어지게 만든다. 대부분의 성도들의 고민은 성장하지 않는 믿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도리어 나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신앙이 성장하여 나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나도 알지 못하는 나의 깊은 곳에서는 신앙 성장 억제 작전이 극비리에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을 최우선으로 인정하고 실제적으로 추구하는 내적인 시스템이 없다면 아직 그 사람은 광야 길을 더 걸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십 년이나 광야에서 혹독하게 훈련하신 이유는 애굽에서 찌들어 나온 그 노예 근성들을 바꾸어 가나안의 패역한 문화를 정복할 수 있는 믿음과 순종의 용사들로 회복하시기 위한 시간들이었다. 마치 소금에 찌든 자반 고등어를 다 펄떡이는 싱싱한 고등어로 회복시켜 망망한 바다에 풀어놓으시기 위함처럼 하나님은 찬양이라는 무공해의 흐름 속에 우리를 잠기게 하신다. 찬송가 204장 3절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두 번째 줄의 내용은 찬양이 지향하는 가장 높은 정상이다. 세상과 나는 감각되지 않고 하나님을 감각하는 역동성으로 가득한 심령은 그 모습 그대로 하늘의 축제와 일치한다. 마귀는 성도를 넘어뜨리기 전에 그로 하여금 자신에게 과민하게 만든다. 자기 과민은 이미 넘어짐이며 영원한 실패이다. 창세기 3장의 아담과 이브의 범죄도 결국 자기 과민이며 교만과 불 신앙과 반항의 산물이다. 시편 4편 7절에서 곡식은 배부름의 문제이며 포도주는 취함의 문제이다. 영적인 우리들도 배부름과 취함이 필요하다. 취함이 없는 배부름은 비문화적이며 배부름이 없는 취함은 독선과 아집과 실속 없는 자기 변명으로 치우칠 뿐이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모든 배부름과 모든 취함의 완전한 충족이며 만족이다. |
2. 감사하며 찬양하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시편 118:28) 찬양은 나의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지 남의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신이 자신을 인간들에게 기꺼이 소유시킨 적이 있는가? 나의 부처님, 나의 알라신, 나의 삼신할매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러야 제 맛이다. ‘나의’와 ‘하나님’이라는 두 단어가 만날 때 그 곳에는 신앙과 신학의 진수가 배어 나온다.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면서 마음에 안심과 용기와 희망이 솟는다면 당신은 이미 찬양의 기초 체력이 다져진 사람이다. 언제라도 이렇게 주님을 조용히 속삭여 부르는 것만으로도 당면한 시험과 환난으로부터 자신을 신비롭게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까지 영혼을 훈련하라. |
우리들이 익히 알고 다 즐겨 부르는 작은 소품 찬양 곡 중에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곡이 있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대개는 이 노래를 가볍고 중요하지 않은 곡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나는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신 좋으심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은 찬양의 가장 중요한 기본이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지만 보라!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그들을 치러 온 자들을 자멸시키시는 기적을 일으키신다. 이 장면은 방송국의 스튜디오를 연상시킨다. 프로그램의 최고 책임자인 PD는 주조정실에 앉아 있으므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현장에는 PD를 대신하는 AD가 뛰어 다니며 PD의 뜻을 그대로 전하고 시행한다. 하늘의 왕께서 손을 드시니 유대 백성은 ‘큐!’를 외쳤고 하나님은 당신의 완전하신 사랑과 구원을 시행하셨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즉시 ‘좋으신 하나님’을 조용히 불러라. 한 절을 부르는데 25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4절까지 부르는데 2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순간의 짧은 투자는 하나님의 복병을 일으키고 당신의 하루의 영적인 그리고 육적인 싸움을 당신에게 속한 싸움에서 하나님에게 속한 싸움으로 전환시킬 것이다. |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시편 50:23)
이 말씀에 의지해 본다면 제사의 원자재는 감사라는 결론이 나온다. 마음이 빠진 제사를 하나님은 얼마나 혐오하셨는지 모른다. 지금 수 만 개의 교회에서 천 만 명이 넘는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는 동안 하나님의 구원을 볼만한 영적 제사는 얼마나 될 것인가? 하나님은 부피를 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정도를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너무나 크신 하나님에게 인간이 드리는 부피는 이미 무의미하다.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과부의 동전을 귀히 여기신 예수님 앞에 우리의 찬양과 예배는 어떤 저울로 측량이 될 것인가? |
3. 쉬지 말고 찬양하라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편 68:17) 만일 하나님이 월,수,금은 우리의 짐을 지시고 화,목,토는 우리를 도우시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은 쉽게도 파업하고 직무를 유기 하지만 하나님이 하루만 파업을 하신다면 우주는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고 우주의 질서와 만민의 생명도 하루아침에 끝장이 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쉬지 말고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 시간도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분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님이시다. 듣는 사람을 녹이고 울리는 찬양을 부르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 찬양이 삶에 녹아들어 범사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일이다. 쉬지 말고 찬양하려면 찬양이 그 성품 안에 스며들어야 한다. 지금부터 찬양해야지라고 생각하고 주섬주섬 찬양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내 안에서는 찬양마당이 후끈하게 달아오르고 있어야 한다. 쉬지 말고 찬양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순간마다 감미로운 주의 임재를 누릴 것임이요. 사랑 때문에 신분도 재산도 생명도 거는 것이 인간인데 가장 아름다우신 하나님, 다윗이 시편 8편 1절에서 고백한대로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외칠 수밖에 없을 만큼 아름다운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우리들은 얼마나 한결같은 흐름으로 하나님에게 쏟아져 들어가야 하는가?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편 118:24)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짐을 지신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위하여 날마다 찬송의 짐을 져야한다. |
4. 신령으로 찬양하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0)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와 간음한 뒤에 심각한 영적 장애를 겪게 된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온 우주를 두리번거리면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를 외치며 하나님과 단절을 괴로워하신 것처럼 그는 범죄의 결과가 찬송의 막힘으로 나타나는 것을 체험하며 경악하게 되었다.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이 없이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처럼 영적인 청결이 선행되지 않고는 찬양에 관한 한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영으로 감각할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다윗은 찬양의 기교나 방법에서도 세계최고임에 틀림이 없는 사람이다. 그가 수금을 타면 얼마나 영적인 감동이 넘치는지 악신이 도망갈 정도로 치유력도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하나님에게 죄악을 고백하며 찬양의 회복을 갈망하고 있다. 영혼이 정직한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신비로운 유쾌함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 자유로움을 누리며 창공을 날개 짓 하는 영적인 비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영혼의 위대함이 아니라 영혼의 정직함이다. 백 만 개의 정밀한 첨단 부품을 자랑하는 우주선도 부속품 중에 하나만 잘못되면 큰 사고가 나듯이 우주선보다 더 정교한 우리 영혼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조화를 이룬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이 자리를 잡을 때 동시에 우주적인 찬양의 오케스트라도 우리 내면의 마당에 자리를 잡게 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시편 33:1) 그런데 정한 마음의 창조와 정직한 영의 새롭게 함은 내 권한 밖의 일이다.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찬송을 드리기 전에 죄악과 교만한 충동성에 물든 나의 중심을 정직으로 가득하게 채워야 하는데 인간이 교양과 철학과 노력은 아무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직 신령에 의지할 때에만 내 안에 정직이 주어지고 그 정직의 마땅한 결과인 찬양이 자유롭게 발산되어 진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우물가 여인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신약 시대는 구약과 달라서 예배가 공간과 방법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고집하는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인들이 고집하는 그리심 산의 경쟁이 무의미해지고 예수님은 언제나 어느 때나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라고 강조하셨다. 예배와 찬양의 의미는 거의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단어를 구분해서 보는 것은 오히려 성경의 요구를 헷갈리게 한다. 위의 말씀에서 ‘예배’ 대신에 ‘찬양’을 넣어도 결코 의미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
“아버지께 참으로 찬양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찬양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라“
‘하나님이 찾는 자’는 ‘하나님을 찾는 자’이다. 서로가 찾고 있을 때에만 서로의 시선이 마주 칠 수 있다. 성경은 온통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찾으시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이야기로 가득해야 한다. |
5. 진정으로 찬양하라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시편 147:1) 위에서 우리는 신령에 의지하여 찬양하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령과 더불어 진정으로 찬양함은 못지 않게 중요하다. 신령이 사우나탕의 뜨거움이라면 진정은 차가운 탕에 해당한다. 차가움은 냉정함이다. 우리의 찬양에 냉정함의 요소가 필요하다는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이 차가움은 뜨거움이 식어버린 결과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뜨거움이 사라지고 더 이상 나를 이끌어갈 에너지가 고갈되는 순간에 진리에 입각하여 자신에게 또 다른 의미의 분발을 요구하는 것이다. 찬양에는 이런 양대 측면이 항상 상존 한다. 도무지 찬양할 기분이 내키지 않는 순간에도 자신에게 찬양할 것을 엄숙히 선포할 수 있는 내적인 카리스마를 가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기분대로만 살았다면 큰 위험이나 손실을 겪었을 수도 있다. 기분에 끌리면 충동적이 되며 충동적인 선택은 언제나 후회를 낳는다. 우리는 오랜 교육과 경험에 의하여 뜨거움과 차가움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 알고 있다. 인간은 자기 말만 듣는 동물이다. 아무리 인도자가 열정적으로 찬양을 이끌어 가도 자신이 자신에게 찬양할 것을 명령하지 않으면 입술이 열리지 않는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이 잘 아는 노래의 가사를 잘 보라. 가벼운 청유형인 ‘찬양할래?’도 아니고 미지근한 설득형인 ‘찬양하지’도 아닌 단호한 명령형인 ‘찬양하라’이다. 이 세상에는 자신에게 아무 것도 명령하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들이 너무나 많다. 언제나 감정이 의지를 이기는 인간형은 충동적이고 변명이 많으며 무책임하다.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귓가에서 속삭이는 마귀의 달콤한 속임수에 넘어가 선악과에게 손을 뻗치는 아담과 이브의 마음의 상태와 흡사하다. 감정이 달리는 말이라면 의지는 그 말 등에 올라앉은 기수와도 같다.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제 갈 길로 가는 교만과는 다른 말이다. |
찬양은 마음이 고도로 하나님에게 순종되어진 상태인데 그 상태를 창조하거나 지속하기 위해서는 음악적인 작업과 함께 내면에 또 다른 긴장이 요구된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악보와 함께 지휘자를 동시에 주목해야 하는 원리와 동일하다. 한 쪽에만 몰두하다가는 전체적인 하모니에서 이탈하게 된다. 찬양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성경 제일의 찬송 책인 시편의 시작이 ‘복 있는 사람’으로 시작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인간적인 즐거움과 영적인 즐거움을 분리하여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교회에서는 찬양하는 즐거움으로 살지만 세상에 돌아오면 또 다른 무엇을 거리낌없이 추구한다. 이런 이원론적인 사고가 찬양의 흐름을 끊고 감사와 기쁨의 영적인 맥박을 약하게 만든다.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혀가 주의 의를 말하는 것과 나의 입술이 주를 찬송하는 것은 동시적인 사건이다. 마치 발라드 대중 음악을 좋아하는 감상주의 팬처럼 하나님을 연인으로 설정하고 감각에 치우친 음악을 통해 그런 유사한 감정에 깊이 빠지게 되면 성경적인 찬양의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상업성을 지나치게 의식한 기독교 음반들이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그런 현상을 만들 수도 있다. 성경은 읽기 싫은데 찬양은 부르고 싶은 기현상이 나타나면 결과는 심각해 질 수 있다. 남녀가 만나서 즐기는 것은 좋은데 서로에 관해서는 이름조차 알고 싶어하지 않는 저속한 세태의 연장으로 느껴져서 나는 그런 현상이 두렵기까지 하다. 마귀가 역사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마귀가 역사하기 수월한 상황을 우리가 자초하는 격이라고는 말할 수는 있다. 찬양하는 일이 은사요 사명인 나에게도 찬양의 정서적인 기반이 흔들리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런 때에는 조용히 성경을 펼치거나 말씀을 암송하면서 나 자신에게 찬양을 명령한다. 그러면 대개의 경우에는 아무리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즉시 평강을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내적인 교제를 지속할 수 있게 된다. 이 소중한 능력에서 나의 행복의 대부분은 생산된다. |
6. 사모하며 찬양하라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성도는 고난을 먹고 성장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자동적으로 쾌락과 평안을 추구하지만 인간의 그런 본성을 따라가서는 결코 성장도 성숙도 할 수 없다. 성경은 인간의 반항과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교훈적 기록이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열왕들의 기록은 절대로 예외가 없는 과학적인 공식을 보여주는 것처럼 순종과 축복, 불순종과 저주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 ‘그 지경’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저 지경’을 통하여 신앙이 성숙한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망가진 상황을 보고 우리는 ‘저 지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원치 않는 고난은 항상 놀라운 선물을 남기고 떠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끔 맞이하는 ‘이 지경’은 믿음의 눈으로 보면 진실한 찬양을 회복하는 위대한 기회가 된다.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메이듯이 목마름이란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고통이다. 갖가지 고통 중에 목마름은 가장 강한 강도로 인간을 괴롭힌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면서 얼마나 목이 마르셨을까? 바짝 바짝 타 들어가는 갈라진 입술을 열어 예수님은 끝까지 물을 찾으시지 않으시고 아버지를 찾았다. 십자가상의 목마름은 가장 위대한 찬양의 모습이시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 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편 14:2-3) 사랑하면 서로를 찾게 되어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없는 것은 그 뿌리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토양이 없는 까닭이다. 당신은 주님을 생각하거나 예배드림이 진심으로 소중하고 즐거운가? 두 연인이 주중에 그리워하지 않고 주말에 만나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 두 사람의 사이에는 산뜻한 관심과 흥분보다는 나른한 타성이 작용하는 탓이다. 예수님과 나 사이는 어쩌면 아주 오래된 연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므로 싱그러운 긴장은 다 사라지고 의무감과 계산만이 작용하는 관계가 될 가능성도 많이 있다. 찬양을 드릴 때, 몸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향한 나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전통이 오래거나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오랜 유교 문화는 표정을 감추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다. 아무리 기뻐도 그 기쁨을 안으로만 삭이고 아무리 괴로워도 짐짓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젊잖을 빼는 것이 양반의 자세였다. 그러나 찬양은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되기를 요구한다. 어린아이는 감정과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감정과 표정을 조작하면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다. 어린아이가 어른스러워지면 우리는 성숙하다고 칭찬을 하지만 그런 식으로 감정으로 내면에서 조작하는 습관이 들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모습을 보여 드리기가 어려워진다. |
광야에서 불뱀이 이스라엘 민족을 물고 다니며 무수히 죽게 할 때에도 장대에 높이 매달린 놋뱀을 바라보면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찬양이라는 새로운 전망대에서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선명히 바라보는 그 행위 자체는 엄청난 치유력과 회복력을 내포한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시편 62:1) 세상에서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거나 얻을 수 없다. 반드시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자신의 문제에 대하여 스스로 아무 것도 지불할 것이 없는 존재임을 먼저 알게 한다. 우리는 죄와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소유나 힘으로 소정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신 하나님을 잠잠히, 결코 소란스럽지 않게 우러러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하기 전에는 잘나가던 사울도 평안하지가 못했다. 그는 과격한 열정으로 자신을 난폭하게 운행하며 인생의 길을 과속으로 질주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는 한 순간에 세상과 자신에 대하여 눈멀어버리고 예수님과 진리에 눈을 뜨게 되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인 바울로 거듭나게 된다. 찬양은 어떤 면에서 나를 시끄럽게 하는 과정이 아니라 나를 잠잠하게 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목소리가 크게 울리고 회중의 뜨거운 율동과 연주가 공간을 달구어도 찬양하는 자의 내면에서는 모든 파도가 잠자고 마귀의 울부짖음이 저 견고한 방탄 유리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경험이 찬양이다. 안에서 솟는 감동과 외부에서 강요된 흥분은 철저히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우리는 죽은 듯이 잠잠해야 한다. 찬양을 통하여 숨막히는 절정감을 맛보게 될 때에도 그런 느낌에 빠져드는 자신을 주목하지 말고 애써서 그 찬양의 목적이신 분에게 계속 나아가야 한다.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시편 143:6) 나는 어렸을 적에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가뭄에 쩍쩍 갈라진 논바닥을 본 경험이 있다. 이 구절을 보면 항상 그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경험한 어떤 토지의 모습보다 한국의 논바닥은 더욱 영혼의 갈증을 잘 드러내준다. 이 메마른 땅을 촉촉하게 적시고 생명이 사라진 공간에 새롭게 푸른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그 분은 그런 분이시기에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도 하다. 죽도록 목이 마른 사람의 생각에는 오직 물밖에 없을 것이다. 누가 물을 기억하라고 말하기 전에 그는 물이 주는 모든 감각을 오감을 총동원하여 그리워할 것이다. 찬양은 하나님을 마른땅같이 사모하는 아름다운 고통을 즐거이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이 영적인 갈증은 우리를 살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목마르지 않으면 즉시 세상을 향하여 목이 마르게 된다. 세상이 주는 물은 완전한 해갈을 약속하지 못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3-14) 찬양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는 사람과 전혀 다른 고통관을 가지고 산다. 모든 내적인 질서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균형을 유지할 때 그는 아무 것도 고통이 아니고 다 찬양의 온기와 진동으로 녹아짐으로써 새로운 축복으로 조형되는 것을 믿는다.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마른땅같이 주를 사모하는 것은 어떤 좋은 결과를 위한 힘겨운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지고의 기쁨이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다. 영혼의 상태가 여기까지 이르면 마귀와 세상은 그 성도의 영혼을 찬양할 수 없는 상태로 결박할 수 없다. 병상에서, 감옥에서, 전쟁터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그의 두려움과 곤고함은 그의 영혼을 더욱 찬미케 하는 자극제가 될 뿐이다. |
7. 기억하며 찬양하라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시편 28:7) 대부분의 경우에 성도들이 찬양하는 이유는 앞으로 역사 하실 하나님에게 은혜와 축복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부르게 된다. 부흥회에 모여서 찬양하는 이유는 그 날, 놀랍도록 임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는 것이며 각종 찬양 모임에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이유는 이제 이 시간과 공간에 역사 하실 하나님의 황홀한 임재를 기다리는 것이다. 둘째는,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
이렇게 ‘하나님이 내게 어떤 분이신가?’와 그런 하나님이 ‘내게 어떻게 하셨는가?’를 깨달으면 이제 이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보일 수 있는 원인을 제공받게 된다. 세 번 째,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기쁨과 찬양은 늘 함께 다니는 파트너이다. 기쁨 없는 찬양과 찬양 없는 기쁨은 모조품이다. 이 문장은 능동적인 의지를 내포한다. 누가 시키거나 강요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뻐하며 찬송한다는 결심이다. 아무리 유능한 조직과 장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성도 하나 하나가 하나님께 기뻐하며 찬송할 내적인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젖은 장작을 태우는 것처럼 힘이 든다. 선교단이나 인도자는 한 성도와 하나님의 영적인 만남을 도와주는 촉매와 도우미의 역할로 만족해야 한다. 찬양을 이끄는 매개체가 지나친 힘을 발휘하려고 하면 결국 성도 하나 하나가 가져야할 자발적인 찬양 동기를 쇠약하게 만들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일정한 공간과 일정한 방식에 의해서만 찬양할 수 있는 의존적인 영성이 된다는 말이다. 이런 모습은 구약에서나 볼 수 있는 속성이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시편 107:8)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할 때 저절로 찬양은 터져 나온다. 찬양은 하나님을 정확히 바라본 자가 저절로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찬양의 방법은 획일화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도 안 된다. 참새의 소리가 있고 부엉이의 소리가 있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에게 하나님은 다양할 찬양의 방법을 나름대로 허락하셨다. 교회마다 남녀노소가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는데 무턱대고 한 가지 찬양 분위기를 강요함으로써 무리수가 빚어진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이 찬양을 백 번 천 번 부르면 무엇 하는가? 이 넓은 우주 공간에 치밀하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솜씨에 진심으로 놀라지 않는 삶은 또 하나의 거짓말이다. 나는 찬양의 출력이 떨어짐을 감지할 때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임을 깊이 묵상한다. 구원자이신 하나님과 축복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출발점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높이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
8. 믿음으로 찬양하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42:5) 찬양을 드리는 동안에 우리는 위대한 역전 드라마를 만나게 된다. 어떤 악조건 하에서도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어떤 위협 속에서도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어떤 방해와 불확실함 앞에서도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찬송하리로다’보다 더 위대한 영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라고 고백하는 믿음에 있다. 고통스러운 환경을 대하면서 잠시 낙망하며 불안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영적인 평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현실과 자신을 차단하고 인간적인 정서를 말살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태가 아니다. 마음의 번뇌를 거부하거나 초월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서를 거세함으로써 위장된 평안을 얻기도 하지만 그 빈집에 결국 더 많은 귀신이 몰려 들어오게 된다. 위에 기록한 말씀으로 돌아가자. 한가지 특기할만한 사실은 말씀을 기록한 사람이 자신을 객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너’라는 2인칭으로 대하고 있다. 나는 나에게 나이지 어떻게 너가 될 수 있는가? 찬양은 어떻게 노래를 부르느냐의 문제보다 나의 내면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와 질서를 유지하느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내면을 냉정하게 관찰할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을 굴복시켜 찬송하는 자리로 이끌어 낼 수가 없다. |
찬송과 낙망은 한 집에 살지 못한다. 사람의 마음은 참 신기해서 동시에 두 가지 정서를 다루지 못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한 가지 정서에 충실하면 상대적인 것은 자연히 쇠퇴하게 된다. 태양을 바라보면 일시적으로 주변을 제대로 볼 수 없듯이 태양을 지으신 하나님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경배한 후에는 영적인 시각의 변화를 겪게 된다. 낙망과 불안이 찬양으로 반전하는 그 사이에는 하나님을 바라봄이 있다. 언제나 도우심이 되시는 그 얼굴은 어떤 분이신가?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시편 62:7) 이런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찬양의 에너지이다. 수시로 흔들리는 믿음이 아니라 언제나 견고한 믿음이어야 한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쪽은 항상 사람 편이다. 하나님은 동일하신 모습으로 늘 내 곁에 계신다. 찬양하는 마음은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음을 즐겁게 고백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며 또한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 되시는 주님! 아직도 충분한 위로가 되시며 도우심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에 찬양할만한 넉넉한 이유가 자신에게 선포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 하루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작은 배를 저어 호수 저 편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피곤하신 예수님은 고물을 베고 잠이 드시고 마침 광풍이 일어 호수가 미친 듯이 요동하매 제자들은 아우성을 치며 예수님을 깨웠다.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이 호수를 잔잔하게 하시고 제자들에게 엄히 물으셨다. 성도는 모두 찬양인도자들이다. 그 대상은 많은 회중이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자신이라는 한 영혼을 리드하여 높고 깊은 찬양의 세계로 인도하는 책임이 있다. 찬양은 낙망과 불안 속에서 더욱 빛난다. 저절로 찬양할만한 신나고 형통한 시간보다 도무지 찬양할 수도 없고 숨마저 탁탁 막히는 순간에 나 자신을 복종시켜 찬양케 하는 영혼은 진정한 승리자이다.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내 마음을 지성소의 향기로 가득하게 하는 일이 더욱 위대한 승리이다. |
9. 결단하며 찬양하라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9:14) 찬양은 그 사람의 언어와 마음가짐에 밀접하게 연관을 이루고 있다. 진실한 찬양자는 찬양이 노래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입술의 언어와 그 언어의 출처가 되는 마음의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얽혀 있음을 잘 안다. 마음의 깊은 곳에 미움이나 원망 같은 쓴 뿌리를 간직한 채로 하나님을 찬양하려고 하면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이 찬양을 힘들게 한다. 찬양이 열리고 찬양이 닫히는 열쇠는 내 손에 쥐어져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 말씀에 소극적으로 응답하는 사람은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열심히 노래하고 호흡을 충실히 사용하여 하나님을 위해 소리칠 것이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아닌 그 무엇도 찬양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동시에 실천하다. |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편 146:2) 찬양은 젊은 시절 한 때를 장식하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아니다. 찬양은 평생을 두고 도전하고 정복해야하는 거룩한 목표이다. 나이가 들어 목소리가 쇠하고 얼굴에서 황금빛 광채가 사라져도 찬양은 그 안에서 끝없이 샘솟아야한다. 생전에 찬양, 평생에 찬송은 주와 함께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위대한 복을 예약하는 지혜로운 선택이다. 마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 군중들은 질량불변의 법칙에 매이지 아니하시는 경제 대통령의 가능성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하고 그 분을 억지로 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모시려는 정치적인 움직임이 발생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워 호수 저편으로 보내신다. 불순한 군중에게서 제자들을 격리하시려는 의도였으리라. 그러나 배를 저어 가는 제자들의 화제는 예수님의 기적과 그 기적이 낳은 정치적 출세의 기회에 집중되고 급기야는 서열다툼과 연관이 있는 불화의 조짐도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엄청난 풍랑은 제자들로 하여금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았고 그들은 가장 순수한 외침인 구원의 요청으로 바다에서 울부짖는다. 멀리서 이 모든 일을 보신 예수님은 물위를 걸으사 제자들에게 다가 오시고 그들의 배에 오르시면서 풍랑을 잠재우는 당신의 신성을 보이신다.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 수께 절하여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마 14:32-33) 저녁 무렵, 제자들과 군중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며 경제적 동기로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 밤중에 풍랑이 일고 헛된 야망의 거품이 사라지니 그들은 경배적인 동기로 예수님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찬양은 이런 것이다. 경제적인 동기에서 경배적인 동기로 자신의 내적 강령이 바뀌는 것이다. 절대음이 흔들리면 오케스트라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원점이 움직이면 지도가 부정확해지는 것처럼 찬양을 드리는 우리도 진동하지 않는 영적 표준을 결단하며 음표 하나 하나를 소중히 울려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시편 108:1) 게으르거나 무책임한 사람은 약속을 하지도 않고 또한 나눈 약속을 지키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장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소중한 약속을 즐거이 나누며 성실하게 그것을 실천한다. 찬양은 하나님과의 약속이다. 순간마다 하나님 편으로 마음을 정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에게 찬양할 수 있는 심령을 달라고 부탁하기보다는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겠노라고 주도적인 결심을 보여드린다. 평소의 일상 생활에서 영적이지 못하면 찬양을 드리는 순간에 갑자기 영적이 될 수 없다. 언제나 나의 언어와 묵상을 감찰하시고 기록하시는 분이 하늘에 계심을 인식하면 그는 예배와 일상의 벽을 허물고 찬미의 강물이 흐르는 생애를 창조할 수 있다. |
10. 권세 있게 찬양하라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하려 하심이니이다“ (시편 8:2) 마귀를 무장 해제시키고 그 울부짖는 아가리를 결박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찬양에 있다. 현대인들은 찬양의 능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 믿음으로 노래하는 순간에 보이지 않는 마귀의 군대가 지리멸렬한다고 말해보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도 경험하기 위하여 겸손히 노력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찬양은 암행어사의 마패와도 같다. 우리를 통쾌하게 하는 영원한 테마인 춘향전의 압권은 역시 절개를 지키며 고난을 당하는 춘향이 앞에 임금의 이름이 그 권세를 보장하는 마패를 앞세워 이 도령이 들이닥치는 장면이다. 마패는 모든 사람들이, 특히 탐관오리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높이 들어 내세우는 것이다. 감추어진 마패는 산천초목을 떨게 하지 못한다. 찬양은 감추고 묻어두어도 저절로 돌아가는 자동기계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가동하고 행사해야 마땅한 권세이며 능력이다. |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시편 40:3)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미할 때, 빌립보 감옥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옥터에 지진이 나서 흔들리고 모든 문이 맥없이 열려지고 죄수들을 매고 있던 착고들이 다 벗어졌던 것이다. 그 광경을 목도한 간수는 스스로 자결하려고 했다. 그 당시, 죄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탈옥하게 만든 간수는 대신 죽임을 당하는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찬양의 결과로 빚어진 현상 때문에 군인과 그의 가족들이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찬양의 결과는 영적인 해방이다. 찬양하는 자나 찬양을 듣고 보는 자나 다 기적의 파도에 휩쓸린다. 영으로 깨어있는 성도에겐 마귀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시대이다. 찬양이 살아나면 경직되었던 믿음과 소망과 사랑도 활동적인 모습으로 변한다. 근육과 힘줄에 아무런 이상이 없어도 신경선이 굳으면 전신 마비 환자가 되듯이 찬양은 신앙이라는 몸에 신경선에 해당되어서 모든 기관을 최고의 상태로 움직이게 하는 민감한 기능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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