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강해 560번째 곡을 기념하면서
444장 겟세마네 동산에서
눅 22:44,2013.08.18.늘찬양교회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십자가에서의 붉은 피, 주홍 같은 내 죄 흰 눈같이 씻기심, 평강과 건강함으로 지켜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내게 주신 모든 것 다 받쳐도 아쉬움만 있으리니 최후순간까지 십자가 복음 전파하다 주님 앞에 가리라는 내용의 ‘주와 동행’의 주제 찬송으로 작사자는 평남 평원 출생으로 평양숭실 전문학교, 미국 엠포리아대학, 프린스턴 신학대학, 엠포리아대학 신학박사, 영락교회 담임목사, 숭실대학교 학장 및 이사장,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고 1992년 템플턴상을 받은 한경직(韓景職, 1902~2000) 목사가 1981년 작시하였다. 찬송 곡은 평북 비현 출생으로 한양대 음대 작곡과 및 동대학과 음악학과 졸업, 미국 매네스음악대학원 디플로마과정수료, 서울시립교향악단 연구지휘자 역임, 현 한양대 박영근(朴英根,1947~ )교수가 2005년 작곡하였다.
1절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린 주의 기도
십자가에 죽으심도 모두 나를 위함이라
내게 주신 크신 사랑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게 주신 크신 은혜 무엇으로 보답할까
1절,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십자가의 죽으심도 모두 나를 위함이라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이때에 예수님
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과 더불어 유다의 배반과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 26:31절)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 베드로가 이 말씀을 듣고서 당장에 나서
서 말하기를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33절)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베드로의 다짐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나 제자들이 지금을 그렇게 다짐을 하지만 결국은 주님을 부인하고 모두 다 도망가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데리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36절) 하시고 다시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을 따로 데리고 감람산으로 올라가서는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하라.”(38절,눅 22:
40)고 부탁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평소 때와는 달리 무척이나 불안해하시며 힘들어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 이 밤이 지나고 나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7-38절을 보면 “주님께서 고민하
고 슬퍼하셨다.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때와 달리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듯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눅 22:44). 그리고 기도하시
실 때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39절) 기도 하셨
습니다. 할 수 만 있다면 이 십자가만은 안 졌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기도를 44절에 보면 세 번이나 반복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일이면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그 엄청난 고통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 하시면서도 절대로 그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신 이유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들 때문입니다(찬송가 1절). 나사로를 보시고 우셨던 것처럼,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던 것처럼. 주님은 인간의 죄를 인하여 우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그 죄로 인한 멸망을 바라보면서 우셨습니다. 그렇게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예수님은 절대로 십자가를 포기할 수 없으셨습니다. 그것은 “피흘림이 없은 즉 죄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히 9:22)
이사야는 이런 주님의 고난을 미리 예언하면서 이사야 53장 5-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
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다른 길로 같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 사람들은 이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실패한 혁명가다. 거짓 선지자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5장 8절을 보면 이렇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사랑에 대한 확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오면서 눈물을 흘리던 여인들을 향하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시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축복된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귀한 생명의 길, 은혜의 길, 영광의 길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내게 주신 주님의 크신 사랑을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요?”(후렴) 그것은 우리가 주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
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살아가느냐 아니면 주님을 믿지 못하고 회개치 못하여 멸망의 길로 달려가느냐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 모두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린 주의 기도를 기억하며 내게 주신 크신 사랑 무엇으로 보답할까?”(찬송가 1절)
하는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나서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절 주홍 같은 붉은 죄를 흰 눈같이 씻기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영원한 삶 주시었네
2절, 주홍 같은 붉은 죄를 흰 눈같이 씻기시고 하나님 자녀 삼아주셨네
이사야 1장 18절에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오라”는 말씀은 죄 문제를 비롯해서 우리의 질고와 아픔 죽음 등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분이 주님이시니 그 분에게 나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속죄 받을 길도 없고, 치료받을 길도 없고, 회복될 길도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죽을죄를 범했어도, 또 실패를 했어도, 하나님께 불순종했어도, 하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다시금 기회를 주시고, 그를 새롭게 고쳐주시고 치료하여 소생케 하시고, 죽은 자에게는 생명을 주시고, 실패한 자에게는 다시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서로 변론하자”는 것은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내어놓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그런 회개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내 마음속에 있는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하나하나 모두 털어놓고 변론할 때에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고 용서를 베풀어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주홍'과 '진홍'은 모두 쉽게 지워지지 않는 색으로 남 유다 백성이 심각한 죄악에 빠져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눈'과 '양털'은 순수한 정결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사람도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 앞에 그 죄를 내어놓고 중심으로 회개할 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3∼11절에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때 만일 “돌로 치라”고 하면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도 별 수 없구나' 이렇게 흠을 잡을 것이고,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범한 자'라고 흠을 잡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고 말씀했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다 가버렸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주는 교훈은 죄를 뉘우칠 뿐 아니라 고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회개하는 자에 대해서 약속을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입니다. 찬송가 2절에서는 이를 “주홍 같이 붉은 죄를 흰 눈같이 씻기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영원한 삶을 주시었네”라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예수님의 사죄의 은총에 대하여 3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깨끗함을 받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여기에서 '눈과 같이' '양털같이'라고 말한 것은 깨끗하게 해주겠다는 것으로 죄를 짓지 않은 원상태로 환원시킨다고 하는 그런 의미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 예수 안에서 '의인'으로서 칭호를 받게 한 것입니다. 죄가 없어서 의인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게 해주셔서 깨끗한 원상태로 우리를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허물과 죄를 예수님이 담당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일부만 담당해주시고, 일부는 우리에게 남겨주었다면 우리는 속죄함을 받았다 해도 남아있는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의인의 칭호를 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고 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유하심을 받게 하는 은혜입니다.
"오직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느 9:17) 하나님은 사유하시는 하나님, 용서해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죄를 고하고 잘못한 것을 뉘우치면 부모가 용서해주는데, 끝까지 용서를 구하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악을 쓰면서 대적하면 채찍을 가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큰 죄를 범한 자라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자는 용서를 받습니다. 오늘 주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기억치도 않으시는 은혜입니다.
사람은 죄를 범했을 때 “저 놈이 언제 나에게 해를 끼치고, 나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내 가슴을 아프게 할까?”하는 이런 생각을 늘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사야 43장 18절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 43:25)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 죄를 기억치도 않을 테니까 너도 너의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새로운 출발을, 이제는 새로운 결심을, 이제는 새로운 결단을 하면서 주님과 함께 새 출발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사죄의 은총을 받게 되면 정말 즐겁고 기뻐서 '할렐루야'를 외치며 찬송하고 춤을 추면서 주께로부터 주시는 영적 즐거움과 생활의 모든 즐거움을 체험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절 풍파 이는 세상에서 지금까지 살아옴도
주의 은혜 크신 사랑 잠시라도 잊을쏘냐
3절, 풍파 많은 세상을 지금까지 살아옴도 주의 은혜와 사랑 덕분이라
많은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 중에 야곱처럼 풍파 많은 삶을 살아간 사람도 드뭅니다. 그래서 야곱을 배경으로 말씀을 풀어가려고 합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애굽에서 총리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고대 근동에 일어난 엄청난 기근의 재앙 속에 식량을 얻기 위하여 애굽 땅으로 갔다가 바로 왕을 대면하게 됩니다. 바로 왕은 야곱에게 “훌륭한 아들을 두셨습니다.”는 뜻으로 “네 나이가 얼마냐?”(창 47:8)고 묻습니다. 이때 야곱은 바로에게 “나그네길이 130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었으나 ...내가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9절)고 답변하였습니다.
야곱은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쌍둥이로 운명적 경쟁자로 태어났고 형을 이겨먹기 위하여 비겁한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하란 땅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고 이방 땅에서 무수한 설움을 받으며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결혼문제, 자녀들 출산과 양육, 재산을 형성하는 과정, 고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험한 일을 너무나 많이 겪었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밤새 기도하고 주님을 만난 후 형과 극적인 화해를 하지만 세겜 땅에서 딸이 성폭행을 당한 일로 두 아들이 세겜 족장의 일가를 몰살시키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여행길에 라헬이 난산하여 죽은 일은 그의 생애에 가장 큰 슬픔이었습니다. 이후 배다른 아이들이 가장 사랑했던 요셉을 팔아먹고 야곱을 속이는 바람에 20년 넘게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살아야 했고, 르우벤의 범죄와 유다의 상처와 잇단 손자들의 죽음과 손자며느리 다말과 유다의 불미스런 문제로 많은 맘고생을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야곱은 한 마디로 고난의 인생을 산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험악한 인생을 살고 있고, 또 앞으로도 우리 인생길은 호락호락하지가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사람은 이렇게 고난의 세월을 삽니다. 눈물골짜기로 통과하며 눈물의 빵을 먹고, 소태맛 같은 삶을 경험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이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도움 받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한시, 한 초라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나그네 인생길, 짧은 인생길, 험악한 인생길을 살아갈 지라도 언약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책임지시고 끝까지 보호하시며 도와주시는 분인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야곱이 비록 험악한 인생길을 걸었지만 그의 뒤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보호와 도움이 있었습니다. 루스에서 돌베개 베고 잘 때 천사를 보내어 지켜 주셨고(창 28:12)하란에서 외삼촌이 품값을 열 번이나 깎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이 막아 주셨고(창 31:7) 얍복 강가에서 사생결단할 때 하나님의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하여 축복하였고(창 32:28) 세겜에서 아들들이 살인치고 두려워 할 때 하나님이 나타 나셔서 야곱에게 빨리 이곳을 도망치라고 지시하였습니다(창 35:1). 어디 그뿐입니까? 130세 되던 해에 일가족 70명이 무사히 애굽 땅에 피란을 왔고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애굽의 바로 임금을 축복하며 기도할 수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창47:10). 그리고 열 두 아들을 은사대로 축복기도 하고 147세를 향년으로 하여 조상의 묘실로 들어갑니다(창 47:28).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입니다. 오늘도 우리 하나님이 우리들 각자의 인생길을 이처럼 세밀하고 완벽하게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내세 종교입니다. 이 세상에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이 세상 것들은 모두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영원한 하늘나라 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았으면 일렀으리라.”(요 14:1)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 하였습니다(고후 4:16). 또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하였습니다(고후 5:1) 우리가 세상으로 인생이 끝난다면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천국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로 홀연히 강림하실 것이니 주 안에 죽은 자들을 일어날 것이며 살아 있는 자들은 변화하여 영광중에 오시는 주님을 나아가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곱의 인생관을 통하여 우리의 날을 계수하고 온전한 구원을 받아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4절 나의 몸과 나의 마음 내게 주신 모든 것을
주께 모두 바친대도 아쉬움만 남아있네
4절, 몸과 마음 내게 주신 모든 것을 주께 바친다 해도 아쉬움만 남아있네
아버지의 재산을 분배 받아 집을 나간 후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 15:19)며 ‘자신은 이제 아버지의 아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품꾼의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렇게 품꾼의 하나로만 받아주셔도 나는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며 낮아진 마음으로 아버지 집을 향하여 돌아올 때에 누가복음 15장 20절 하반 절입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거리가 상당히 멀지만 또한 세월이 흐르고 고생을 많이 해서 몰골이 험하게 변한 아들의 모습이었지만 아버지는 한눈에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식사를 하면서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항상 집을 떠난 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던 것입니다. 지금도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동일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 들어설 때까지 하나님을 잊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여러분들은 잊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오래 참으시며, 여러분들을 기다리십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죽음과 같은 궁핍의 길에서 아버지의 집으로 귀향을 결단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용서와 사랑을 베푸십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의 둘째 아들의 삶은 어떠했겠습니까? 아버지와의 만남은 늘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즐거움이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제 더 이상의 불평과 원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면서 매일 매일을 감격으로 지냈을 것입니다.
찬송가 3절의 가사에 있는 것처럼 “나의 몸과 나의 마음 내게 주신 모든 것을 아버지께 모두 바친대도 아쉬움만 남아있네” 고백하며 감사함 속에 살아갔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회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때로는 징계하기도 하십니다. 혹 우리 가운데 그런 징계를 받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경우, 그것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럴 때 둘째 아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용기를 내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듯이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언제든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믿음의 복된 권세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가지고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이런 귀한 고백과 감사를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주님을 항상 가까이 하는 주의 백성들 되기를 바랍니다.
5절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와 함께 동행하며
최후 순간 그때까지 이 복음을 전파하리
5절,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와 함께 동행하며 최후순간까지 복음 전파하리라
베드로는 성격이 매우 급하고 충동적이다 보니까 매사에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급히 말을 꺼내다보니까 자주 실수를 범해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꾸지람을 받은 제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끊임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각과 결정이 곧 모든 사람의 의견처럼 여기고 쉽게 행동하는 잘못이 있다 보니까! 다른 제자들과도 잦은 충돌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예고하셨을 때,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마 16:22) 하므로 주님으로부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는 꾸지람을 받을 정도로 말의 실수와 허물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유월절 만찬 때 주님께서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 26:31절)고 말씀하실 때에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33절)고 고백하였던 베드로가 “나는 예수님을 모른다.”(마 26:74)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다시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예수님의 재 부름을 받고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은 이후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8-39)는 회개의 복음을 선포할 때 일시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침례를 받고 구원함을 받는 대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3장 1절부터 10절에 보면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함께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것을 보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 병 고침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5장 12절부터 16절에 보면 각종 더러운 귀신에게 붙들려 괴로움을 받는 병자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깨끗하게 고쳐주었으며, 그 외에도 각종능력을 행하였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다혈질적인 기질로 인해 많은 실수와 어려움을 당하면서 그 심령 속에 깨달은 영적 비밀 하나는 「 내게 갖가지 인간적인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주님의 자녀로 부르신 자는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시고 또 나의 추악한 약점까지도 장점으로 변화시켜 훌륭한 하나님의 도구로 써주신다」는 놀라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발견하였습니다.
주님 앞에서 완전해서 쓰임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추하고 나약한 내 모습이지만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달려 나와서 무릎 꿇고 겸손하게 회개하며 주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성령님께서 나의 약점을 변하여 장점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실수가 있더라도 뛰어들어 믿음으로 일을 저지르면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역사와 기적으로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몬을 붙들어 베드로로 써주신 주님께서 우리를 기적같이 써 주실 것을 믿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따라 담대하게 나아가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 > 찬양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1장 우리 구주 나신 날- 찬송강해 580번째 (0) | 2013.12.21 |
---|---|
300장 내 맘이 낙심되며 (406장) (0) | 2013.09.16 |
135장 어저께나 오늘이나 (0) | 2012.07.21 |
380장 나의 생명되신 주(424장) (0) | 2012.07.15 |
351장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389장) (0) | 2012.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