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예배학

[스크랩] 참된 예배를 회복하라!

늘찬양 2017. 2. 10. 12:23
참된 예배를 회복하라!
워렌 위어스비

예배가 교회의 가장 큰 책임이자 특권이라는 내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교회가 세상을 따르는 순간 영적능력과 증거의 힘을 잃게 된다. 영적 추수가 예배의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일이다. 예배의 목적은 예배를 보러 온 구경꾼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도를 견고케 하기 위한 것이다.

Part 1 예배로의 초대
성령께서 찢어진 우리 가정과 교회를 치유하시고, 종교적인 허울을 벗겨 참 현신을 보게 하시며, 참된 영적 가치를 회복하여 우리 자신과 세상을 속이는 모든 겉치레를 걷어 버리게 하시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세상이 우리를 보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고전14:25)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랴!

교회는 나와 당신과 같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교회도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이 영에 의해 변화되어 좀 더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 가지 않는 한 교회는 변화되지 않는다.

성경은 죄와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한다. 물론 이 말씀은 진리이다. 하지만 분리하는 행위 자체가 자동적으로 영적 축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영적 축복은 참 예배의 부산물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으로 온전해지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고후 7:1) 하기에 충분치 못ㄱ하다. 참 예배와 율법주의가 생겨나고, 세상과 교회로부터 고립되는 비성경적인 결과가 발생하게 된다.

나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해주실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는 그 분이 마땅히 경배 받으셔야 할 분이기 때문이다. 예배가 거래가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예배일 수 없다. R. G. 르투르노는 “대가를 바라고 준다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같은 원칙이 예배에도 적용된다. 대가를 바라고 하나님은 예배한다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분만을 영화롭게 하려는 동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시46: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돕기 위해 우리를 숨기신다. 우리는 도피를 바라는 피난민이 아니라, 전쟁터로 되돌아가기 위해 안식과 회복을 필요로 하는 지치고 부상당한 군사들이다. 예배를 “도피처”로 생각하는 이들은 참 예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에게 예배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참 예배는 영적인 삶을 더욱 힘있고 풍성하게 한다. 예배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이겨내고 세사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제공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함 없이 예배를 드릴 경우, 무지에서 비롯된 올바르지 못한 예배를 드릴 소지가 있다. 이와는 반대로 진리는 알고 있지만 형식적인 예배를 드릴 경우에는 위선적이고 내용 없는 예배를 드리기 쉽다. 존 번연은 “기도할 때 마음 없는 말만 늘어놓기보다는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음을 드리는 것이 낫다”고 했다. 또한 바울은 형식적인 예배를 가리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5) 것이라 했다.

하지만 신앙 세계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일들이 많은 법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를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겸손한 태도로 그분을 신뢰할 수 있어야 ㅎ나다. 그러한 태도를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어떤 일들을 비밀로 하신다.

변화, 위험한 것인가?
잘못된 동기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는 거짓 우상을 열심히 섬기는 이교도의 행위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두 경우 모두 심각한 죄악이다. 하지만 성경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들보다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의무(의지)와 기쁨(감정)은 물론 분별(지성)을 갖춘 삶을 가리킨다. 지성이 없는 열정은 맹목적인 광신이다. 우리는 감정과 지성의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눅10:2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 외에도 우리의 의지를 원하신다. 대부분의 경우, 마음의 생각은 몸을 지배하고, 의지는 마음의 생각을 지배한다.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감정이 아니라 의지에 중심을 두고 있는 종교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감정이라기보다는 의지의 행위이다.

사람은 자신이 예배하는 신을 닮기 마련이다(시115:8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참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진리로) 예배할 때, 우리는 더욱더 그분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게 된다.

하지만 영적인 삶을 산다는 명분 아래 세상을 등지고 자신의 틀 속에만 갇혀 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자기 안에만 갇혀 사는 “종교적인 우울증 환자들”을 주변에서 더러 보게 된다. 그들의 삶은 균형을 잃은 삶이며, 엄밀히 말해 영적인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워싱턴 글래든은 “자신의 영적 상태에만 주된 관심을 기울이는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불쌍한 존재들이다. 자신만을 의식하는 거룩한 삶이란 한마디로 모순이다.”라고 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영적 상태만을 관리하느라고 달리 주님을 섬길 여력이 남아 있지 않다. 이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에게만 있기 때문에 동료 신자들이나 구원을 염원하는 세상을 위해 아무런 사역도 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결코 드러낼 수 없는 거짓 경건이다.

신자들이 참 예배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조금도 희생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참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의 삶에서 그 분의 목적이 이루어지게 한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교회와 가정에서 참 예배를 드리겠다는 각오가 없이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없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참 예배를 통한 변화를 원치 않는 이유는 현재 상태로는 지내는 것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변화된 신자는 세속적인 신자와는 다른 가치관을 갖는다. 그는 예산이나 교회 건물 들에 집찾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열매 맺기에만 힘쓴다. 그에게는 교회 건물을 증축하는 것이나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우리를 온전케 하기를 원하시지만, 먼저 우리의 부족함과 상한 것을 깨닫게 하신다.

만일 우리가 참 예배를 회복한다면, 능력 있는 기도와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또한 각 가정에서 즐거운 기도와 찬송이 울려 나오고, 깨어진 결혼 생활이 회복되며, 하나님의 일고 그 분의 교회를 훼방하는 사탄의 노력이 실패로 끝날 것이다.

우리의 성품과 행위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예배의 목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갈수록,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된다.

PART 2 경이로움이 있는 예배
예배에는 경이로움이 있다.
참된 경이감은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아 전 존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감정이다. 경이감은 깊이와 함께 가치를 지닌다. 다시 말해, 경이감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 경이감은 일시적인 기쁨으로 끝나는 값싼 즐거움이 아니다. 경이감은 신적 존재의 실체, 곧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갖게 되는 경외심이다. 경이감을 갖게 되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ㄱ마사, 찬양, 존경, 두려움, 사람의 감정들이 뒤얽힌 복합적인 감정에 압도된다. 그럴 경우,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경이로우심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우상 숭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건물과 같은 것으로 성공 여부를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직접적인 사역 현장에 투자되어야할 교회 재정이 일주일 내내 텅 빈 상태로 서 있는 건물에 집중적으로 소비된다. 만일 일반 회사가 자원과 설비를 그런 식으로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면 곧 파산에 이르고 말 것이다. 건물에 대한 우리의 지나친 관심이 혹시 또 다른 형태의 교묘한 우상 숭배 행위는 아닌지 의심스럽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곧 창조주의 놀라우심을 경외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시고, 자연을 다스리라는 책임을 부여하셨다.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자연을 파괴하고 낭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예배한 인물들
나는 하나님께 독특한 존재이다. 그 분은 나 자신만의 독특한 경험을 갖기를 원하신다. 물론 모든 예배 경험에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공유되지 않는 나만의 특별한 경험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각자는 모두 다르다. 따라서 우리의 예배 경험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예수님의 종이자 친구이다. 우리는 그 분을 섬기며, 또한 그 분과 교제는 나눈다. 이 모두 참 예배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비롯해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 간청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참 예배를 드리게 되면 자연히 남을 위해 중보하고 증거하는 사역을 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고난과 희생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이에 대해 나는 예배를 통해 고난을 극복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는 모든 시련을 예배 행위로 생각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복종코자 했던 그에게 마침내 승리를 안겨 주셨다. 예배의 목적은 고난을 피하거나 단순히 그것을 견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교난을 창조적으로 이용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다.

삶의 위기를 겪는다고 해서 다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의 위기는 오히려 그 사람의 됨됨이를 드러낸다. 하나님의 사람은 날마다 예배와 섬김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성품을 가꾸어 나간다. 그러다가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면, 영적으로 준비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 아뢸 말은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므로 입을 급히 놀려서도 안 되고, 신앙 생활을 할 때 혀가 생각을 앞지르도록 해서도 안 된다. 입의 말은 항상 마음의 생각에서 나와야 ㅎ나다. 곧 생각으로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 생각에서 나오지 않는 말은 바람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교회의 경이로움
감정이 포함되지 않는 예배는 나 자신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것이 된다는 귀중한 교훈을 깨닫게 된다.

PART 3 증거가 있는 예배
예배는 하나님을 증거한다.
토요일 저녁에 너무 늦게까지 활동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입술로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마음은 그분에게서 멀다면 이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마 15:7~9) 이런 경우를 가리켜 위선이라 한다.

바로 코앞에 있는 자신의 정원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먼 곳에 나가서도 그것을 발견하기 어려운 법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때와 장소를 가리는 신자는 예배에 참석해도 뜨거운 찬양을 드리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때 통회하는 마음과 겸손한 마음을 그 분께 드려야 ㅎ나다.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져야 ㅎ나다. 주님 앞에서는 교만한 마음이 설 자리가 없다.

예배는 서로에 대해 증거한다.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은 특별한 진미는 아니라 해도,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소를 제공해 준다. 예배도 이와 마찬가지다. 영원한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 개인적인 취향에 맞는 특별한 것만 찾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면, 순간적인 욕구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과거의 전통을 무시해 버리고 체험 중심의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늘 서로를 섬기는 삶을 살아야 ㅎ나다. 이렇게 한다면 예배 드릴 때도 서로를 자연스럽게 섬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모일 때마다 “종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모인다.(마 20:28) 예배를 영어로 “섬김”(service)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예배는 섬기는 시간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서로를 섬긴다. “교역자들”만 영적 사역을 행하지 않는다. 모든 신자에게도 서로의 덕을 세우는 사역을 수행해야 할 책임과 특권이 있다.

내가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꼭 강단을 통해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화장실에서 잠깐 마주친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또는 주차장에서 낯선 사람을 만났는데 나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전달될 수도 있다.

사람이 없다는 비판을 받는 것보다는 사랑이 너무 지나치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 우리는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서로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물론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도 스스럼없이 다가와 친구가 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런 일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성령께서 제거해 주시도록 기도하자.

설교는 예배 행위이다.
예배는 전인적인 경험이 되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단지 지성만 활발히 움직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설교가 예배 행위라면, 하나님께 대한 비전이 열리고 듣는 자의 마음이 감동을 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 강단에서 외치는 설교자의 설교보다, 성령께서 듣는 이에게 더 많은 것을 말씀하실 수 있어야 한다. 설교가 예배 행위라면, 준비된 설교는 햇빛이 투과하는 프리즘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성경 본문의 취지를 밝히 드러냄으로써 말씀의 아름다움과 놀라움을 청중이 밝히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모든 것을 분석하려고만 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우리는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하나님께 속해 있는 신비를 조금도 남겨두려 하지 않는다. 팜 예배는 경이감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에는 항상 어느 정도 신비로움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을 논하면서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고 하지 않았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로 나아갔다. 다시 말해 신학에서 경배로 옮겨간 것이다. 그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라고 말했다. 하늘까지 올라갔다 온 경험을 한 그였지만,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그는 신비의 여지를 남겨 놓았다.

예술은 예배를 풍요롭게 한다.
음악은 마음을 감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따라서 성령의 도구가 되면 큰 능력을 발휘하게 되고, 마귀의 도구가 되면 파괴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순진한 교인들은 때로 아무 생각 없이 찬송을 부르다가 이단에 빠지기도 한다.

성경적으로 건전한 찬양은 기독교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을 갖도록 돕는다. 성경적인 찬양이란 단지 성경 구절만 인용하여 만든 세속적인 찬양이 아니라,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찬양을 말한다.

찬양에 담긴 성경의 메시지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찬양을 부르는 교인들이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들은 각각 최선을 다해야 하고, 더 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적인 믿음 없이 능력만 있어도 안 되고, 음악적인 능력 없이 헌신적인 열정만 있어도 안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신다.

PART 4 영적 전쟁이 있는 예배
예배의 회복
참 예배는 시간이 걸린다. 차분한 마음으로 조용히 하나님을 기다리는 태도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예배를 통한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시간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지만, 시간의 재비를 받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기다리며, 그 분의 놀라우심과 위대하심을 깊이 체험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진리를 거부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그곳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주님은 개의치 않으셨다. 개혁자는 주일학교 어린이 예배에 참석해서도 축복을 경험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개혁자는 항상 하나님을 예배하며, 더 많은 하나님의 은총과 영광을 원하고,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역사하시도록 자신의 삶을 열어 놓는다.

매일 주님 앞에서 경건한 시간을 갖도록 노력하라. 영적 훈련을 실천에 옮겨라. 그러기 위해서는, 하던 일들 중에 몇 가지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영적 훈련을 위한 시간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각오 없이는 당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모든 사람을 다 기쁘게 하려고 해서는 개혁자가 될 수 없다. 또 그렇게 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PART 5 지혜가 있는 예배
예배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지혜
장소가 주님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장소를 거룩하게 만드신다.

균형 있는 예배를 계획하는 지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빛은 “기이한 빛”(벧전2:9)임과 동시에 “가까이 가지 못할 빛”(딤전 6:16)이다.

다양성을 수용한다는 것은 교회가 그 만큼 성숙했다는 증거이다.

참 예배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골라 먹을 수 있는 뷔페 음식이 아니다. 예배는 풀 코스 정식과도 같다. 하나님께서 메뉴를 정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균형 있는 음식을 먹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자녀들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임을 아시기 때문이다.

출처 : 하나님의둥지
글쓴이 : ♣양무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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