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예배학

영적예배의 결과

늘찬양 2006. 11. 10. 09:09

영적예배의 결과

진정한 그리스도인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노력에 의해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을 지키고 또한 그대로 행하려는 자가 아니라, 거듭나고 영적양식인 말씀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서 생활하시도록 맡기는 생활을 하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가치관이나 생각을 따라, 혹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나 자신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쫓아 사는 것을 말한다.

성령님을 쫓아 산다는 것은 복음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진리의 말씀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깨달아 생활화하는 삶을 말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말씀을 많이, 혹은 열심히 상고했다고 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과는 구별된다.
인간의 삶이란 과거나 현제나 동일하다.
다만 문명과 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인간에게 미치는 환경이 변하였을 뿐, 인간의 삶의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혹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먼 과거의 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그 중에 일부는 성경도 오늘날의 상황에 맞게 재편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 조차도 모르고, 사탄에 의해 철저히 세뇌되어지고, 형식과 종교성으로 가득 찬 적그리스도들이다.
이들은 제 아무리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해도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족속들甄?

“이 백성들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15:8~9)

“화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

“화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화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불법과 외식이 가득하도다” (마23:27~28)

많은 종교인들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있으나 스스로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사람의 생각을 따라 해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교세 확장에만 관심을 가진, 월급을 주어가며 고용된 목사들의 가르침이나 혹은 성경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이들의 삶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 마귀에게 소속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빌립보서 기자인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1:20)

우리는 하나님께서 피로 사신바 되었기 때문에 우리 몸은 더 이상 우리의 몸이 아니다.
우리 몸을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전락시키거나 불의의 병기로 전락시켜서는 않된다.
우리 몸은 성령님이 계시는 곳이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은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죄와 타락으로 얼룩지어 진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이 창조되어진 피조물이다.
예수님께서 남녀 성관계를 통하여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영으로 탄생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죄가 조금도 없으시다.
죄가 전혀 없는 분에게 죄를 전가시켜 대신 죽임을 당케 하셨으니, 구속, 곧 죄사함의 복음을 통하여 거듭난 후 우리는 죄와는 상관없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다.

“우리가 생각컨데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14~15))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이다.
우리는 중생의 사실과 함께 우리의 삶 전체를 말씀이 이끄시는데로 맡기는 신앙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적으로 나 자신을 진리의 말씀께 의지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부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 지성소, 세째하늘에 속하는 기업의 영광을 누리게 하여 주실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거듭난 형제자매들이 그리스도의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고 말씀의 영의 지속적인 공급을 받지 못하여 영적 기근상태에서 헤메고 있는 실정이다.
그 중에 더러는 말씀이 어느 정도 성장하였다고 스스로 생각하여 믿음이 적은 자들과의 교제가 단절되기도 하는데, 이것 또한 바람직한 영적생활은 아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의 정도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리스도와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낮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고린도전서를 기록하면서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고전15:9)’로 자신을 어필하다가, 에베소서를 기록하면서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3:8)’로 어필하고 있으며, 그의 신앙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고 어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3차 전도여행을 통하여 말씀에 제대로 뿌리 박지 못한 성도들에게 얼마나 정성을 들여 그들을 가르치고 있는지 그의 서신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이 장성하면 장성할수록 사랑으로써 의로 교훈하기에 부족함이 없기를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말씀에 대한 지식의 자랑이나 교만은 신앙이 어린자들에게 상처를 주기 쉽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엡4:13)

믿는다는 것과 안다는 것이 일치가 되어야 한다.
믿음만 강조되어서도 안되고 아는 것만 강조되어서도 안된다.
말씀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믿음은 광풍에 밀려 다니는 바닷물과 같고, 믿음이 수반되지 않은 지식은 헛지식에 불과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과 자랑과 자기도취에 휩싸이게 한다.
따라서 우리의 영적생활은 이 두 가지가 적절히 조화를 이룸으로써 성령의 열매를 영걸어 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간구했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①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
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②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③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시기를 간구하노라”(엡3:14~19)

이것을 통하여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들의 영적성장을 위해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이 장성한 형제들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내용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사도바울의 기도와 같이 되어 가는 것이 영적 신앙생활이다.
여기에는 자랑이나 교만이나 무례함이 전혀 없다.
오직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과 믿음과 성령의 사랑의 터 위에서 우리의 믿음을 견고히 다져 나가는 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없다.

우리가 죄사함의 복음을 깨달아 거듭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적생활의 시발점에 불과하다.
현제까지 이루어 진 사실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믿음의 경주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일평생 하나님을 알기 위해 그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새로운 율법으로 돌아 가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가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미 이루어 놓으시고 예비하신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을 진정으로 마음으로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3:12~14)

우리가 참으로 말씀을 깨달아 갈 때 우리에게 어떠한 역사가 일어날 것인가?
그것은 빌립보서 4장11~13절의 말씀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간에 자족하기를 배우게 된다.
경우에 따라 비천한 지경에 처할 줄도 알게 되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게 되고, 배고픔과 배부름과 풍부와 궁핍의 일체의 비결을 스스로 터득하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고 또한 믿는 것이 영적생활이다.
이 외에도 지금까지 살펴 본 여러가지 교훈의 비밀과 성령과 사랑의 열매가 결실되어 가는 것이 영적예배의 결과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아노라 믿노라 하면서 이러한 영적 열매의 결실을 맺지 못하면 그것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와 같다.
받을 줄도 알고, 베풀 줄도 알고, 미련하기도 하고, 지혜롭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이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선을 이루어 가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영광이 되어 진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할 것은 이 모든 것이 말씀의 깨달음 위에 이루어 져야 하지 우리 스스로가 조금 아는 지식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신앙의 크다란 오류를 범하게 된다.
신앙의 바름과 그름 사이의 갭은 지극히 작기도 하고 지극히 넓기도 하다.
사람들은 무지하여 복음의 핵심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 할려고 들지도 않거나 혹은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자기 의가 강하여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전4:16~18)

우리의 영적예배의 결과는 거듭 난 후, 이제 더 이상 이세상의 풍습이나 제도를 쫓아 살지 않고 천국기업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 이 세상 풍습을 쫓아 살지 않으면 세상적으로 볼 때, 경제적으로 심히 가난하고, 미련하기도 하며고, 어리석고, 비천하고, 약하기 짝이 없게 된다.
세상적 고난이 불가피하게 수반된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세상은 온통 정욕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말씀을 쫓아 살게 되면 이러한 세상적 정욕이 사라지게 되고 오직 그 나라와 그의를 위해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많은 어리석은 신자들은 세상적으로도 부귀영화를 누리고 천국에 가서도 부귀영화를 누렸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천국과 세상은 정반대의 개념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 세상적인 풍요로움이나 세상적인 어떤 목적의식을 갖고 살아 간다면 천국에 갔을 때 그 만큼 초라하게 될 것이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본 절에서도 우리가 말씀을 쫓아 살려고 할 때 환란과 고난이 불가피함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말씀을 쫓아 받는 고난은 천국기업의 영광과 비교하여 볼 때 지극히 가벼운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그 속의 진리를 깨달으면 세상적인 모든 것이 하나의 배설물과 같이 더럽고 추악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말씀은 심지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조차에게도 비밀로 감추어져 있으므로 이를 발견하기란 그다지 쉽지가 않다.
따라서 우리가 참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깨닫기 위해 주야로 묵상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모든 비밀을 우리에게 밝히 보여 주실 것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13:11)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볼 때, 어떤 쓸모가 전혀 없는 땅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이 그 땅에 금은 보화가 가득 묻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면 주위의 사람들이 비웃는다 할지라도 그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땅을 샀을 것이다.
천국도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볼 때 전혀 쓸모없는 예기처름 보이겠지만 말씀을 통하여 천국보화를 발견하면 우리 인생의 어떠한 댓가를 지불하여서라도 천국기업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13:44)

“또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13:45~46)

우리가 참으로 천국의 보화, 즉 천국기업의 영광을 발견하고 나면 더 이상 이 세상을 위해 살지 않고 천국기업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죄사함의 복음을 듣고 깨달아 거듭났다 할지라도 천국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좋은지를 발견하지 못하면 여전히 세상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이는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그것이 제일인 것 마냥 거기에만 재미를 붙이고 있다가, 그 장난감보다 더 좋은 장난감을 발견하면 새로운 장난감만 가지고 노는 현상과 같다.
우리도 이 세상 것이, 혹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천국에 관한 지식이 모든 것인 줄 알았다가 말씀을 통하여 새롭고 더 큰 영광을 발견하면 현제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알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천국기업의 영광을 발견한 만큼 세상적인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거듭났다고 해서,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해서 모든 성도가 천국기업의 영광이 모두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영광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아는 지식과 말씀을 믿는 믿음이 하나가 되어 그것이 우리 마음을 제어하고 실생활에 적용될 때, 그 영광은 온전히 빛나게 될 것이다.

재물을 사랑하지 말 것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19~2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3~24)

세상적인 부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정욕에 의한 사탄마귀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세상적인 부와 천국에서의 영광은 정반대의 개념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일반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거듭난 사람들, 심지어 말씀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갖추어 진 형제자매들 중에도 참으로 천국의 보화를 발견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부를 위해 인생을 소비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와 성경말씀을 합리화 하기에 급급하다.

마태복음 19장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려 한다면 하나님의 계명, 즉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었다.
그 때 청년이 ‘내가 이 모든 계명들을 다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시자 이 청년이 재물이 많기 때문에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아무리 말씀을 많이 알고,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해도 우리 마음 가운데 세상적인 정욕이 가득차 있으면 천국의 보화를 발견할 수가 없다.
바꾸어 말하면 천국의 보화를 발견한 만큼 세상적인 정욕이 사라지므로 세상적으로는 부유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천국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시집 장가 가고, 논과 밭에 나가 할 일도 많고 온통 세상적인 일에 분주하다.
사람들마다 삶에 대해 그 나름대로 목적과 방향이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건 다니지 않는 사람이건, 혹은 거듭 났건 거듭나지 않았건 실 생활면을 살펴 보면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거듭나지 않은 사람과 거듭난 형제자매들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어찌되었던 간에 우리는 삶에 대한 자세가 일반 세상사람들이나 종교인들과는 달라야 한다.
그렇다고 믿음이 없이,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직 기록된 말씀의 범주 내에서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노력한다면 어떻게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정확한 방향이 서게 될 것이다.

이제 이 세상 풍습이나, 옛 습관이나, 정욕이나, 재물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것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자아나 사고 감정을 우리의 방식대로 행하지 않고, 오직 말씀께 의뢰하여야 한다.
말씀만이 우리의 정욕을 제어하는 유일한 길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7:24)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적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실제로는 세상을 섬기는 것이 오늘날 믿는 사람들의 현실이다.
말씀을 쫓아 살아갈 때 수반되는 가난과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여 세상으로 돌아가는 형제자매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적으로 부유해 질 수가 없다.
구약에 있어서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욥등과 같은 사람들의 부는 영적 축복에 대한 그림자이지 그것을 세상적인 복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천국에 가서도 잘 살고,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고난이나 어려움이 없이 그럭저럭 무사하게 살려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9~10)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 된다.
살기 위해서는 돈도 필요하겠지만 우리가 말씀을 쫓아 그것을 깨닫고 나면 돈에 대한 욕심도 그 만큼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거나, 말씀 상고하기에 게을리 한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욕심이라는 사탄 마귀가 들어와 하나님으로부터는 멀어지고 세상으로 점점 더 깊이 빠지게 된다.
우리가 문화혜택을 누리면 누릴수록 그 혜택을 유지보존하기 위한 비용이 많이 들게 마련이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세상적인 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다시피 세상은 사탄마귀가 지배하고 있고 사탄마귀는 욕심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도록 끊임없이 공격해 오고 있다.
돈이 없으면 당장 어떻게 될 것 같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만 있으면 돈은 우리의 삶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 마음에 내제하고 있는 욕심이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자족하기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돌아 보시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복음의 말씀은 가까이 하지 않고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를 우리 스스로가 해결할려고 하다보면 악은 도처에서 우리를 공격해 올 것이다.

야고보서의 기자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딤전3:3에서도 집사직분의 자격요건으로서 돈을 사랑하지 않는 자일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삶에 필요조건일 뿐, 절대조건은 아니라고 누구나 다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각 개인의 삶을 한번 살펴보면 모두 돈이라고 하는 것에 막대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첨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사탄마귀의 자식들이나 구하는 거들이다.
우리가 구할 것은 오직 그 나라와 그 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리하면 하늘에 감추인 비밀을 우리에게 밝히 드러내시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능히 이길 수 있는 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 가 보면 사업이 번창하게 해 달라든가, 물질적 축복과 영적인 축복, 또는 영육간의 축복을 운운하면서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다.
그들은 그렇게 해야만 교회가 헌금을 많이 거둬 들여 재정적으로 풍부해지고 교세를 확장발전 시키기 때문에 이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한 사탄의 일꾼들이요 적그리스도의 자손들이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물질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참으로 말씀을 쫓아 살려고 할 때 세상적으로는 궁핍하게 되고, 많은 환란의 당하게 되지만,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인내하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이 세상에서 받은 모든 고통과 고난은 천국에서 배로 갚아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동안 불가분 이 세상 속에서 생활하게 되겠으나, 우리의 삶의 목적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있기 때문에 세상적인 제도나 관습이나 규례에 얽메어 하나님을 져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누가복음 12장15~40절 사이에 나오는 한 부자 청년이 그의 밭에 소출이 넉넉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곡식을 쌓이 둘 곳이 적어 창고를 더 크게 짓고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두고 평생 편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다시 찾으면 네가 그렇게 모은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셨다.
이와 같이 썩어 없어질 육신을 위하여 교육을 하고, 재물을 모으고, 건강을 관리하며, 종신토록 수고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이 세상의 풍습으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말씀으로 이 세상을 거뜬이 이겨야 한다. 이 세상은 우리의 생각이나 노력으로 이길 수 없다.
따라서 한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 곧 말씀의 능력에 우리를 의지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이 말씀의 바다에 빠져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

사람들은 세상삶이 하나님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별로 없다.
나름대로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여 주시지 않겠나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죽은 후의 세계에 관하여는 그 때 죽어봐야 알지 지금으로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하루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소중하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눅17:26~29)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죄의식의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이 말씀에 있지 않고, 세상적인 삶에 미처 세상적인 관습이나 규례를 따라 살고 있다는데 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님께 대하여는 가장 어리석은 것이다.
세상적인 삶으로서는 아무리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노력을 해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
이제 우리의 삶은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나 복음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영적 삶이다.

사람들은 그래도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사람의 도리를 다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강력히 부인한다.
성경은 상식이 아니다.
성경을 우리의 사고 범주 내에서 해석 할려고 하면 크다란 오류를 범하게 된다.
구약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거기에 사는 모든 사람을 죽이라고 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런데 가령 가나안 땅에 쳐들어가서 불쌍하다고, 어린 아이라고 해서 그들을 살려 두면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는 것이 된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욕심과 자기의 생각을 쫓아 그들을 모두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거기에 상응하는 징계를 받았다.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고, 살려 두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은 선이고 사람의 뜻은 악이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 거민을 죽이는 것은 선이고, 살려 두는 것은 악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을 배제 하여 오직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

말씀은 사랑과 자비와 은혜와 긍휼이 한없이 풍부하심에도 불구하고 세상적인 것에 대해서는 호리만한 타협도 없다.
말씀은 인간의 상식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져서도 안된다.
말씀은 도덕적인 가르침이나 윤리의 내용이 아니다.
말씀은 생명을 다루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그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의 식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4~39)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화평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분리를 위해 오셨다.
물론 모든 말씀은 사랑이요, 평안이요, 화평이지만 여기서 의미하는 분리, 혹은 불화는 성경적으로 살려는 사람과 성경을 불신하는 사람 간의 분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신앙의 정도에 따른 분리를 의미한다.
그 분리의 대상이 부모가 되었건, 자식이 되었건, 아내나 형제가 되었건 간에 참으로 말씀을 쫓아 살려고 할 때 분쟁은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그 분쟁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시련일수도 있고 사탄 마귀로부터 비롯되는 죄로의 유혹일 수도 있다.
이 양자(兩者)를 제대로 구분하기가 그다지 쉽지는 않겠지만 말씀의 거울로 자신의 신앙과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면 그 비밀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말씀은 육적이거나 세상적인 모든 요소를 배제한다.
그렇다고 해서 속세(俗世)를 떠나 도인(道人) 처름 살라는 것은 더 더욱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주의할 것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원만히 하기 위해서 세상적인 것들이나 분리의 원인과 타협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가장 큰 원수이다.
먼저 나 자신의 육신적인 생각이 가장 큰 원수이고, 그 다음 내가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중요시하는 것들의 순서가 바로 나를 멸망에 빠뜨리는 원수의 순서이다.
만약 아내를 사랑하면 그 아내가 가장 큰 원수로 내게 작용하고, 자식을 사랑하면 사랑하는 것만큼 내게 큰 원수로서 작용한다.
재물을 사랑하면 사랑하는 것만큼 내게 원수가 된다.
비록 우리의 영이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사랑하는 상대방마저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말씀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지대한 방해요소가 되며 원수가 된다는 것이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19:29)

하나님의 일, 천국 복음을 위하여 행하여 지는 모든 것들이 이 세상에서는 어리석고, 비도덕적이고,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천국에 가서는 그것이 얼마나 현명한 처사였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육에 얽메어 있으면 집이나, 전토(田土)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이러한 것들이 매우 소중한 것들이겠지만, 영에 관한 한 이러한 것들의 관계가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오히려 방해요소가 될 수 있다.
사람이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시피 세상적인 것과 하늘에 속한 것들을 두 가지 다 충족시킬 수는 없다.

우리의 소망은 천국에 있다.
우리가 소망에 대한 확신과 믿음의 분량만큼 세상적인 정욕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우리 중 누구든지 개인적인 노력, 즉 말씀을 쫓아 살려고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나 노력으로서는 이러한 정욕의 유혹으로부터 초연(超然)해 질 수가 없다.
그래서 한 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필요로 한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 하였다시피 이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전적으로 맡기는 삶이 우리의 삶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 스스로를 돌이켜 보면, 그 영이 하나님께 대하여 비록 거듭났다 할지라도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거듭난 후 죄사함의 복음만 의지

하고 신앙에 대한 심오한 영적갈등과 고난을 경험하지 못한 형제들은 지금의 이야기들이 예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죄사함의 복음의 말씀으로 분명히 거듭났고, 진정으로 말씀만을 쫓아 살기를 원하는데 실질적으로 돌이켜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내 행위가 수반되지 않음을 느끼고 복음에 대한 자신의 갈등을 많이 경험하였을 것이다.
이 갈등과 열정이 심하면 심할수록 신앙생활에 관한 복음을 깨달았을 때, 그 은혜 또한 그 만큼 더 크다. 이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말씀을 알고 또한 깨닫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특히 죄사함의 복음을 깨달은 형제 자매들은 더욱 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에 대한 귀가 막히면 말씀과의 교제보다는 형제 자매들과의 인간적인 교제(신앙생활에 대한 간증이나 생활적인 교제, 모임)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대부분의 복음 전도인들이 죄사함의 복음만 전했지 신앙생활에 관한 복음이 거의 없다.
물론 그들도 거듭난 후 영적성장, 신앙생활의 중요성을 운운(云云)하기도 하지만, 과거 율법에 얽메어 있을 때 복음이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사함의 복음의 굴레에서만 맴돌고 있으니 신앙생활에 관한 복음이 보이지 않을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거듭난 것도 말씀으로 거듭났고, 신앙생활에 관한 것도 말씀을 통해서 만이 가능하다. 따라서 자기 스스로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쫓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마9:57~58)

예수님께서는 비록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들과 함께 살고 계셨으나 그는 이 세상에 속하신 분이 아니므로 삶의 목적이 하늘에 있었다.
즉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오셨으므로 세상에 삶의 가치를 두신 분이 아니었다.
여우나 새는 이 세상에 속하여 이 세상에 안식처가 있겠지만 주님은 이 세상에 속하신 분이 아니므로 세상에서는 안식할 만한 처소가 없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믿음으로 거듭난 우리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거룩한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무슨 삶의 목표를 설정하여 세상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우리의 삶의 소망은 하늘에 있다.
따라서 말씀을 쫓아 살아갈 때 세상에서는 많은 고난이 있겠으나 천국에 대한 소망과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마9:59~60)

어떤 사람이 자기 부모가 죽었으므로 먼저 자기 부친 장례부터 치루고 난 후 주님을 쫓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하여 영혼이 거듭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영혼이 거듭나지 못한, 즉 하나님께 대하여 그 영이 죽은 사람들로 하여금 장례를 치루게 하고 너는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적으로 볼 때 이 얼마나 몰상식하고, 부도덕적이고, 황당무게한 말인가?
자기 부모가 죽었는데 장례를 치루는 것 보다 자기를 따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의 영이 거듭난 후에는 세상적인 풍습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본 절의 말씀은 말씀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이다.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마9:61~62))

어떤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자기의 생각에 평생동안 주님의 말씀을 쫓아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말씀을 쫓아 가족들과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먼저 그들부터 안심을 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주님을 좇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좇기에 앞서 먼저 내 가족들에게 작별의 인사부터 하고 주님을 좇겠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세상적인 가치기준으로 볼 때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 처름 보일런지는 모르겠으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적인 것들에 미련을 두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말씀은 언제나 인간의 상식 저 편에 있다.
말씀을 쫓아 사는데는 무슨 핑계나 이유나 조건이 있을 수 없다.
말씀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상식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조차 배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적인 것들, 인간적인 것들, 상식한 것들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말씀의 중요성과 단호성을 쉽게 망각해 버릴 때가 너무나 많다.

사람들은 돈을 벌어 안정이 되면, 대학에 합격하고 나면, ~하고 나면 그 때부터는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
현재상태, 현재조건, 주어진 상황 속에서 말씀을 쫓을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신앙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제가 중요하다.
죄에 관한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해결되었지만, 믿음에 관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믿고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천국기업의 영광이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다만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사탄의 정죄의식이나 죄의식에 동화되서는 않된다.
거듭난 후 사탄은 우리에게 율법에 얽메어 있을 때 보다 더 강한 정죄로 다가오고, 더 강한 유혹으로 다가 오고 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이러한 사탄의 장난을 담대히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

돌이켜 보면 진리 만큼 변화무쌍한 것도 더물다.
진리는 어려운 것도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지극히 단순히 그리고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깨달음에도 어린 아이의 깨달음이 있고 어른 들의 깨달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에 대한 깨달음도 신앙의 정도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교제하고 있는 형제자매들 중, 스스로 무엇인가를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형제자매들 중,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들 받은 , 즉 깨달음의 정도가 낮은 형제자매들을 무시하고 교제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형제자매들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공평하고 정의롭다.
누구는 더 사랑하고 누구는 덜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된 자가 나중될 수도 있다. 말씀에 대해 교만하지도 말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 처름 서로 사랑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
사랑은 자랑도 교만도 하지 않는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무례히 행치도 않는다.
믿음도 중요하고 소망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믿음은 모든 영적생활의 시발점으로서 중요하다.
믿음이 많으면 많을 수록천국에 대한 소망이 크다. 이러한 소망이 크면 클수록 세상적으로는 고난을 받게 되고, 그 고난 속에서 인내와 절제를 하게 된다.
이러한 믿음과 소망의 결과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믿음이 있노라, 소망이 있노라 하면서 사랑이 없으면 그 믿음과 소망은 죽은 것이다.

거듭난 형제자매들 중 행함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 자세를 취하려는 경향이 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믿음이 있으면 행위도 함께 수반된다.
말씀을 들여다 보고 있다는 것과 말씀을 안다는 것이 바로 모든 행위, 즉 말씀을 실행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었다고 생각해서는 않된다.
부모가 자식에게 심부름을 시켰을 때, 한 아들은 그 말을 듣고 알겠다고 대답한 후 실천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 아들은 실천을 했다.
어느 아들이 바람직 한가?
마찬가지로 믿는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부모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알았으나 실천하지 않는 아들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믿음이 있으면 행위는 저절로 일어난다. 믿음의 분량 만큼, 깨달음의 분량 만큼 행위가 일어난다.
그 행위의 형태는 사랑과 성령의 열매로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그렇게 씌어 있다고 해서 말씀을 온전히 지키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즉 믿음이 없이 행하는 우리의 모든 행위는 율법이다.
인간의 몸을 입고서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도저히 지킬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혹은 근사치나마 지키지 못한다고 해서 스스로를 자책하고, 갈등할 필요는 없다.
그러한 갈등과 정죄의식은 사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흙으로 만든 진토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인생임을 먼저 인정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여야 한다.

사람들은 믿음과 행위에 대해 크게 혼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믿음의 결과는 행위로 나타나고 행위의 원인은 믿음이다.
여기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 깨달음, 즉 하나님의 영과의 교통을 의미한다.
진정한 영적 깨달음이 없이 우리가 믿고 싶어 믿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에 지나지 않는다.
앞에서도 이야기 하였다시피 ‘믿는다’는 것과 ‘믿어진다’는 것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행위도 내 스스로가 생각하여(자기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려고 하는 행위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보니 은혜와 감사로 비롯된 행위가 있다.
여기서 나의 행위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축소 내지 소멸되어 지기도 하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육신적인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은혜에 의한 행위는 시간이 경과하면 경과할수록 믿음과 은혜를 더하여 강건하여 지고, 그다지 노력하지도 않으므로 육신적인 고통이나 갈등이 따르지도 않는다.

우리는 말씀 앞에 자기 자신이 철저히 낮아져야 한다.
여기서 낮아져야 한다고 해서 자기 스스로 낮출려고 하는 것 자체도 자기의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겉으로 사람들이 보기에는 겸손하고 낮은 것 처름 보일런지 모르겠으나 말씀을 떠나서 나오는 모든 것들이 자기의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말씀을 따르고 지킬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자기의요 율법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그 어떠한 것도 행할 수 없다.
다만 우리 스스로서는 어찌할 수 없고 오직 복음의 말씀께 의지하여 말씀이 지시하는 바를 깨달아야 한다.

그 깨달음이 충만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행위가 나온다.
여기서 행위라고 하는 것은 말씀을 깨달았으니까 이제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해 보아야겠다는 각오나 의지, 나아가 말씀에 대한 실천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듭 난 후 전도나 교제나 모임, 봉사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행위가 아니다.
여기서 행위라고하는 것은 말씀이 충만히 깨달아 졌을 때 그 깨달은 은혜가 넘쳐나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행위의 주의점을 충분히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복음과 율법이 외관상 보기에는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마찬가지로 믿음에 대해서도 겉으로 보기에는 거짓 믿음과 참 믿음이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행위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도 행위의 결과는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내용은 흑백과 같이 전혀 다르다.
영적인 눈이 밝지 않으면 이러한 것들을 제대로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의 영안(靈眼)의 눈이 띄기 위해서는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만약 거듭난 후 그 신앙이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죄사함의 복음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 스스로 말씀의 가르침을 쫓아 살려고 하면 구원을 받기는 받되 천국기업의 영광이 없고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된다. 대부분의 거듭 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영적성장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신앙생활인지, 어떻게 하여야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 나아갈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따라서 이제 바로 알고(깨닫고), 바로 믿고(복음과 성장), 바로 행하여야(결과) 한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신앙생활도 그 열매 곧 성령의 열매를 보면 그 신앙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성령의 열매는 성경에 대한 지식과도 상관이 없고, 신앙의 연수와도 상관이 없으며, 교회 내에서의 교제나 봉사와도 상관이 없고, 그 사람의 성품이나 인성과도 상관이 없다.
오직 말씀에 대한 사랑만이 우리 신앙의 지표가 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것은 그 영이 하나님께 대하여 거듭 난 후 스스로 지속적으로 성경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모임이나 간증이나 교제에 치중하다보니 복음적 종교생활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고, 둘째로 성경에 대한 깨달음은 많으나 그것이 믿음과 화합이 되지 않아 영적지식으로 교만과 자랑만 늘어나게 되어 행위가 뒷바침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 시기는 영적결핍 상태이다.
우리는 말씀에 대한 기근, 믿음에 대한 기근, 사랑에 대한 기근으로부터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한다.
이것은 나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고 오직 복음의 말씀, 은혜의 말씀, 사랑의 말씀으로 돌아 가야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서로 사랑하자.
사랑에는 희생과 봉사와 충성이 수반된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하는 상대방을 위한 어떠한 희생이나 봉사도 없이 오직 자기의 주장만 고집한다면 그것은 말 뿐인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어떠한 노력이나 요구, 혹은 강요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생기는 현상이다.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올바른 영적예배이다.

말씀만큼 단순하면서도, 말씀만큼 오해를 불러 일으켜 오류를 범하게 하는 것도 없다.
왜 성경은 어느 한 말씀으로 국한하지 않고 66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다양하게 우리에게 신앙의 지표를 제시하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느 한 단편에 치우치지 않고 범사(凡事)에 하나님의 뜻을 알라고 하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자매를 사랑할 수 있도록 진리의 은혜의 말씀께 우리 자신을 부탁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오직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마음대로 활동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말씀이 이끄시는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 무슨 의(義)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한 말씀은 우리 안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가 없다.
나의 생각과 의식이 말씀 앞에서 철저히 깨어져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적예배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서는 이 세상의 풍습이나 관습을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책의 모든 글의 결론은 율법적 종교생활이나 자기 의로부터 벗어나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한마디로 축약할 수 있다.
말씀 안에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비밀이 감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에 관한 모든 것들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결어(結語)

지금까지 우리는 영적예배라는 임의적 주제를 가지고 우리 신앙에 관한 몇몇 가지 관점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물론 이 책은 성경책이 아니다.
이 글을 전개함에 있어서 나름대로는 성경적으로 접근하려고 많은 시도도 해 보았으나 개인적이 주장이나 생각이 많이 강조되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필자 나름대로 신앙이 성숙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 있는지라 불완전하고 불합리한 부분도 많다.
게다가 독자의 계층에 대한 개념이 미리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때에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때에는 기독 종교인들에게, 어떤 때에는 거듭난 형제자매들에게, 어떤 때에는 거듭난 후 믿음이 어느 정도 성숙한 자들에게 접근하려고 하다보니 여러 부분에 시행착오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비판하기 보다는 신앙의 새로운 발판으로 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일반 평신도로서 세상생활의 분주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머리 속에서 알고 있는 말씀에 대한 사랑을 구체적인 글로 옮긴다는 것이 역부족인 것도 알았다.
그러나 말씀을 사랑하고 또한 사랑코자 하는 많은 형제자매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말씀을 공유하고 더불어 살아가고자 어리석으나마 글로서 남기게 되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는 말이 있다.
신앙에 관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가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필자의 신앙에 더러는 공감도하고, 더러는 더 나은 교제가 있을 것 같아 어리석으나마 글로 남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