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의 승부수
룻 1:6-18.2022.10.30.늘찬양교회
험한 삶을 산 권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남편은 일찍이 명예퇴직해야 했습니다.
취직할 곳도 없었고 사업을 하기도 겁났습니다. 결국, 그 가정은 이민을 결심했습니다.
말이 다르고 풍습이 다른 낯선 땅에 정착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정착할 시간도 없이 그만 풍토병으로 병이 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고 두 아들만 남았습니다. 허리를 졸라매고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허리가 휘도록 일했지만, 하루 품을 받는 막노동인지라 재산을 모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벌어 그날을 지내는 형편이었습니다. 두 아들은 모두 장성해서 그곳에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색싯감이라고 데리고 온 두 며느리 모두 내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혈통이 다른 국제결혼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를 해 보았지만 돌이키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한 지붕 아래서 두 아들과 며느리 그렇게 다섯 식구가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설상가상으로 두 아들이 교통사고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민 생활 십 년 동안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기구한 삶을 산 사람이 누구일까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오미입니다.
나오미의 인생은 이렇듯 심하게 얽히고 꼬였습니다. 오랫동안의 가뭄과 이웃 원수들의 침공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자 엘리멜렉의 가정은 정들었던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지방으로 옮겨갔었는데, 그곳에서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리고 고국 유다 땅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Ⅰ. 룻의 서약과 충성
오늘 본문 말씀은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길에서 나눈 대화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가뭄의 고통을 인내하지 못하고 잠시 잠깐의 유익을 위해 이방 땅 그것도 예루살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모압 땅으로 이민 간 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뒤늦게 유다 본국행을 결정하자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도 당시의 풍습을 따라 시어머니와 함께 유다 땅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세 과부의 행렬이 얼마나 초라하고 힘이 없었을까요? 한참을 말없이 걷고 있던 시어머니 나오미가 걸음을 멈추고 며느리에게 말을 꺼냈습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의 가는 길에 자네들이 굳이 따라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네… 나는 아들도 없으므로 아무런 기업도 자네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없네! 거기다가 유다 땅은 자네들을 반갑게 맞이하기보다는 원수들의 딸로 미워하며 괴롭힐 것이 뻔하네! 과부로서의 고통은 나로서 족하니! 자네들은 젊고 앞길이 창창하니까 새로운 남편을 만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네 … 자네들이 죽은 자와 나를 선대(善待)한 것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선대하시기를 원하노라.”(룻 1:8-9)
그러나 착한 마음을 가진 두 며느리는 울면서 매달렸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10절)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설득했습니다. “나를 따라와 봐야 아무런 소망이 없다. 나는 나이 늙어 남편을 새로 맞이할 수도 없다. 설령 내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서 아들을 낳은 다고 해도 그 아이가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하겠느냐? 나는 여호와의 징벌을 받아 과부가 된 것이지만 너희는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러니 내 딸들아 나를 더는 괴롭게 하지 말고 모압 땅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11-13절)
이 말을 들은 큰며느리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애절한 사랑의 마음을 읽고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모압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 룻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함께 따라가겠다 합니다.
나오미는 떨어지지 않는 룻을 다시 설득합니다.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질 않느냐?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룻은 그렇게 세 번이나네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시어머니에게서 들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룻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고집을 부렸을까요? 나오미에게 남은 것이 뭔가 있는 것일까요? 숨겨둔 재산이라도 있었던 것일까요?
나오미는 룻을 어떤 며느리로 생각했을까요?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21절)는 말씀을 통해 나오미는 물질적으로 환경적인 관점에서 그 어떤 것도 도움을 줄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며느리 룻을 무척 짐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라고 충고한 것입니다.
사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는 쉬운 관계가 아닙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진정한 마음으로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룻은 시어머니가 알아주든 말든 한결같이 따랐습니다. 충성을 다했습니다. 세 번이나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매몰찬 만도 한 대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유다 땅으로 들어가기로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단호하게 자기 결심을 나타냈을까? 상상을 해보십시오!
요즘 세상에 이런 며느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모암사람을 원수로 취급하는 유다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지옥 같은 삶입니다. 거기다가 집도 없고, 재산도 없는 노인입니다. 의지할 남편도 없습니다. 딸린 자식도 없습니다. 과부가 생업을 꾸려갈 수 있는 사회도 아닙니다. 그저 하루 품을 팔거나 이삭줍기 등으로 연명해야 합니다.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길입니다. 지금까지는 한두 번 인사치레로 시어머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할지라도 이제는 못 이기는 척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끝까지 함께 가기를 서원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17)
며느리 룻이 왜 이런 고생길을 쫓아가겠다며 승부수를 던지는 것일까요?
어머니 나오미가 착하고 좋다 보니 그 심성에 이끌려서 그랬을까요? 나오미를 혼자 남겨두고 돌아가는 것이 측은해서였을까요? 나오미는 별로 자기를 알아주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있는데 며느리 룻이 그토록 끝까지 충성을 보이며 따라가겠다는 까닭이 참으로 궁금합니다.
더구나 요즘 같은 세상 풍조 속에서는 이런 며느리의 행동을 더욱 이해하기 힘듭니다. 자기 일생을 희생하고 사실 남과 다름없는 시어머니에게 무덤까지 충성을 다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정말 특별한 사연이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는 충성입니다.
1.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
나오미와 “함께 가겠다.”는 룻의 충성 속에는 먼저 개종이라는 커다란 신앙의 주제가 있습니다. 룻이 고향 모압을 떠나 낯선 이방 땅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맞닥뜨려야 할 부분은 신앙문제입니다. 룻은 나오미와 함께 살아오면서 시어머니의 신앙에 대하여 그의 삶과 인격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자세히 보고 경험하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룻은 어려서부터 모압의 신(神)이었던 그모스 신과 몰록의 신을 섬기는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모압의 신 그모스와 몰록에게 자신의 사랑스러운 자녀를 불에 던져 넣어 제물로 바치는 그런 흉악한 모습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며 자라왔습니다. 그러나 그모스와 몰록 신이 모압을 구원하거나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커가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신에게 자녀를 바친 부모와 가정이 심각한 슬픔에 잠겨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부터는 더욱 그모스와 몰록 신에 대하여 원망감과 불심감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 나오미는 자신의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사하며 찬양함 속에 평안함을 잃지 않고 굳건하고 담대하게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계속 섬기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룻은 생각했습니다. “저런 여유와 미소 그리고 강한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저 강한 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렇게 담대하고 강한 민족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저런 하나님을 믿으면 어떤 시련과 환란과 역경이 와도 범사에 감사함으로 능히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는 믿음을 간구하며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룻이 시어머니를 쫓아 나선 승부수 요인이었으며, 또한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여인으로 탈바꿈시킨 핵심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은 왜! 주님을 믿고 따르고 있는 것입니까? ‘코로나 19’로 인한 거리 두기로 인해 자연스럽게 교회와 멀어진 지금 굳이 교회 출석을 하지 아니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데 지금도 열심히 교회를 출석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각종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까? 그런 삼중, 오줌 복음도 기복신앙으로 교계에서 퇴치된 지가 꽤 오래인데.
여러분들은 교회로 향하는 발걸음을 무엇 때문에 멈추고 있지 못한 것입니까?
2. 시어머니의 넓은 사랑과 참된 인격
룻의 충성 속에는 신앙의 개종과 더불어 유다의 귀화라는 두 번째 주제가 있습니다.
최근에 축구선수와 농구선수 등 여러 해외 국적을 가진 운동선수들이 한국으로 귀화를 통해 자신의 이익과 아울러 국가의 이미지를 높이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룻이 찾아가는 이스라엘 땅에는 비록 가뭄과 기근이 끝났지만, 아직도 과부가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땅입니다. 문화가 다르고 풍습이 다른 타국에서 사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편견과 따돌림을 당하기 쉽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까다로운 민족입니다. 율법이 엄하고, 의식이 많습니다. 그 절차와 규례를 모르면 적응하기 힘듭니다. 거기다가 늙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낯선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생명을 건 처절한 모험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룻이 개종과 아울러 이스라엘 귀화를 결정한 승부수의 요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또 하나 감추어진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깊은 사랑과 진실함 친밀감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룻의 승부수가 던져주는 또 다른 핵심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룻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미련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였습니다. 육신으로는 전혀 이익을 나올 수 없는 그런 구조입니다. 그러나 룻이 본 것은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영적인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당장 잘 되고 복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믿을 때 조건을 보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니까 이제부터 모든 일이 잘될 것이야! 질병에서도 고침을 받고, 사업도, 취업도 결혼도 만사형통이 될 것이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당연하게 돌보고 축복해주실 거야!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가 되지...”
정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질병에 걸리지 말아야 하고, 집안 문제와 사업도 잘 풀려야 하고, 사고도 비껴가며, 아이들의 성적도 올라가야 합니까? 절대 손해 보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예수를 믿었음에도 재수 없는 일이 계속해서 터지고 직장에서도 쫓겨나고 사업도 엉망이 되는 등 불합리한 일들과 경험들을 부지기수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일들이 계속될 때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교회 목사들은 다 도둑놈이야! 세상 믿을 거라고는 내 주먹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룻은 남편과 두 아들이 죽는 등 온갖 불행한 일을 수없이 겪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나오미의 굳건한 신앙심을 보았습니다. 불행의 연속에서도 며느리를 따스한 사랑으로 돌보며 아끼는 배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더욱이 타국 생활 십 년 동안 모압의 이방 문화에 전혀 물들지 않은 나오미를 보았습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감사 찬양의 신앙이 더욱 깊어져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듯 신앙이란 조건이 아닙니다. 환경이 아닙니다. 물질이 아닙니다.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화가 참된 신앙인의 밑바탕에 쌓여있습니다.
결과를 놓고 보면 룻은 탁월한 선택을 했습니다.
시집을 와서 시댁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친정에서 알고 있는 모압의 신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셨습니다. 모든 신 위에 뛰어난 신이셨습니다. 다른 신들은 허망한 것이었고,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셨습니다.
그래서 룻은 죽기를 각오하고 나오미를 선택하기로 승부수를 던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룻은 나오미의 코치에 따라 새 남편을 맞게 됩니다. 보아스는 자상하고 늠름한 새 남편입니다. 그리고 룻은 오벳을 낳았습니다. 오벳은 다윗 왕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그리고 룻은 영광스럽게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게 됩니다.
세상 계산법에 의해서 따졌다면 룻은 이런 영광을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룻은 아주 바보 같은 계산과 순종을 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신앙 계산법을 따랐습니다. 지금 당장은 손해를 보고 어리석고 미련해 보이지만 룻은 하나님이 더 귀하고 소중하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떠나 모압으로 돌아가는 순간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 혼자서 믿고 따를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룻은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16절)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Ⅱ. 룻의 영적교훈
룻이 던져주는 복음의 진수는 16절과 17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1. 미래를 시어머니와 함께
"어머니께서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는 곳에 나도 머물겠습니다"(16절)
함께 먹고 함께 자겠다는 것입니다. 몸만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함께하겠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삶 전부를 나누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어머니와 함께하겠다는 것입니다.
삶을 나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리고 누구와 함께 나누고, 거기서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삶을 나누기를 원하십니다.(요15:26-
27,요16:4) 문제는 우리가 나의 삶을 예수님께 드리지 않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나의 삶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고 그분과 함께 영원히 거하며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므로” 풍성한 열매와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 믿음의 공동체
16절 후반부에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
여기서 백성이라는 말은 시댁 쪽 사람 즉 유다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미 나는 세상인 모압을 떠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시댁 사람과 친정집 사람을 구별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구별하기를 좋아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영남권과 호남권이 싸우고, 남한과 북한이 싸우고, 심지어 경기도마저 경기북부와 경기남부 둘로 가르자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정치권의 잇속 때문에 생겨난 일이지만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교회도 서로 구별하고 편을 가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파가 다르다고 우리가 더 정통이고 보수 다 하며 서로 물어뜯고 싸우고 있습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주님 앞에 설 때 우리는 모두 주안에서 형제이고 자매입니다.
3. 죽음까지 함께
17절에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어 거기 장사 될 것이라.”합니다.
죽어서까지 나오미를 떠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과장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를 보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 아시아에서는 무덤이 가족묘 형태로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가족이 한 무덤에 묻혔습니다. 무덤은 연한 암석에 굴을 뚫거나 자연 동굴을 이용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무덤 안에 사람 모양으로 파놓은 홈에 시신을 안치합니다. 그렇게 시신이 썩을 때까지 놓았다가, 뼈만 추려서 그 아래 파놓은 석실에 보관했습니다. 결국, 식구들의 뼈는 석실에서 만나게 됩니다. 성경에 조상에게로 돌아간다는 표현은 이런 장례 풍습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부부가 죽으면 나란히 합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관을 따로 해서 묻는 것입니다. 실제로 뼈와 뼈가 만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뼈와 뼈가 만납니다.
룻은 죽음과 무덤까지 이르는 충성을 맹세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여호와의 이름을 들어 맹세하고 있습니다.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17절) 그 당시 유대인들은 약속을 어길 때는 신의 저주가 있을 것으로 맹세했습니다.
룻이 보여준 결단성 그리고 믿음을 향한 열정 그리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향한 사랑의 고백과 친밀감 그리고 진실성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몸 된 교회를 부흥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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