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목회자료

[스크랩] 바람직한 주일 성수

늘찬양 2007. 7. 24. 11:20
바람직한 주일 성수




- 청년/대학부 목장 양육 참고자료 1, 2005년 9월 -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전세계에 걸쳐 세속주의의 물결이 범람하는 복잡한 시대를 살고 있다. 문명화된 사회는 주 5일 근무를 채택하고 있고 주말은 여행, 휴가 및 여가선용의 기되로 사용하는 경향이 점증하고 있다. 현대 생활의 복잡성의 증가, 상호 의존의 심화로 인해 전기, 난방, 냉방, 전화,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 신문 등을 한 주간 내내 요청하고 있다. 이동중인 사람들은 주일에도 비행기, 택시, 버스, 철도 및 호텔, 식당 등의 서비스표를 필요로 하고 있다. 게다가 레크레이션 분야를 비롯한 많은 상업시설들이 일주일 내내 문을 열고 있으며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수익을 올리기 위해 주일 영업의 유혹을 받고 있다. 이것은 주일과 안식에 대한 교회의 새롭고 분명한 지침이 제공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조차도 주일 성수에 대한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이를테면 주일성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경찰관, 소방관, 의사, 간호사의 경우 주일성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요하다.




한국의 초기 복음이 들어올 때 선교사들을 통해 전래된 청교도적인 주일 성수 개념이 현대사회에서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주일을 레저, 여행, 관광, 스포츠의 기회로 활용하면서 주일예배조차 무시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그동안 배워왔던 전통적 안식일 신학과 엄격한 주일성수 관행이 잘못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 안식일관에 기초하여 정립할 필요가 있다.




서론




1) 안식일의 기원




안식일은 언제 처음으로 제정되었는가? 안식일은 창세기 2장 2-3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창조의 규례이다. 따라서 그것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모든 인류가 영원히 지켜야 할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도덕법이다.




2)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




교회 사적으로 볼 때 십계명의 제 4계명에 대한 입장은 세 가지 스펙트럼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제 4계명은 모형이요 그림자로서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되었으므로 신약시대에는 제 4계명이 폐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과 주일에는 단절이 있다.

이것은 종교개혁 시대 때 재세례파의 주장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안식일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날이 주의 날이라는 관점이다.

둘째, 흔히들 안식일주의라고 부르는 입장이다.

이것은 제 4계명이 복음 시대에도 문자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견해이다. 이 핵심적 주장은 제 4계명이 단지 모세 율법의 한 부분일 뿐 아니라 십계명의 다른 요소들과 함께 창조의 규례라는 것이다. 청교도들이 이 견해 주창자들이다. 주일을 성수하는 것이 보편적이고도 영속적인 의무라는 것이다.

안식일주의 입장의 지지자들은 주일을 합당히 지키는 방법이 온 종일 공적 예배나 사적 경건을 위해 바치는 것이라 믿는다(청교도들) 이 주장은 종교개혁 직후에 대두되어 17세기부터 19세기초에 이르기까지 영국 청교도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미국에서 안식일주의는 19세기까지 대부분의 주요 교단들이 흔들리지 않고 굳게 견지한 신념이었다.

셋째, 제 4계명의 모형적인 부분은 폐지되었지만 그 실체는 아직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인데 문자적 육체적 “안식”은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영적 안식”의 모형이라고 본다.




질문) 현대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안식일 문제

그렇다면 음악회나 미술전람회에 가는 것은 어떤가? 레크레이션을 하는 것은 어떤가? 주일에는 일체 돈을 쓰지 말아야 하는가? 주일에 자녀들을 학원에 보내는 것은 어떤가? 꼭 주일에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금요일, 토요일, 주일에 예배 드리면 안되는가?




1. 성경에 나타난 안식일과 주일




1) 구약의 안식일

안식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 나오는 것은 창세기 2장 1-3절이다. 안식의 기원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 제 7일에 안식하셨던 사건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안식은 어떤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완성하신 후 안식하셨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들을 집중적으로 묵상하도록 초대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셨다는 말의 의미를 하나님이 그 날을 인간에게 복이 되게 하셨다는 의미, 혹은 하나님이 그날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 복의 내용은 노동의 의무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루하게 하셨다’는 말씀은 바로 모든 인류를 위한 보편적 제도로서의 안식일을 준수하라는 명령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안식이 인간을 위한 모범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6일간의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제 7일에 쉬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도 제 7일의 안식을 명하신다는 것이다.(출 20:11절). 참고로 신명기 5:15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기념하기 위해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이 있다. 또한 안식일과 관련하여 선지서에는 안식일 노동으로 인해 이스라엘 국가들의 흥망성쇠가 결정된다고 말씀하고 있다(렘 17:21-27). 그러므로 안식일에 일을 하는 사람은 극형에 처하게 되었다(출 31:13-17).




안식일은 인간을 위한 것인 동시에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 이레에 하루를 쉬는 것은 분명 인간을 위한 고려였다. 그러나 그 안식은 ‘거룩한’ 안식이요 ‘여호와의 안식’ 혹은 ‘여호와께 안식이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거룩하게 쉬는 날이었다. 구약의 안식일 성수의 핵심은 노동을 피하는 것이었다. 안식일에는 비록 가장 바쁜 때라 하더라도 기경과 추수 같은 본격적 노동은 물론이요(출 34:21), 상업과 상품의 운송도 금지되었다(암8;4-6, 렘 17:21). 불 피울 나무를 하는 것은 물론이요(미15:32-36) 가정에서 요리를 하거나 빵을 굽기 위해 불을 피우는 행위도 금지되었다(출35:3). 거룩히 쉬면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기억하는 것이다.




2) 이사야서에 나타난 안식일

후대의 청교도들이 주일에는 레크레이션과 스포츠를 금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아마도 가장 중요한 성경적 근거로 내세운 것이 바로 이사야 58:13-14절이다. 이 구절을 통해 본다면, 오락을 금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오락은 개인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적 오락이나 인간적 수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안’에서 얻는 즐거움이어야 한다. 나아가 본문은 안식일을 특별한 날, 즉 존귀한 날로 여길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청교도들처럼 주일을 기독교인의 안식일이라 생각한다면 주일에는 모든 오락과 운동을 삼가야 한다.




그러나 칼빈은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를 ‘모든 정욕들과 사악한 생각을 삼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히 여기는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일에서 해방되어 천국의 생활을 명상하는 것이다.




3) 에스겔서에 나타난 안식일

여기서 안식일은 성화와 관련된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때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다. 에스겔 20:12-27절이 바로 그것이다. 안식일은 표징이다. 하나님은 그것에 의해 자신이 이스라엘을 성화시키는 분이심을 그들로 인정하게 하고자 하신다.




4) 신약성경에 나타난 주일과 안식일




(1) 예수 전후 시대 유대인들의 안식일주의

바벨론 유수 이후의 구전과 ‘옛 사람들의 가르침들’을 포함한 미쉬나를 보면, 안식일에 금지된 40에 하나 감한 39가지 일들이 나온다. 거기에는 실을 한 줄만 꼬는 것은 가하나 두 줄을 꼬는 것은 불가하며 한 바늘만 꿰는 것은 금지되나 두 바늘을 꿰는 것은 허용되며 알파벳을 한 글자만 적는 것은 노동으로 간주되지 않았으나 두 글자를 쓰는 것은 노동으로 간주된다. 안식일에 이를 잡는 것은 허용되었으나 벼룩을 잡는 것은 불허했는데 이는 벼룩이 일종의 육식 동물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는데 불을 피우고 끄는 것, 물건을 여기서 저기로 옮기는 것 등을 비롯하여 파종, 기경, 추수, 타작, 베짜기, 방적 등에 대한 지침이 거기에 나와있다.




그 당시에는 성경이 아닌 ‘옛 사람들“의 전통이 유권적으로 기능했다.

위에서 말한 39개조에는 또 각 조항마다 7개의 세칙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 조항을 면제받을 수 있는 세칙도 만들었는데 예를 들면 안식일에 5리, 즉 약2킬로미터 이상의 길을 가지 말아야 한다는 법이 있었다. 그러나 부득이 그 이상의 길을 가야 할 일이 있는 경우에는 그 전 날 미리5리 되는 지점에 음식을 가져다 두면 부엌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가는 것으로 간주되어 그것이 허용되었다.




(2) 복음서에 나타난 안식일관

예수님은 이 땅에 있을 때 안식일을 지켰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주의 뜻을 행하였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하나님 말씀을 가르쳤다(눅 4:16-21). 한편 예수님께서 보실 때 유대인들의 안식일주의는 경건의 외양은 있었지만 일종의 외식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바리새인들의 경직된 안식일관을 타파하고자 하는 강한 의도를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복음서에 가장 흔히 나타난 사건들 중 하나는 예수께서 안식일 준수와 관련된 문제로 인해 바리새인들과 대립되고 마찰을 일으킨 것이었다. 한편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안식일과 관련된 충돌을 일으킨 것은 거의 모두 치병 사역을 행할 때였다는 점이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려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간과하는 것이었다.




- 누가복음(13:10-17),

- 요한복음(요5:1-5, 9:4),

- 마가복음(2:23-38, 3장),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안식일관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양’ 오해한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해명하였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이레 대한 율법주의적 오류에 빠진 것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지니...’(출20:10) 하는 율법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한 때문이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무위(無爲)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최고의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한 관점에 의하면 병자를 고치거나 허기를 면하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도 안식일을 범하는 죄에 해당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거나 인간의 기본적 필요들을 채워주는 행위를 하는 것은 안식일 계명을 침범하는 것과는 무관했다. 병자의 치유나 굶주린 자들을 먹이는 것은 오히려 안식일에도 권장되어야 하는 선행이었다. 안식일에 금지되는 것을 ‘자기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태복음(마 12:6,8)

안식일에 시장기를 면하기 위한 행위를 하는 것은 예수님이 보시기에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구약에 나오는 다윗과 진설병의 예를 들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따서 비벼 먹은 제자들의 행동을 정당화해 주는 인간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셨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무시하거나 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정규적으로 회당에 들어가시거나 예배에 참석하셨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해석, 즉 할라카와 충돌했지 모세의 법 그 자체와 충돌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리새인을의 왜곡된 기준에 의하면 예수는 안식일을 범했다.

* 할라카는 서기관들에 의해 작성되어 전수된 율법적 명령들과 규칙들의 모음집으로서 모세법의 유권적 해석이요 적용으로 받아들여졌다.




2. 신약성경에 나타난 주일

드로아교인들은 안식 후 첫날 저녁에 떡을 떼며 성만찬 모임을 통해 예배를 드렸다. 고린도 교인들도 매주 첫날 모임을 갖고 연보를 하였었다. 이들은 주일에 모여 부활의 주님을 기념하고 그들을 위해 몸을 버리시고 피흘리신 구속주를 기념하기 위해서였다(사도행전 20:7, 고린도전서 16:2, 요한계시록 1;10)




3. 안식일에서 주일로

일요일이 안식일을 제치고 그리스도인의 회집일로 선택, 정착되었던 이유는 안식 후 첫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안식후 첫날’이 ‘주의 날’로 불리게 된 것은 늦어도 1세기 중이었다. 그날 그리스도가 부활했고 그것은 그의 주되심을 온 우주에 선포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날이 ‘주의 날’, 즉 우주의 주님이신 분으로서의 능력이 드러난 날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주의 날’이라는 명칭은 예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자신의 주되심을 온 우주에 선포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너무나 강한 감동과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모든 날을 제쳐두고 그리스도가 부활한 바로 그 요일에 매주 모여 교제하고 부활의 주를 예배하기 시작했다.




4.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역사 신학적 접근




1) 고대 교회의 안식일 신학과 주일

2세기에는 일요일 예배에 대한 언급이 더 흔해진다. 2세기초의 문헌들에는 ‘주의날’이라는 문구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당시 주일에 정기적 예배가 드려졌다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켰듯이 매주일을 지켰다. 공식적으로 주일이 휴무일이 되기 시작한 것은 321년 콘스탄틴 황제의 칙령에 의해 주일이 안식의 날로 선포된 때이다. 황제는 일요일에 사람들이 직업상의 일을 계속 수행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380년에 기독교를 국교화한 데오오시우스 황제는386년에 칙령을 내려 일요일 휴식법을 더욱 강화했다. 신학적 저술에서 안식일과 주일의 연관이 명시적으로 주장되기 시작한 것은 중세에 가서야 비로서 일어난 일이었다.




2) 중세 교회의 안식일 신학과 주일

중세의 안식일 신학은 토마스아퀴나스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일요일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공 예배를 드리는데 할애되어야 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주일에는 자비의 일과 부득이 한 일은 허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3) 종교개혁 시대의 안식일 신학과 주일

칼빈은 주일 성수를 자아를 죽이는 것과 하나님 일의 묵상에 두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주일에 노동을 중지하는 것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에 따르면 주일은 ‘나태한 휴식’이 아니라 ‘예배와 묵상’에 바쳐져야 한다. 칼빈은 7일에 한 번은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의미에서 주일이 안식일을 계승했다고 본다. 칼빈은 올바른 주일 성수의 방법이 주일 하루 종일을 종교적 활동에 바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공예배를 드리고 남은 시간은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일이 제정된 것은 단지 설교를 들으러 오는 것뿐 아니라 남는 시간을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바치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말했다. 칼빈은 주일에 문자적이고 육체적으로 일상 업무를 중지할 것을 요청한다.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예배를 비롯한 종교적 활동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자비롭게 엿새를 그들에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시간의 불과 칠분의 일, 즉 이레에 하루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귀찮고 짜증스럽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배은망덕이라고 칼빈은 지적한다.




또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하라’라는 말씀도 엿새 동안 계속 일만 하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은 우리가 안식일 외에도 우리 자신의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그는 해석한다. 칼빈은 이 말씀이 엿새 동안 꼬박 일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일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주셨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레에 하루를 예배를 위해 떼어 두도록 요구하시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레에 한번 온 정성과 주의를 기울여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공적이고 사적인 예배를 드릴 충분한 시간을 제공하기위해 칼빈은 주일에 일상적인 업무를 중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아가서 그는 주일에 레크레이션이나 스포츠를 하는 것에 강하게 반대했다. ‘만일 우리가 주일에 기분내고 게임하는 데 사용한다면 그게 하나님을 제대로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놀리는 것이요 그의 이름을 아주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칼빈은 주일에 상점이 문을 닫아야 하고 여행은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주일을 범하면 한 주간 내내 우리는 짐승처럼 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5. 청교도들의 안식일주의

17세기 이후의 청교도들은 안식일 엄수주의와 유사한 방식의 주일 성수론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주일에 노동과 스포츠, 그리고 레크레이션을 금지하였다. 주일 하루를 종일토록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였다.

청교도주의의 상속자로 미국 청교도 신학과 신앙을 최종적으로 완성한 18세기의 조나단 에드워즈는 청교도들의 전통적인 안식일관을 그대로 고수 내지는 강화했다.

에드워드는 한 주의 첫날을 안식일로 지키라는 분명한 명령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하는 반론에 대해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의 본성에 어울리게 다루신다면 혹은 우리의 능력에 맞게” 대하신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대답했다. 말하자면 이 문제에 관한 한 성경의 메시지를 “새겨서 들어야”하며 명백한 표현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레 가운데 하루’의 리듬이 계시적이라는 점이다. 이레 중 하루가 안식과 종교 활동을 위해 바쳐져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뜻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예배의 시간을 고정하는 것이 십계명의 제 4계명의 의도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뜻은 복음 시대에 있어서 한 주의 첫날이 그 날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도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폐지될 것임을 암시하셨다. 그리스도는 창조주로서 유대인들이 기념하던 그 창조 사역의 주체였다. 그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째 되는 알 모든 일을 쉬시고 안식하셨다. 이제 그 창조주가 그 안식일에 사망의 사슬에 매여 있었다. 그 안식일에 쉬신 것이 아니라 무덤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날, 즉 안식일 다음날 부활하심으로 그 날을 자신의 안식일로 택하셨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그 사실의 의미를 알아 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자기 신랑이 무덤에 묻혀 있는 날, 즉 토요일에 교회가 기뻐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간파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날은 기쁨의 날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한 주일의 첫 날을 지키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의도적으로 이레의 첫 날을 영화롭게 하셨다. 안식후 첫날 그리스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사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날도 그 날이었다. 또 초대교회가 사도들의 지시에 의해 공예배로 모이기 시작한 날이 그 날이었다. 나아가 에드워즈는 매주일 첫 날이 신약성경에서 ‘주의 날’로 불린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주의 날이 거룩한 이유는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을 기념하여 지키는 날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주일을 다음과 같이 지킬 것을 명하고 있다

첫째, 주일은 사람을 위해 있기 때문에 감사해야 한다.

둘째, 주일을 엄격히 지킬 때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는다.

셋째,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일주일의 1/7을 주일로 바치는 것은 마땅하다.

넷째, 주일은 하나님이 특별한 은혜와 복을 내리시는 날이다.

다섯째, 주일을 엄격히 지킬 때 ‘기독교가 전반적으로 크게 번성한다’라고 주장했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주일 성수 방법

첫째, 죄악을 피해야 한다.

둘째, 모든 세상 근심과 세상적인 일들, 그리고 레크레이션을 삼가고 예수 그리스도아 그의 구속사역을 기억해야 한다.

셋째, 종교적인 활동에 시간을 사용해야 한다. 종교적인 활동이란 거룩한 명상, 성경이나 경건 서적을 읽는 것, 종교적인 대화와 모임 등을 포함

넷째, 구속의 사역을 축하하고 묵상해야 한다.

다섯째, 자선과 자비의 일을 행해야 한다.




* 청교도들은 주일을 “기독교의 안식일”로 공공연히 인정했다. 안식일과 주일의 연속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청교도 신앙의 거성 리처드 백스터의 주일 성수

“주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개인적으로 기도하고 가정 예배를 드리라. 교회에 가서 예배에 졸지 말며 집에 돌아온 후에는 점심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개인적으로 기도하고 교회에서 들은 모든 것을 복습하라. 즐거운 식사를 즐기면서 구속주의 사랑이나 주일에 적합한 어떤 것에 대해 대화하라. 식사 후에는 가족들이 모여 시편등을 찬양하거나 교훈을 하라. 한 번 더 교회에 나가라. 집에 와서 가족들이 모여 기도와 찬양 중에 하나님을 부르고 들은 설교를 복습하라. 그 다음에 식사를 하되 점심 때와 똑같이 너무 많이 먹지는 말라. 저녁 식사 후에는 어린이들과 종들에게 그들이 낮에 배운 것에 대해 질문해 보라. 시편을 찬송하고 기도로 마쳐라. 하루를 거룩한 생각과 함께 마무리하라”




상당히 부담스럽고 심지어 비인간적일 정도로 무거워보이는 주일 성수 방식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철저한 주일관 속에서 제1,2차 대각성과 영미의 복음주의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사실상 청교도 안식일은 청교도주의의 가장 큰 특징들 중 하나이다. 청교도 주일성수방식은 개인의 경건의 배양과 신앙부흥에 큰 도움이 될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날 지나치게 해이해진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볼 때 청교도들의 주일관은 재음미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바람직한 주일 성수




- 청년/ 대학부 목장 양육 참고자료, 2005년 9월-




교회사를 보면,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에 대한 해석이 시계추처럼 양극단을 오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선지 시대에 예레미야나 에스겔, 이사야 같은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 계명을 제대로 준행하지 않는다고 그들을 준열히 책망했다. 그러한 책망과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던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자 중간 시대와 예수님 시대의 유대지도자들,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안식일 계명을 율법주의적으로 이해 실천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그러한 위선적 율법주의에 일침을 가하히고 안식일의 의미를 바르게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영향을 가까이에서 전수받은 초대 교회와 교부들은 유대교적 안식일주의에 대한 반발로 제 4계명을 대체로 그리스도의 강림 이후 성취된 의식법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중세에 들어서면서 점차 교회는 세세하고 엄격한 안식일 규정들을 증가시켜갔다. 그리하여 중세 중반 이후 주일은 미신적이고 율법적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종교개혁가들은 로마 교회의 율법적인 주일 성수에 반발했다.

즉 제 4계명의 모형적 성격을 강조한 루터와 칼빈은 제 4계명이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엇다는 측면을 부각시켰다. 그 결과 개신교 신자들의 주일관은 상당히 느슨해졌다. 칼빈 사후 반 세기가 지난 1600년경 특히 영국 국교회 신자들의 주일 성수 태도가 너무 해이해졌을 때 청교도 니콜라스 바운드는 아주 엄격한 안식일 신학을 정립했고 그것은 청교도들의 안식일관으로 확립되었다. 안식일주의라 불리우는 이러한 태도는 19세기까지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으나 20세기에 들어선 이후 그것은 점점 빛이 바래져 가고 있다.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신학을 정립함에 있어서 수천년 동안 교회 역사상 많은 견해들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므로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이 주제를 접근함에 있어서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견해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1) 주일은 창조 규례에 속한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의 완성 직후부터 인류를 위해 이레에 하루의 안식일 제도를 의도하셨다. 하나님이 제 7일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암시한다. 시내산에서 주신 제 4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해 주어진 의식법이 아니라 인류 모두를 위한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담은 도덕법이다. 따라서 안식일은 창조의 신적규례를 가지고 있으며 주일은 그것의 연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주일의 특별함은 존재한다.




2) 주일 예배의 중요성

주일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성부 하나님과 부활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다. 주일에 해야 하는 일차적인 일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송을 드리고 그의 은혜를 묵상하는 것이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안식일이다(fp 23:3, 민28:25, 출 31:13, 레위기 19:13, 사 1:13). 많은 초보적 신앙을 갖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일 예배 참석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최소 최후 표지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그리스도인이 주일 예배 참석마저 소홀히 할 정도가 된다면 그는 스스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할 수 있는 최종적 근거를 상실하게 될 위험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 공예배에 모이는 것을 소홀히 한다면 기독교는 틀림없이 쇠퇴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주일 예배에 참석을 통해 신앙인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신앙을 고백하며 믿음을 강화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며 성도의 교제를 가지고 교회에 봉사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주일 예배는 개인이나 교회적으로 영적 사활이 걸린 관건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주일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는 영적으로 부흥을 체험하고 그 반대의 상태에 있는 교회는 필연적으로 침체하게 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회집일은 ‘이레에 하루’의 리듬을 따르는 것이 좋다. 이것이 창조때부터의 리듬이다.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엿새 동안의 사역 이후 이레째 쉬는 모범을 보여주셨다. 이레에 하루의 안식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모본으로 제시한 것이며 교회가 2000년 동안 거의 아무런 이의없이 지켜 온 전통이다.

이레마다 공예배로 모인다면 어느 요일에 회집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다른 어느 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일인 “주일”을 우리의 에배와 안식을 위한 날로 삼는 것이 옳다. 주 5일 근무제가 보편화 되었으므로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 아침에 후딱 예배 드리고 2,3일 여행이나 장기 휴일을 즐기자는 식의 소소한 동기에서 예배일을 다른 요일로 바꾸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3) 기쁜날

주일은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주의로 지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기쁜 날로 지켜야 한다. 심지어 구약에서도 안식일을 즐거운 날이라 일컬을 것을 권고하고 있으면(사 58:13) ‘안식일의 찬송시’가 있었다(시92편). 그러므로 주일 성수는 해야 한다거나 하지 않아도 좋다 하는 논란이 어울리지 않는 문제이다. 그것은 율법이기 이전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모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고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이다. 더불어 주일을 축하하는 것은 혼자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주일에는 다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고립되어 홀로 지내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건전하지도 않다.




4) 안식일로서의 주일

주일을 지키고 누리기 위한 첫 단계를 일상적 노동과 작업을 중지하는 것이다. 즉 4계명을 지키는 방법은 주중에 엿새 동안 하던 일을 그치는 것이다. 제 4계명의 안식은 영적으로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리적 리듬상 이레에 하루의 휴식이 필요하고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셨다. 하나님이 인간의 신체를 그런 식으로 만드셨다. 하나님도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이레째에는 ‘쉬어 평안하셨다’(출 31:17). 여기에는 우리가 이레에 하루 고되고 단조로운 일상적 업무로부터 해방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의 경제 문제가 해결되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일주일에 하루 일상적인 노동에 종사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제4계명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안식일 계명에 숨어 있는 약속들을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내가 이레에 하루를 쉬더라도 하나님이 나의 필요를 채우시고 쓸 것을 공급해 주시리라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믿음이 없어 주일에도 문을 열고 일을 한다. 혹은 주일에도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어려울 것이라는 불안 때문에, 혹은 주일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해서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고 싶은 욕심 때문에 주일에도 일을 중지하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은 단지 주어진 주일 안식의 복을 스스로 걷어차는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과 탐욕이며 불신과 탐욕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커다란 죄이다. 영적으로 타락했을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이 오히려 그들에게 짐이 되었고 어서 빨리 안식일이 지나가길 바랬던 어리석은 모습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이사야, 예레미야)




그러므로 주일은 종일 종교적인 방식으로 하루를 보내야 한다. 예배와 말씀, 기도로 하루를 보내야 한다. 개인적인 즐거움이나 세상 일에 종사하거나 사사로운 활동을 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5) 주일은 문자적 안식을 포함하여 예배의 규범성도 갖추어야 한다.

만약 문자적 안식은 주일의 본질적 요소에 속하지 않으며 주일의 필수적 요소는 오직 예배 뿐이라고 인정하게 되면 주일이 삼일 기도회로 모이는 수요일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주일에 고수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 공예배 뿐이라면 그것은 수요일에도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6) 전인적 안식의 필요성

칼빈과 마찬가지로 청교도들 역시 주일 안식 속에 신자들이 한 주간 동안 쌓인 육체적, 정신적 피로와 긴장을 풀고 재충전한다는 차원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주일에는 영적 안식 같은 안식의 어느 한 측면만이 아니라 육체적 안식, 정신적 안식 그 모두를 망라하는 총체적 안식, 즉 전인적 안식을 누리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요 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에 공부나 일 등 일상적 작업을 중지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자신의 일’을 중지하는 방법들 중의 하나이다. 나아가 하루 종일 계속적으로 예배, 묵상, 찬송, 기도, 교회활동, 선행만을 하는 것은 보통의 인간에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다녀와서 잠시 피곤한 몸을 소파에 기대어 쉬거나 눈을 붙이는 것은 필요하리라 본다. 주일에 오직 종교적 일만 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현대사회에서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본다.




예화소개) 주일 성수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

한 주일에 폭설이 내려 자동차가 다닐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느 집사가 스키를 타고 예배에 참석했다. 그러자 그것 때문에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논란이 벌어졌다. 어떤 교인들은 그 집사가 주일에 스포츠를 했으니 권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다른 교인들은 “아, 폭설 핑계로 예배에 결석할 수도 있는데 스키를 타면서까지 참석한 것은 오히려 칭찬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하고 반박했다.

결국 그들은 그 집사에게 이렇게 물어보고 판정하기로 결론을 지었다.

“당신은 스키를 탈 때 즐겼습니까, 즐기지 않았습니까?” 이사에서에 안식일에는 “자신의 즐거움을 구치 말라”고 되어 있으므로 만일 그가 스키를 즐겼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안식일을 범한 것으로 간주되고, 즐기지 않았다면 무죄하다는 것이다.




- 주일에 쇼핑을 하면서 돌아다니느라 장시간을 소비한다면?

- 주일을 집안 대청소나 이사의 날로 잡고 그 일에 비지땀을 흘린다면?

- 대형 구장에서 야구나 축구 등의 운동 경기를 관람하면서 여러 시간을 환호하며 보낸다거나 본인 스스로 과격한 운동경기에 참여해서 녹초가 되도록 뛴다면?

(이런 경기가 있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배 시간보다 운동 시간에 대한 기다림으로 가득하게 되고 예배 시간에도 운동경기에 대한 설레임으로 가득하게 되고 결국 그날의 메인 이벤트는 예배가 아니라 운동이 될 수 있다)

- 텔레비전 앞에서 쇼프로 등을 보면서 여러시간을 보낸다면?




7) 자비와 선행의 날

- 주일에 일상업무를 중지해야 한다는 원칙에 예외가 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이 본을 보이셨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잘 정리되어 있는 것처럼, 자비의 일과 필수적인 일 혹은 흔히들 ‘부득이한 일’이라고 번역되는 일의 경우이다.

- 군인, 경찰, 소방관, 의사, 간호사, 열차. 비행기, 버스 등의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종사자은 주일에 부득이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비의 일이나 부득이한 일에 하지 않는 주일 근무를 상습적으로 요청하는 직업은 가능한 한 선택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만일 이미 그러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면 다른 직업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




8) 영원한 안식을 대망하고 연습하는 날

지상의 안식일은 성도들이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원하고 완전한 안식을 미리 맛보고 훈련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주일의 안식을 통해 이 땅에서 모종의 안식을 누리기도 하지만 미래에 들어가게 될 진정한 안식이 있음을 상기한다. 히브리서가 묘가하는 것처럼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

주일에 세상 일을 중지하는 것은 우리가 언젠가 지상에서의 우리의 모든 도모를 중지해야 하는 날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주일은 우리가 한 주간의 일을 중지하고 그것을 돌아보며 평가하는 날이다. 주일은 주님과 교제하는 날이다. 주일은 거룩한 안식의 날이어야 한다.





바람직한 주일 성수




- 청년/ 대학부 목장 양육 교재, 2005년 9월 -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의 가장 큰 차이를 말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주일에 교회를 가는가? 그렇지 않은가? 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수준이 향상되어 여가 활용에 대한 관심의 비중이 높아지고 여러 가지 교리에 대한 생각들이 다원화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주일의 위상이 예전같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일이 어떤 날인지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주일 성수일까요? 단지 주일에 교회 다녀오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일까요? 오늘은 바람직한 주일 성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도입질문

1) 당신은 보통 주일 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자신의 주일 일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2) ‘주일을 지킨다’라는 말을 흔히 교회를 가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 외에 어떤 뜻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본문 : 출애굽기 20:10, 마가복음 3;1-5




1. 본문 관찰

본문은 하나님께서 율법 가운데 안식일 규례를 선포하시는 구약의 말씀과 예수님께서 바로 그 안식일에 바리새인들과 올바른 안식일 이해에 대해 논쟁하시는 신약의 장면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출애굽기 20:10을 근거로 할 때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명하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 안식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날이므로 누구든 아무 일도 하지 말라

2) 바리새인들의 기준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기준은 무엇입니까?(2절, 막2;24참조)

-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누군가가 하고 있지는 않는가?

3)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정신의 본질을 설명하십니다. 요약하면 안식일에는 어떤 일을 해야 합니까?

-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살리는 것

4) 이 논쟁에 대한 결론적인 메시지는 이미 앞서 일어난 2장의 사건에서 예고된 바 있습니다. 예수께서 강조하신 안식일의 개념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2:27참조)

-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도움의 글

‘왜 구약의 가르침처럼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느냐?“는 질문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분명 주일에 대한 논의는 구약의 안식일 전통에서 출발합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예수님께서 다른 율법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의 정신을 계승하고 성취하셨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의 개념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은 구약의 안식일을 새롭게 계승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안식 후 첫날‘(행20:7)의 전통이 ’매주일 첫날‘(고전16;2)로 그리고 ’주의 날‘(계1;10)로 발전되어 간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과 다른 기록들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날 모여 말씀을 나누고 성찬을 거행하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일을 예수님께서 명하신 안식일 규례의 연장선 상에서 이해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2. 배우기

그렇다면 우리는 주일을 어떻게 규정하며 어떤 실천을 해야 합니까?




1) 주일은 문자 그대로 ‘주의 날’입니다.

성경은 안식일의 제정자, 안식일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출20:10)

(인자) 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12:8)

따라서 주일이라는 개념 역시 인간들이 임의로 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셔서 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이기 때문에 다른 일과는 분명히 다른 성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함’입니다.




2) 주일은 ‘안식’의 날, 즉 ‘쉬는 날’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 날을 구분하여 거룩하게 하신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우리들도 쉬기를 명령셨습니다.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신5:14)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방식이 누구를 위해 필요한 것일까? 하나님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위해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 명령의 수혜자는 누구입니까? 쉬는 날 없이 일해야만 했던 종들과 육축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던 목적과도 같이 안식일 역시 사회적인 약자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




3) 주일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금기를 깨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일을 지키는 것이 바리새인들이 주장했던 것과 같이 단순히 ‘하지 않는 일’의 수를 늘리는데 있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일은 하나님의 날이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드신 날입니다. 그렇다면 그날에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 하거늘(막3;4)




주일에 우리는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항에 묶여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 것을 보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주일에 올바르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1) 주일은 자신을 위한 일을 멈추는 날입니다.

사실 안식일 규례에 대한 조항들(출20:10, 출23;12, 신5;14)의 정황을 보면, 여기 나타난 ‘일’은 분명 당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나 또한 자신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서 해야만 했던 일이었음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날 자신의 소유와 쾌락만을 위한 일을 중지할 것을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2) 주일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날입니다.

안식일, 주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날을 하나님을 위한 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데 보내야 합니다. 이 날 우리가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말씀을 배우고, 서로 교제를 나누고, 교회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섬김의 일을 하는 것은 모두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3) 하나님의 일에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단지 우리가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고 교제를 나누는 일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중시하신 것처럼 우리는 주변의 고통받는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을 행하는 그리스도의 대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3. 적용하기




1) 지금까지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당신의 주일 시간 사용에 대해 진단해 보십시오

- 당신은 주일에 자신의 소유와 쾌락을 위한 일을 최대한 중단하고 계십니까?




- 당신은 주일에 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2) 앞으로 주 5일제 근무가 실시되면 교회가 ‘주일성수’문제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당신은 금요일 오후 2박 3일의 여행을 떠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출처 : 인터넷로고스선교회
글쓴이 : lemalogo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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