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목회자료

[스크랩] 성도와 주일성수

늘찬양 2007. 7. 24. 11:14
성도와 주일성수


    성도와 주일성수 ------성경적 측면에서 본 주일성수------- ▶▶ 1. 서론 우리는 아래의 몇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안식일의 올바른 개념은 무엇인가? 안식일이 주일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주일도 안식일과 동일하게 율법적인 준수가 되어야 하는가? 안식일이 주일로 변경 되었는데도 제 사 계명은 유효한가? 안식일이 의무적인 것인가 아니면 폐지된 것인가? 나의 주일성수가 성경적인가 아니면 전통적인가? 이런 질문에 명확히 대답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도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논리있게 말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이 주제가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지만 성경적 입장을 충분히 고려치 않고 관습과 관행대로(?) 주일을 보내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경건하고 순수하고 올바른 안식일과 주일 개념의 결여로 용어를 혼동하기도 하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안식일과 주일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준수 방법은 그대로 시행하고 있으면서 날짜만 바꾸어 놓는 모순점을 보기도 한다. 더우기 빼놓을 수 없는 문제점은 다양하고 분주한 이 시대의 생활과 사업은 경건한 주일성수를 방해하고 오락적 탈선으로 주일의 세속화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반대적인 현상으로 이 날을 신비적인 축복의 날로 여겨 율법주의 내지 의식주의 경향에 젖어 있는 현상도 본다. 이런 현상들은 결국 성도들의 인식부족에서 연유된 것이며 이것은 곧 지도자들(교회)의 교육부재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교육을 위한 충분한 자료로 주일성수에 관한 성경적, 교회사적, 목회적 측면의 연구가 선재 되어야 함은 지당하다 하겠다. 이 세가지 측면에서, 첫 번째 것은 다른 두 측면, 즉 Context의 Text가 됨으로 그 중요성이 더하다고 본다.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스타일의 예배를 구사하는 현 한국교회에 바람직한 주일신학관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미력하나마 성경이 위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지 고찰함으로 성경적 주일성수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본고의 일차적인 목적이다. 이것으로 인해 성장과 성숙이 겸비된 교회로 든든히 서 가기를 바랄뿐이다. 본 연구의 진행과정은 구약의 안식일에 대한 기원과 의미 그리고 준수사항을 살펴보고 다음은 신약시대, 예수님과 유대교 종교지도자들과의 안식일 논쟁을 통해 예수님의 안식일관을 이해하려 한다. 또한 바울은 안식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지 고찰해보고 아울러 히브리서 기자와 계시록 기자의 입장을 연구하고자 한다. 그리고 안식일에서 주일로의 변화와 이 과정에서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알아본다. 이같이 성경에 기록된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통전적인 고찰이 있은 후 여기서 나타난 진리를 근거로 주일성수의 실제를 제시함으로 본 논문의 결론에 도달하고자 한다. ▶▶ 2.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 안식일 논의의 핵심은, 이것이 창조명령(Creation Ordinance)에 기초한 것인가 아니면 율법에 기초한 것인가이다. 만약 창조명령에 근거한다면 안식일은 영구히 불변하는 의무적 법칙이 되고 후자에 기초한다면 의식법인 제사제도와 같이 신약시대에는 구속력이 없이 폐지 되었다는 입장이다. 이런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문제해결의 열쇠는 예수님이며 또한 바울과 다른 성경 저자들의 계시적 교훈이다. 구약의 안식일을 주님과 바울이 어떻게 이해했으며 가르치고 있는지 알아 봄으로 주일과의 관계를 연구한다. 2.1. 구약의 안식일 안식일의 기원이 인위적인가 아니면 신적인가? 안식일의 분명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날을 어떻게 지키라고 하셨는가? 이 절은 주로 위의 질문들에 대한 성경의 답변을 찾아 내는 일이다. 이것은 신약의 안식일과 비교하기 위해서 먼저 해결 되어야 할 과제이므로 성경 본문에 주의해야 한다. 2.1.1. 기원 안식일의 기원에 관한 다양한 이론 중에 일반적인 이론 몇가지를 살펴본다. 먼저는, 바벨론 기원설이다.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에 거주하게 되면서 가나안인들이 사용하고 있던 칠 일을 한 주 단위로 계산하는 주기 계산법을 도입해 안식일 제도로 변화,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나안인들이 이 계산법을 바벨론으로부터 전수 받았음으로 (Herold H.P.Dressler, The Sabbath in the Old Testament, ed. by D.A.Carson, From Sabbath to Lord's Day, Zondervan, 1982:22), 바벨론 기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바벨론의 주기 계산법은 달의 순환과 연관된 것으로 불규칙했기 때문에 이것을 근거로 히브리인의 안식을 추리할 수 없다고 쥬이트(P.K.Jewett)는 말한다(주일의 참뜻, 1994:12). 또 어떤 학자는 겐 족속으로부터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을 향하여 여행할 때 Kenife라 부르는 족속의 땅을 통과 하였는데, 그때 그 족속 가운데서 일찌기 성행하였던 토성(Saturn-토성의 날을 Saturday로 부름) 숭배에서 안식일이 유래 했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것을 신뢰할 수 없는 것은 한 주간의 날들을 혹성의 이름을 붙여 불렀던 것은 적어도 2세기 중엽이기 때문에 연대기적으로 맞지 않는다(상게서:13). 또다른 이론으로는 사회 경제적 기원설이 있는데, 이것은 안식일 제도가 매월 3, 4, 5, 6, 8, 10일을 장날로 정하고 그 날에는 각지에서 모여 물물교환을 하며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쉬었던 고대 장날 제도에서 유래했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안식일이 고대 장날이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고 오히려 매매하는 것을 통해 안식일을 더럽히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참고, 느13:15-22, 렘17:19-23). 위의 진술과 같이 이방세계 즉, 바벨론이나 겐 족속, 그리고 고대 사회의 장날에서 안식일이 유래 되었다는 것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 G. Sauter의 주장대로 안식일의 기원은 이스라엘 밖에서 설명될 수 없다 (키텔 신학사전 “사바투” 7권 1974:3)는 것이 본 연구의 기본적인 가정이다. 한편 안식일의 기원이 약 B.C. 1400년경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것으로 출발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William Rordrof, Sunday:The History of the Day of Rest and Worship in the Earlist Centuries of the Christian Church, Philadelphia:Westminster Press, 1968:103)), 대부분의 개혁신학자들은 이 제도의 기원을 천지창조에서 찾는다. 그 근거로 다음 몇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창2:1-3에 나오는 일곱째 날이 안식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에덴의 안식은 규례화 된 안식일의 명사와 연관된 ‘쉬다’라는 히브리어 동사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출애굽기의 말씀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 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이스라엘이 하늘의 만나를 먹을 때 하나님이 구체적인 설명없이 안식일 준수를 명하셨기 때문에 이것으로 모세시대의 기원설을 반박할 수 있다(출16:5). 만나가 주어진 것은 시내산 도착 4주 전이기 때문이다(출16:1, 19:1, 20:8). 이것은 곧 안식일 제도가 이미 선민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준수명령은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신명기 5장에서는 이 제도를 출애굽기의 구원역사와 연관 짓고 있음 (신5:12-15)에 반하여, 시내산에서 계명으로 주어졌을 때는 창세기의 창조 역사와 관련 짓고(출20:8-11) 있으므로 구속사적 입장에서 볼 때 이 제도의 기원은 창2:1-3이 가장 적합하다고 본다. 셋째, 히브리서 기자는 제4장에서 시편95:11을 인용하여 가나안의 안식(:8)과 에덴의 안식(:3-4)을 구별하고 있다. 이 구별에서 가나안의 안식의 근거가 곧 에덴의 안식임을 말하므로 안식일의 기원을 창세기 초라고 할 수 있다. Lee와 Murray교수도 안식일이 유대인이 광야에서 지키기 위해 제정된 것이 아니라 창조역사와 함께 시작 된다고 본다(Francis Nigel Lee, The Covenantal Sabbath, London:The Lord's Day Observance, 1966:62-3; J.Murray, The Sabbath Institution, London:The Lord's Day Observance, 1953:42). 이같은 근거로 볼 때 안식일의 기원은 이스라엘 밖에서 설명될 수 없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서도 늦은 시대 (시내산 언약)로 잡을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창조의 완성을 기념하라고 주신 창세기 2장의 제도임이 분명하다. 인간 역사의 시초에 기원된 것으로 창조명령과 관계된 것이다. 이것은 의식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며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구속력이 있는 제도로 제정된 것이다. 그러면 이같은 성경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안식일의 의의는 무엇인가? 2.1.2. 의의 안식일 제정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과 인간의 복을 위한 목적이 있다. 전자는 인간이 안식일을 다른 목적으로 보내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께 직접 봉사케 함으로 기쁨과 영광을 얻고자 함이며, 후자는 인간이 이 계명에 순종함으로 쉼을 얻고 기타의 복을 받는데 있다. 구약의 안식일은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창조의 완성을 의미한다.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가 완전하시다는 의미로 안식하는 것이다 (한정건, 창조에서의 안식의 의미, 1996:35). 더 이상의 창조행위가 필요 없다는 뜻으로 그것의 완전함을 나타낸다. 그래서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념하며 안식하는 날이다(Jewett 전게서:16). 여호와께서 안식하시고 복 주시며 거룩케 하셨듯이, 창조의 완성자를 본받아 인간도 똑같은 의미로 이 날을 지켜야 한다. 만약 인간이 이 날에 들판으로 나가서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은 곧 아직 피조물이 완성되지 못하여 안식할 수 없다는 뜻의 노동이 되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불신하는 행위가 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안식일의 노동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신하는 행위가 되므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을 내 백성에서 끊어 내라고 엄히 말씀하신 것이다 (출31:14-15). 이것은 하나님의 잔인성을 말하고자함이 아니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언약적인 측면에서 인간이 그 날을 준수함으로 창조의 완성을 드러내라는 강한 의미이다. 또한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는 창조의 완전성을 행위로 부정함이 되기에 하나님의 백성될 자격이 없다는 뜻이다. 둘째는, 구속을 기념하는 날이다. 안식일과 관련된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의 본문은 명백한 차이를 보이는데 전자는 창조사건과 안식일을 연관시키고, 후자는 애굽에서의 구원과 연결시키고 있다. 또한 앞 성경의 안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샤바트(ת��� ������ ���)이나 뒷 성경의 안식에 해당하는 단어는 므누하 (ה����� �וּנּ��� ���)이다. 샤바트는 ‘노동으로부터 쉰다’는 뜻이고 므누하는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에 관계된 모든 경우의 영적 은혜 속에서의 안식’을 가리키는데 신약에서는 카타파우시스 (καταπαυσις)로 나타난다. 단어 사용에서 알 수 있듯이 출애굽기는 안식의 근거를 천지창조에 두고 있지만 신명기는 해방과 구원이 안식의 근거로 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명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곧, 안식일은 애굽의 속박에서의 자유, 해방 그리고 구속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것이다. 쥬이트가 말하듯이, 이 안식일은 강하신 손과 편 팔로 애굽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대 구속 사역을 기념하는 날이다(전게서:17). 셋째는, 종말을 예표하는 의미를 지닌다. 구약의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질 자유와 평화와 구원을 예표한다.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야의 오심과 관련된 자유의 선포를 표현하는데 이 안식의 이미지를 사용하였다 (사61:1-3). 안식일의 끝에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안식과 같은 영원한 안식과 기쁨과 만족이 기다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구약의 안식일은 안식의 의미뿐 아니라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며 온 인류에게 미칠 영원한 안식을 예표한다 (G.Vos, 성경신학, 이승구 역 1985:159). 즉 육 일 동안의 노동과 이에 따르는 안식일과의 반복을 통해 현세뿐 아니라 내세에 목적이 있음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상게서:18). 칼빈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완전한 안식의 성취를 설명하고 있다. “이 안식일은 최후의 날이 올 때까지는 결코 완전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주님 안에서 안식의 축복이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 나아가 우리의 생활은 안식 안에서 진보하고 있다. 비록 기독교인들이 이 땅 위에서 안식의 기쁨을 누리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육체의 투쟁을 계속 하고 있기 때문에 ....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시기까지는 그 안식이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ook II, n.d.:396). 이미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안식이지만 한편으로는 최종적인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제정하신 안식일 제도는 적어도 창조의 완성을 기념하는 것,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속을 기념하는 것, 그리고 메시야가 주실 안식을 예표하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2.1.3. 준수 안식일을 어떻게 준수해야 하는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스라엘의 거의 모든 생활이 안식일과 무관하지 않다. 안식일 준수에 관한 사항을 하나님은 여러 곳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먼저 언약 백성들이 알아야 할 것은 이 날은 인간의 날이 아닌 여호와의 날(Jehovah's Day)이다. 인간이 육 일 동안 정당하게 일하고 오락을 추구하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이 날 하루는 그 분을 경배하고 섬기는데 온전히 바쳐야 한다. 왜냐하면 이 날은 여호와께 속한 날이기 때문이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출20:9-10상).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레19:3). 이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그의 백성들은 이 날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날을 여호와의 날로 알아 세속적인 모든 일들을 중단하고 여호와께 예배함으로 거룩하게 구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먹고 사는 문제로 안식일에 일하지 말며, 주인뿐만 아니라 종이나 자기 집안에 유하는 객과 심지어 짐승까지도 일하지 말 것을 요구하신다 (출20:10, 신5:14). 이것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대상의 범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우선 안식일에는 사적이든 공적이든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며(레23:3, 사66:23), 예배를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드러내며 구속의 은총에 감사해야 한다. 또한 안식일에 노동이나 상거래를 말라(느13:15-19) 고 하신다. 물론 이 본문은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고 식물과 물고기를 팔고 사는 유대인들을 책망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유대 백성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간접적으로 안식일의 노동과 상거래를 부정한다고 이해 할 수 있다. 만일 개인적인 일이나 가족의 일, 또는 학교공부나 회사의 일이 우리의 시간을 빼앗아 간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할 시간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안식일은 노동으로부터의 휴식을 의미한다. 우주만물을 완성하신 하나님은 쉬시면서 인간도 안식일마다 자신과 함께 쉬기를 원하신다. 안식일에는 만나도 거둘 수 없었고 또한 모든 처소에서 불을 피울 수가 없었다 (출16:25, 출35:3). 예비일에 만나를 두 배로 거둘 수 있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쉬게 하신다. 성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쉬면서 복 받는 날이다. 성일에 일함으로 얻은 이득은 결코 본인의 것이 되지 못한다.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며 오락을 행치말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말라(사58:13-14)고 하심으로 세속된 일이나 죄악된 일을 위하여 가는 발을 금하고, 운동, 등산, 극장 출입을 삼가고 저속하고 남에게 해를 주는 말을 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랍비들은 안식일을 위한 더 까다로운 규칙들을 많이 만들어 내어 유대인들에게 힘겨운 멍에가 되게 하였다. 예를 들면 사람이 옮길 수 있는 최소한의 양을 규정하거나 주전자에 쏟아 넣기에 충분한 양의 포도주, 상처에 바를 정도의 꿀, 물통의 손잡이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로프, 히브리어 알파벳의 두 자를 쓸 정도의 잉크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범죄자로 인정하였다 (쥬이트 전게서:19). 또한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을 정했다. 또한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소를 끌어 내어서는 안되고 함정에 빠진 사람을 사다리나 밧줄이나 다른 연장을 가지고 도와서는 안된다고까지 규정했다. 아무튼 안식일에 암탉이 낳은 달걀을 먹는 것도 주저할 정도로 엄격히 지킬 것을 요구했다. 이같은 현상들이 히브리 종교에서 나타남으로 원래 하나님이 원하셨던 안식일의 본질이 점점 퇴색되어 갔고 기쁨과 감사와 안식의 날이 오히려 짐이 되었다. “안식일에 관한 규례들은 한 올의 머리카락에 메달린 산과 같다. 왜냐하면 성경은 단순한데 반하여 규율은 너무 많기 때문이다” (R.T.Beckwith, W.Stott, Christian Sunday, 신현재 역, 서울:숭문출판사, 1985:41)라는 말은 좋은 시사가 된다. 안식년과 희년의 준수도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 여기에 그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가하겠다. 출애굽기까지는 사람의 안식을 말하지만 레위기 25장에 와서는 땅의 안식을 말한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2).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차지하면 땅을 안식하게 하라고 하신다. 이어 3절-5절에서, 육 년동안 밭에 파종하고 포도원을 가꾸어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게 하라고 하셨다. 칠 년째는 땅으로 쉬게 하며, 그 땅에서 나는 자연적 소출은 종들과 나그네와 짐승이 먹게 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육 년째 더 많은 소출을 얻어 구 년째까지 묵은 곡식을 먹을 것이다(레25:22). 그러므로 이 안식년은 사람과 종들과 나그네와 짐승들이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생활하는 해이다. 이것은 타락 이전의 창조질서로 돌아간 모습이며 창조질서의 회복이다. 안식년에는 땅을 놀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며 모든 채무자들의 채무를 탕감해 주어야 한다(신15:1-6). 또한 레위기 26장은 안식의 극치인 희년제를 말한다. 일곱 번의 안식년이 지난 후 나팔소리와 함께 찾아오는 제 오십 년째의 해는 그 땅에 사는 모든 거민들에게 자유가 선포되는 희년이다 (쥬이트 전게서:24). 희년(Jubilee)에는 모든 종들에게 자유를 주어야 하며 땅을 샀던 사람들이 땅을 돌려 주어야 한다 (레25:8-54, 27:17-24). 이같은 성경의 규례들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되, 풍족한 소산을 먹을 수 있는 것과 적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된다(레26:3-5). 또한 마음의 즐거움을 얻고 그 이름이 높아지며 물질의 복을 받게 된다(사58:14). 반면에 이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면 땅이 황폐해지고 그 땅을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레26:14-39). 특히 앞의 본문 34절-35절에서는 땅을 쉬게 아니할 때는 너희가 황무할 때 그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고 한다. 이 예언적인 말씀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바벨론 포로 칠십 년을 통해 성취된다 (대하36:15-21). 한정건 교수는 이것을, “이스라엘이 안식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여 땅을 학대 할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포로로 잡혀가게 하여 땅이 황무한 상태에서 안식하게 하셨다”고 해석한다 (한정건, 창조에서의 안식의 의미 1996:56). 안식일과 안식년 그리고 희년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나님의 쉬심은 물론 인간과 피조물의 안식을 위해 필히 규정대로 지켜져야만 한다. “안식년과 희년은 하나님의 준비와 약속에 대한 믿음을 고취하고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각자의 이웃 사람들을 향한 너그러움을 고무시키는데 그 의의가 있었다”는 쥬이트의 말을 공감한다(쥬이트 전게서:25). ▶▶ 2.2. 신약의 안식일 신약에서도 구약의 여러 유전들에 의해 안식일이 지켜지고 있었다. 유대인이신 예수님은 안식일을 어떻게 준수했는가? 그리고 초대교회와 바울의 안식일 개념은 어떤 것인가가 주목된다. 이것은 구약의 안식일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갖게 하고 또한 안식일과 주일의 관계를 설정하게 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안식일과 주일, 그리고 주일성수에 관한 타당한 실마리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2.1. 예수님과 안식일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막1:21, 눅13:10), 성전에서 성경을 읽으심으로(눅4:16) 구약의 율법의 권위와 타당성을 인정하셨다.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형식적 준수가 아니라 모든 율법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것이다(마5:21-48). 그래서 안식일의 유전과 형식을 강조했던 유대교 지도자들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마치 유대주의를 반대하며 구약의 규칙들을 반대하는 급진적인 입장을 취하셨던 것처럼 보인다.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먹는 제자들을 변호하며 유대인들을 꾸짖으신 것 (마12:1-8, 막2:23-28, 눅6:1-5), 안식일에 한편 손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 (막3:1-6, 마12:9-14, 눅6:6-11), 안식일에 어떤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고창병 든 사람을 고쳐 주신 것(눅13:10-17),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요5:1-15), 안식일에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쳐 주신 것 (요9:1-34)을 볼 때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이 안식일의 규례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모세의 율법에는 길가의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허락했다 (신23:25). 유대인들의 공격은 ‘안식일에 이삭을 자르는 것은 추수하는 죄며 그것을 손으로 비비며 입으로 부는 것은 도정하는 죄’ 라고 기록된 자기들의 유전집을 근거로 예수님을 비난한 것이다. 이들의 공격에 예수님은 구약의 원리로 설명하셨다.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은 다윗을 예로 드셨고, 제사장들은 안식일에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되지 않음과 호6:6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신다는 말씀으로 반박하셨다. 그 다음에 나오는 여러 논쟁거리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며 연약한 것을 치료해 주심으로 생겨난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도 안식일이라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것은 고칠 수 있으나 그 외에는 금지되어 있다. Halakah에도 안식일에 죽음이 임박한 병자를 고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손 마른 사람이나 고창병자, 38년 된 병자나 소경은 당장 죽을 위험이 없으므로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었다. 이 때에 예수님은 동물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다면 건져내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음을 말씀하신다. 고창병든 여인을 고치실 때에는 ‘동물이 놓임을 받아야 한다면 아브라함의 딸은 어떠하겠느냐’고 하시며 이 딸을 그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자비가 형식주의보다 더 중요함을 알지 못했던 유대 지도자들의 오류를 분명히 지적하시면서 안식일의 근본 정신을 교훈하셨다. 예수님은 이런 논쟁을 통하여 율법의 조항들을 해하실 목적이 아니라 안식일 준수에 관한 바른 이해를 촉구하고자 하신다. 또한 자신을 통하여 구약의 안식일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취되고 완성되었음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이 예수를 세상에 보내어 천국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가르치시며 병든 사람을 고치게 하신 것은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하시고자 함이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에서 그것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의도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사역을 통하여 우리는 자유와 참된 안식을 누려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안식일적 행동은 구약적 안식의 완성이 세상에 도래하였음을 보여주는 행동이 들어있다’는 쥬이트의 말(전게서:44)과 ‘예수께서 구약에서 이 날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 사역으로 성취하심으로 안식일의 완성이 되었다’는 Oscar Cullmann의 말을 긍정할 수 있다(Cullmann 1978:90). 2.2.2. 바울과 안식일 초대교회 신자들이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을 지켰다는 표현은 성경에 없다. 바울도 개종 이후 음식법과 축제법같은 의식은 지키도록 허용했으나 (그것도 양심에 따라 행할 것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심) 안식일 준수에 관한 명령은 없다. 그는 자신의 서신서에서 안식일에 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2:16-17). 이것을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말씀하시므로 실체가 옴으로 그림자가 완성되고 성취되었음을 말한다. 바울의 표현은 신자들이 이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졌기 때문에 더 이상 장래일의 그림자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오는 세계에 있을 영원한 안식과 연관시켰다. 그래서 골로새서의 주장은 안식일의 이중적 성취로, 그리스도를 통한 실체적 안식과 다가올 미래에 약속된 영원한 안식의 성취를 말한다. 영원한 참 안식에 관해서는 비록 바울 서신이라 말할 수 없지만, 히브리서가 설명한다. 3장에서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음을 지적하며(히3:7-18), 이 안식(가나안 땅에 들어 가는 것)은 궁극적인 안식이 아니라고 한다.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다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4:8). ‘그 후의 다른 날’을 지적하심으로 우리가 들어갈 언약된 궁극적 참 안식이 남아 있음을 말한다(4:9). 그러면서 우리에게 혹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까 유의할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4:1). 이 안식은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 그 안식이 예비되었지만 그리로 들어가기 위하여 조심할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 9절-1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 이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것들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함으로 그것을 지적하며 결코 이것이 구원의 방편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또한 롬14:5-6에,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라고 기록한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그 날이 안식일이든 주일이든 간에 날을 중히 여기는 자는 믿음이 연약한 자이다 (핸드릭센 로마서주석, 1984:226). 로마교회의 연약한 지체들이 일주일의 첫째날이나 일곱째 날을 지키고 존중했다고 해서 정죄 받거나 비난 받을 일이 아니고 각각 말씀에 의해 조명 되어있는 자기 마음에 확정하면 된다는 것이다. 유대 기독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든지, 이방 크리스찬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안식후 첫날을 지키든지 자유롭게 하라는 권면이다 (A.T.Robertson, Word Pictures in the New Testament, vol. 4, 1931:413). 날을 구별하는 사람이 업신여김을 받아서 안될 것은 그가 주를 영화롭게 할 목적으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안식일(날)에 관해 말하는 바울의 입장을 요약한다면, 일단 그 날의 준수를 부정하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통한 안식의 성취와 미래의 더 좋은 안식을 말하고, 이 안식일 성수가 구원의 방편이 될 수 없고, 날에 관해 양심의 명령을 거슬리는 바를 행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2.3. 신약의 주일 구약의 안식일 개념이 어떤 과정을 거쳐 주일로 바뀌었는지를 아는 것은 현대교회의 주일성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 날의 변화와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요소를 고찰해 봄으로 예수님 이후의 주일관을 알아보고자 한다. 2.3.1. 날의 변화 왜 기독교인들이 제칠일에 예배하지 않고 첫날에 예배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의 해답으로 카톨릭에서는 교회의 권위를 주장한다. 카톨릭의 변증가들은 칠일에서 첫날로 바뀐 것을 종교의식을 제정할 수 있는 교회의 권위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을 종교개혁자들은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는 것이 교회의 권위로 제정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크게 기만당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공격했다 (쥬이트 전게서:55 재인용). 안식일에서 주일로의 전환의 시기와 원인은 신약에서 찾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사도 요한이 보게되는 환상은 ‘주의 날’에 일어난다. 혹자는 이 날을 최후의 날로서 주님이 오시는 날로 이해하지만 (A.Deissmann, F.J.A. Hort) 이 날은 주 중의 첫날로 보아야 한다. ‘주의 날’이라는 표현은 이곳에서만 보이며 최초의 표현이다. 이것을 최후의 날로 볼 수 없는 것은 이 날이 주님의 종말에 관한 것이라면, 살전5:2과 벧후3:10에서처럼 ὴμέρα τού κυρίου(Day of the Lord)를 사용하였을 것이나 계시록에서는 κυριακή ὴμέ ρα(Lord's Day)로 썼다. 그들의 표현이 유사하기는 하지만 확실한 차이가 있다. 저자가 구약의 ‘주의 날’(Yom YHWH)을 번역할 때 LXX과 신약에서 볼 수 있는 최후의 날로서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고 κυριακή ὴμέρα로 사용한 것은 다른 것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고 본다 (쥬이트 전게서:62). W. Stott도 “계시록 1:10의 이 용어는 최후의 날이나 부활절을 가리킨다기보다 주의 첫날, 곧 그리스도인의 주일을 가리킨다” (A Note on the Word KYPIAKH in Rev.1:10, NTS, 12(1965-6):75)고 했다. Robert H. Mounce 박사도 그의 계시록 주석에서 쥬이트와 스토트의 견해를 지지하며, “이것이 주의 날인 이유는 주 중의 첫날에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승리하셨기 때문이고 ....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공경하기 위하여 매 주의 첫날을 택하였다”고 덧붙여 말한다 (요한계시록, 홍성철 역, 서울:생명의 말씀사, 1987:85). 그러나 이 날이 요한이 밧모섬에서 주의 계시를 받을 때 시작된 것은 아니다. 1세기 말 에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지켜졌던 것 같고 그 기원은 이로부터 약 40년 전인 바울의 고린도전서에서 발견된다. ‘주의 만찬’(고전11:20)이라는 표현이 ‘주의 날’보다 먼저 나왔음으로 ‘주일’이 ‘주의 만찬’에서 나왔고 그리스도인들이 공중예배의 절정인 이 만찬을 기념하기 위하여 모였던 날을 이 이름으로 불렀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쥬이트 전게서:63).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사도행전 20:7의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의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라는 말이 증명한다. 여기서 ‘모인다’는 동사는 예배를 위한 집회를 나타내는 전문용어이며 ‘ 떡을 뗀다’는 기독교인들의 식사나 바울의 ‘주의 만찬’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미 잘 알려진 형태의 기독신자들의 집회(예배)를 묘사하고 있다고 본다. 이것이 기독신자들이 첫날에 예배 드리기 위해서 모였던 확실한 최초의 기록으로 보인다. 한가지 의문으로 남는 것은 정확한 집회 시간에 관한 것이다. 상황으로 보아 분명히 저녁이었음으로 그것이 토요일 저녁인지 아니면 일요일 저녁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몇몇 학자들은 토요일 저녁이었다고 주장하나 (New English Bible은 토요일 저녁으로 번역 한다. Barclay) 대부분의 정통 해석자들은 로마 시간을 따랐던 이방 기독신자들임을 감안하여 일요일 저녁(Sunday evening)으로 받아 들인다 (Bruce, Cullmann, Robertson, Newman and Nida). 특히 Bruce는 그의 주석에서 고전 16:2의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하지 않게 하라”는 말씀이 그리스도인들의 안식 후 첫날 예배에 관한 명확한 표현은 되지 못해도 그 의미는 충분히 함축되어 있는 표현이라고 하여 (Bruce, The Book of the Acts, 1988:384) 주일예배를 지지한다. 안식일이 아닌 주일예배의 또 다른 증거 구절로 요한복음 20:19절과 26절이 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이 두 구절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제자들과 의심한 도마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자신의 몸을 나타내 보이신 것으로, 시기가 앞 구절은 ‘안식 후 첫날 저녁’으로, 뒷 구절은 ‘여드레를 지나서’(‘한 주일 후 그 날’의 뜻)로 되어 있다. 때와 시간을 나타내는 이 두 표현은 ‘주일’에 대한 같은 의미의 서로 다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안식 후 첫날을 예배일로 정했으며 저녁에 모였는가 아니면 아침에 모였는가가 숙제로 남는다. 날의 변화의 근거는 주님의 부활이다 (마28:1, 막16:2, 눅24:1, 요20:1). 구속의 완성으로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주 첫날 준수의 제정자가 되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날을 기념하며 축하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첫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셔서 평안을 주시고 함께 식사를 하게 된다(눅24:36-43). 이 만남과 식사는 부활하신 주님과 제자들 사이의 첫 교제이다. 이후부터 이들은 자연스럽게 첫날에 있었던 주님과의 특별한 만남을 중요시하며 모여서 그 사건을 기념하였다. 이 외에도 적어도 네 차례나 주님은 주일에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 (요20:11-18, 마28:7-10, 눅24:13-33, 34). 결국 초대교회가 안식일 준수에 관심을 갖지 않고 주일 예배에 주력하게 된 결정적인 근거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첫 번째 만남이 안식 후 첫날에 있었고 이 날을 기념하여 모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날의 변화 못지 않게 주일 안에서의 시간의 변화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주님의 부활 이후 초에는, 일요일 저녁에 모인 것 같고 후에는 아침에 모인 것 같다. 저녁이 낮으로 바뀐 것은 초대 기독교인 집회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노예들이 예배에 참석하기에 자유로운 시간이 아니었다는 견해와 박해를 받는 무리들이 비밀리에 행동할 필요가 점차로 증대되자 예배가 주일 아침 이른 시간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성서백과대사전 10권 1981:851). 그러나 이것보다 그리스도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부활하셨다는 것과 제자들과의 식사보다 성만찬 의식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더 합당하겠다. 결국 성경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이후 그들의 예배일을 안식일에서 주일로 변경하여 지켰음을 말한다. 이 날의 변화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안식 후 첫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이 날에 크리스찬들이 모여 함께 떡을 떼며, 부활하신 주님께 경배했다. 이것은 사도들의 모범이었고 또한 교훈이었으므로 그 날을 지켜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예배 시간도, 처음에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첫 만남의 시간(저녁)을 생각하여 그 날 저녁에 집회를 가졌으나 예수의 부활시간과 성찬의 용이한 집례를 위해 낮 시간으로 변경하여 지켜져 왔다. 2.3.2. 안식일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안식일 제도를 유대인에게 주어졌던 율법주의적 제도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속사적 언약의 관점에서 보는 신학자들은 안식일 제도의 본래 의도했던 목적과 내용이 연속적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김명혁, 주일성수에 대한 교회사적 고찰, 신학지남, 1977 겨울호:63). 여기서 연속성이란 그리스도에 의해 안식일 제도가 폐지된 것이 아니라 완성 되었고, 구속을 완성하신 날인 부활을 기점으로 해서 이후 신자들은 주일을 지키게 되었으며, 이것은 주님의 부활과 재창조를 기념하는 동시에 앞으로 완성될 구원과 영원한 안식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안식일이 그리스도의 초림을 예표하고 있다면 주일은 예수의 재림을 예표한다고 본다. 레위기 24장 5절부터 9절의, ‘.....항상 매 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할지니 이는 영원한 언약이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이미’(already) 얻은 안식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얻게될 ‘아직’(not yet)의 안식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안식일이 폐지 되었다’ (기독교강요 2권 8장 28항)는 칼빈과는 달리 우리는 안식일과의 연속성을 주장한다. 연속적 의미를 수용한다고 해서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을 율법적으로 지킨다는 말이 아니라 일주일 중 주일을 특별히 구별하여 예배와 교제와 봉사를 위하여 하루를 산다는 뜻이다. 쥬이트 교수는 안식일과 주일의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구약의 것이 신약에 와서 완성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두 날의 의미를 구속사의 진행과정에서 찾고 있다. 양자를 분리하는 안식일 폐지론이나 안식일 준수를 고수하는 율법주의는 모두 구속사의 진행과정을 착각하는 말시온적 과오나 유대주의적 과오를 범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쥬이트 전게서:77-114). 구약의 성도들이 안식일을 은혜의 방편으로 여긴 것, 안식일에 제사드리는 문제나 제 칠일을 특별히 거룩히 여기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 되었으며 또한 변형 되었다. 날이 바뀌었고 제사적 요소가 사라졌다. 이는 마치 구약의 할례가 신약의 세례로 바뀐 것과 같다(골2:11-13). 할례의 본질적 요소는 세례에 포함되어 있으나 외적 의식은 변화 된 것처럼 안식일의 본질적 요소는 신약에 그대로 보존되지만 날의 변경이나 제사적 요소 같은 부분들은 그리스도의 성취로 단절된다. 여기서 안식일과 주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엿볼 수 있다. 연속적인 면인 창조, 구속, 부활의 은혜를 감사하고 예배 드리는 것은 더욱 강화 되어야 하겠다. ▶▶ 2.4. 성경에 근거한 주일성수의 실제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주일성수를 강조해 왔다. 물론 주일성수의 개념과 방법이 율법주의적으로 이해되고 시행되어진 경우도 허다하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이 문제는 논란의 주제가 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이미 성경에서 밝혀진 것을 근거로 주일성수의 올바른 방법을 고찰함으로 주일신학의 실제적 안목을 제시하려고 한다. 2.4.1. 부정적인 요소 세상적인 일들의 중단이다. 먹고 생활하기 위한 육 일간의 노동을 중단하고 하나님 안에서 쉬는 것이다. 육 일간 노동하고 하루를 휴식하는 순환원리는 하나님 자신이 행하셨던 제도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일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친히 이 패턴을 지키셨다는데 의미가 크다 (J.Murray, The Principle of Conduct, Grand Rapids:Eerdmans, 1957:34). 한 날을 주님께 구별하여 예배드리기 위해 육 일간 행하던 평소의 활동을 중단해야 한다. 노동을 중단해야 하는 범위는 주인과 남녀 종들, 객 그리고 짐승들이다. 이방인 객이나 짐승들은 사실 안식일과 관계가 없지만 그들이 노동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험을 받기 때문에 시험 될만한 요소를 제거하라고 명령하셨다. 또한 주인은 종들이 주일을 지키는데 방해받지 않도록 충분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모든 상거래를 중단해야 한다. 수입을 위하여 물건을 팔지도 말아야 하며 육적 안일을 위해 사지도 말아야 한다. 밭을 갈거나 거두는 일, 포도즙 틀을 밟거나 물건을 운반하는 일, 나무하는 일, 장사하는 일을 금했다. 또한 오락과 사사로운 말까지 금해야 한다. 세상으로 기울기 쉬운 스포츠, 영화, 오락을 삼가하며 또한 은혜받기 위하여 불필요한 언행도 삼가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세상적 욕망까지도 억제해야 한다. ▶▶ 2.4.2. 긍정적인 요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제 사계명은 적극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교회에 모여 말씀과 기도와 찬송과 교제와 성례를 행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공예배이며 주일의 핵심 행위이다. 나아가 개인적 기도와 묵상도 주일에 행할 의무이다. 모든 기독교인은 이 날을 존귀하게 여겨서 공, 사적 예배에 우선 참여해야 한다. 칼빈은 “우리 마음은 변덕스럽고 은혜를 잊어버리기 쉬우므로 한 날을 정하여 모든 세상적 일들을 중단함으로 거룩한 일들을 방해하지 않게 하셨다. .....반드시 성전에 모여 기도와 예배르 드리면서 말씀의 강론을 통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했다 (Benjamin W. Farley, John Calvin's Sermon on the Ten Commandments,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0:104). 예배 후 월요일부터 한 주간 동안 열심히 일해야 한다. 안식일은 먼저 일하고 쉬는 날이나 주일은 먼저 쉬며 받은 은혜로 한 주간을 사는 것이다. 안식일이든 주일이든 하나님의 일하심처럼 청지기로서 열심히 일할 때 쉼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안식이 창조노동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노동을 떠난 주일의 의미는 없다. 부득이한 일이 있을 수 있다. 유대 지도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병자를 고쳐 주신 것, 소나 나귀를 웅덩이에서 끌어내는 행위는 공인된 것이며 긴급하고 부득이한 사건이므로 허용적이다.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는 일과 긍휼을 베푸는 일과 경건에 속한 일들은 정당화 된다. 마찬가지로 주일에 의사가 죽어가는 환자를 보고도 치료해 주지 않는 것이나 화재난 이웃을 보고도 주일을 핑계로 무관심 하다면 이것은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래서 대요리문답서에서도 ‘부득이한 일은 허용하고 있다’(117번). ‘그러나 부득이한 일의 판단은 상황에 따라 항상 상대적이기 때문에 지혜로운 결정이 필요하다’ (박희석, 웨스트민스터 고백에 나타난 안식일, 신학지남, 1990 겨울호:176). ▶▶ 3. 결론 안식일은 인간 타락 이전의 창조명령으로 주어졌다. 창조주 하나님이 그의 창조의 완전함과 압제에서의 자유, 해방 그리고 구원을 기념하라고 제정하신 것이다. 이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완성 되었고,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모든 관습과 의식적인 면으로부터 자유를 선언 하셨다.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선언은 날에 얽매일 필요가 없음을 시사한다. 바울도 주님과 같은 입장이나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자로 부활의 날에 모여 떡을 떼며 말씀을 들으며 기도할 것을 말함으로 주일예배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처음에는 안식일과 안식후 첫 날 예배를 병행해 오다가 점차 유대주의와 분리하게 되었다. 안식일에서 주일로의 날의 변화는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많으나 부활이후 주님이 첫 번째 제자들과의 만남을 기념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안식 후 첫날의 집회는 다양한 예배환경 속에서 발전해 오다가 현재의 예배일로 고정되었음을 2세기 중엽의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Didache와 Ignatius, Clement of Alexandria, Tertullian의 글에서). 주일은 부활 즉, 재창조와 구속을 기념하며 축하하는 날이다. 중요한 날이긴 하나 안식일처럼 하나님에 의해 명령된 날은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 안식일은 더 좋은 안식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하늘에서의 영원한 안식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그 안식에 들어 가고자 하는 자들은 이 땅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성경의 제시를 따라 말시온적 과오나 유대주의적 과오를 범하지 않고 두 날의 연속성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 그리고 주일의 은혜로 한 주간을 충성스러운 청지기로 각 처에서 일해야 한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이정현 교수(서울성경신학대학원)의 글 중에서. 아래를 클릭 하시면... → 주일성수에 관한 여러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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