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대학교 음악치료사반/주일설교

에바다 (치유설교)

늘찬양 2022. 2. 26. 12:09

에바다

7:31-37,2022.02.27.늘찬양교회

 

 

. 귀먹고 어눌한 자의 이야기

 

오늘 본문 내용을 좀 더 잘 이해가 되도록 각색한 글이 있어서 제가 퍼왔습니다.

제목은 <에바다 이야기>입니다. 나는 10개의 마을로 이루어진 데가볼리지방에서 살고 있습니다. 눈을 뜨면 맑은 햇살과 고운 새들을 볼 수는 있었지만 새 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따스한 음성도, 형제들의 고운 노랫소리도 들을 수 없었지요. 나이가 들어 청년이 되었을 때 비록 귀먹고 말 못 하는 언어장애인이었지만 무엇이든 해야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는 일을 통해 가족을 돕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산에 올라 새의 노랫소리를 그리며 상큼한 풀 내음을 맡으며 매일 매일 나무를 베는 일은 참으로 즐거웠습니다. 점심에 동생은 잘 구운 빵과 익힌 고기 싱싱한 나물을 무쳐왔답니다. 듣지 못해도 말하지 못해도 늘 기쁨이었죠. 어느 봄날 아침 그날도 일찍 연장을 챙기고 산에 올라 나무를 찍고 있었지요. 유난히 큰 아름드리나무라서 그놈 참 좋은 재목이 되겠는걸혼자 속으로 말하며 나무를 찍고 있었지요. 낮 한때가 되어 점심 식사를 기다리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내려치고 가자 생각하고 도끼를 들었지요. 누이가 산을 올라오다가 무엇을 본 것 같았어요! 그것은 나무가 꺾여 쓰러지면 부서질지도 모를 작은 집 한 채가 산등성이 밑에 있었어요. 늘 산을 올랐지만 반대편은 보지 못한 것이었죠... 누이가 저를 불렀어요. 오빠. 오빠. 그 나무를 찍지 마세요. 그 밑 산 아래에 집이 있어요. 사람이 살고 있어요. 오빠!” 나의 귀는 막혀있었고 나의 귀는 닫혀 있었기에 미처 누이가 내게 와서 말하기 전 나무의 밑둥치는 잘려 쓰러졌지요. 그런 후에 집이 무너지는 사고로 인명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난 나무를 벨 수도 없었고 베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더욱 심히 놀려댔고 난 햇빛이 들지 않는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나의 귀를, 나의 부모를, 나의 누이를 원망했지요. 그렇게 나의 삶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어느 날 유난히 햇살이 창문을 비집고 들어 오던 날, 친구들이 내게 몰려왔지요. 그리고 다짜고짜 나를 붙잡고 어디론가 데려갔습니다. 친구가 손에다 글을 써주는데. “너도 말을 할 수 있어 너의 좌절을 희망으로 바꿀 거야! 너도 들을 수가 있어 들을 수 있어!”...

들을 수 있다고? 미친놈들. 말할 수 있다고? 나를 놀리는 거냐? 나는 태어나면서부터이랬어! 나는 병신이야! 제발, 나를 그냥 나줘!!” 그때 내 눈 안에 누군가를 볼 수 있었지요. 그렇게 부자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좋은 옷을 입고 훌륭한 가문의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그러나 얼굴은 자상하였으며 무엇인가 힘이 있어 보였지요...

막연히 이런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 이분이 내 귀를 열고 내 입을 열어 주실지 몰라그 분은 나를 보자마자 나를 따로 불러 세우시고는 조용히 아무도 몰래 왼손을 들어 나의 귀를 막으셨읍니다. 어떠한 따스함이 일었어요...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침을 묻히시고 내 혀에 그 손을 대셨지요. 그리고 무엇인가를 말씀하셨지요. 하늘을 보며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닫힌 세상이여, 이 막힌 사람들이여, 사랑치 못한 사람들이여, 답답한 형제들이여, 귀가 있어도 말씀을 못 들으며, 입이 있어도 전하며 찬양하지 못하는 자들이여, 닫힌 마음을, 닫힌 가슴을, 닫힌 입을 열어라” ...하시고는 에바다...” ,“열려라고 명령하셨어요! 천지가 깜깜해지고 온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귀의 막힌 것이 열리고 입이 맺힌 것이 풀렸지요. ! ! !” 나의 말은 탄식을 토해놓고 그렇게 그리던 말을 하며 그렇게 그리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위대하고 전능하신 주! 당신을 찬양합니다. 나의 찬양을 받으소서

 

이처럼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하며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습니다. 귀먹고 어눌한 자는 영적으로 볼 때 심령의 귀와 양심의 혀가 각각 마비된 자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듣지 못하는 심령의 귀먹은 자와, 의와 진실을 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일을 위해 침묵하는 마비된 양심의 혀를 가진 자를 뜻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듣기를 외면하고 눈에 보기 좋은 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시는 오늘의 치유사건 속에서 아주 특이한 점 하나를 발견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사역을 다른 곳보다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는 말씀 한마디로 고치신 것이 아니라 손수 한적한 곳으로 데려가셔서 그곳에서 환자의 양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어 바르며,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기도하신 이후에 에바다 열려라명하시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어져서 말도 하고 듣게도 되는 치유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특별한 치유사역

 

첫째, 병자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33)

33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조용한 곳으로 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행동하심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겁주거나 두들겨 패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병자로 하여금 평안한 마음을 갖게 하고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또한 군중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피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들 앞에서 직접 손가락을 병자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는 등의 치유사역을 행하셨다면 이 모습을 잘못된 치유사역자들이 본받아 병자들을 고친답시고 귀를 자꾸 쑤셔서 고막을 상하게 한다거나 침을 얼굴에 뱉어 인격적 모독을 준다든지 하는 잘못된 행동과 위험스러운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지만 사건 추적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니까 어떤 사이비 치료사가 병자를 안찰한답시고 너무 심하게 사람을 때려 시퍼렇게 멍들게 하여 골병들게 만들고 또 이초석이라는 사람은 눈에 들어있는 귀신을 쫓는답시고 두 눈을 손가락으로 꾹 찔러 쓰러뜨리다가 실수로 눈을 다쳐 시력을 잃어버리게 한 사례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차원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은 조용한 곳에서 환자와 개인적으로 만나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하고 그동안 자신이 살아오면서 장애로 인하여 남을 원망하며 불평하며 미워하였던 죄스러운 마음들을 회개하도록 내적치유를 행하셨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을 영접케 하므로 구원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 것입니다.

 

둘째, 손가락을 병자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33)

예수님은 일대일의 만남 속에서 귀먹고 어눌한 자의 양 귀에 자신의 손가락을 넣었습니다. 거기다가 침을 뱉어 그의 혀에 대셨습니다. 이 같은 치료행위는 다른 병자들을 치료할 때 전혀 볼 수가 없었던 장면입니다. 또 필요치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전에 실로암 연못에서 소경을 고치실 때 진흙을 만들기 위해 침을 땅에 뱉어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양 귀에 손을 넣기도 하고 또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신 것은 처음입니다. 그만큼 환자의 병이 얼마나 중한 상태인가?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또한, 이 같은 치유사역을 통해 예수님은 병자들의 형편과 상황에 따라 손을 직접 대시기도 하시고(8:3), 말씀으로만 고치시는(4:50)등 다양한 치유방법을 행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 같은 치유방법의 원리는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스킨쉽의 원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귀먹고 어눌한 자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놀림을 당하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인공포와 미움도 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마음은 더욱 삭막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킨쉽 원리의 치유 사역을 통해 환자를 보듬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환자를 껴안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환자는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 혀에 대시고 귀를 쑤시는 행동을 하여도 가만히 있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말씀사역, 찬양사역, 치유사역 모두가 다 그 근원이 영혼 사랑에 있어야 합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는 예수님의 본질적인 사랑의 모습은 귀먹고 어눌한 환자에게 조금도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않고 더욱 친근한 관계로 맺어졌고 또 원하는 대로 깨끗하게 고침을 받을 수 있었기에 예수님과의 만남은 더없는 행복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귀먹고 어눌한 자는 예수님과의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접촉과 만남을 통해 악한 저주의 병에서 고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예수 사랑의 마음이 치유 사역을 비롯한 모든 사역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방법론을 가지고 나서면 마술사 시몬처럼 망하고 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고치셨습니다.(34)

예수님께서는 양 귀에 손을 넣고 그 혀에 손을 대신 것 외에도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기도하신 후에 에바다 열려라 명하시므로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정상적으로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기도하시던 다른 장면이 있었는데 기억이 나십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저녁이 다 되어 가는데도 불구하고 동산을 떠나지 아니하고 말씀을 간절히 들을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말씀증거를 중단하시고 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어 식사를 해결한 후에 와서 말씀을 듣게 하시죠!” 며 건의를 하였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갈 것 없다 너희들이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라.” 하시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먹을 양식이 없어 기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기갈로 말미암아 방황하는 많은 영혼을 향하여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어리를 가지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후에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매 거기 모인 5천여 명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부스러기가 12광주리나 되는 그런 오병이어의 기적(9:12-17)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귀먹고 어눌한 자의 치유사역 속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는 장면이 나온 것은 그만큼 귀먹고 어눌한 자를 향한 애끓는 마음의 대변인 것입니다. 이렇듯 애통이 기적을 낳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애통의 마음을 가지고 주위에 병들어서 고통 하는 자 예수를 알지 못해 방황하며 근심하는 자들을 찾아가 병을 고쳐주고 예수님을 영접케 해야 합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즉 구령의 열정이 주님의 심정입니다. 우리 속에 이러한 마음이 식으면 우리는 그때부터 교만하게 되고 이기적으로 되며 타락의 길로 들어설 위험이 많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는 날마다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 온유한 마음,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 청결한 마음, 화평케 하는 마음(5:3-10)을 갖게 해달라고 주님께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지금 이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소통의 부재입니다. 그 결과 고독사가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귀먹고 어눌한 자역시 나 홀로지낼만한 충분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분문 32절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듯이 어려움 당하는 이웃에 관한 관심과 사랑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실직과 파산의 고통으로 울화통에 빠져있는 이웃, 전기세 조차 못내어 집 앞에 고지서가 쌓인 집이 내 이웃에 있을 수 있습니다...돌아보아야 합니다. 길 고양이 밥은 갖다줄줄 알면서

어떻게 이웃은 돌아보지 않는지...그런 우리의 모습이 귀먹고 어눌한 자의 모습과 동일하다는 인식을 갖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며 돌아보아야 합니다.

 

코로나 펜데믹과 거리두기로 인하여 나홀로 신앙인이 더욱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내 영혼과 이웃에 대하여 관심과 애정을 갖기를 원합니다.

귀먹고 어눌한 자를 치유하신 예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시사, 영적으로 닫힌 우리의 귀와 입을 여시기 위해 에바다를 명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구령의 열정, 예수님의 심정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