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봄의 법칙
히 11:1~3,2022.02.20.늘찬양교회
황성주 박사가 쓴「성서 건강학」에서 인간의 뇌와 연결된 신경 중에서, 보는 것이 가장 발달되어 있다고 합니다. 시신경이 유난히 크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눈은 우리 뇌의 사고 기능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운전할 때 자동차의 시야가 가려지면 운전을 할 수 없듯이, 눈의 피로해지면 심신이 따라서 피로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혹사하면 두통이 생기며 만사가 귀찮아지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6장 22절에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시며 눈과 몸의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보는 것이 몸을 이끌어가는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본다는 것은 굉장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취업하는 것이 힘들다고 아파트를 사는 것이 어렵다고 결혼하는 것이 어렵다고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어렵다고 처음부터 포기하고 되는 대로 사는 것은 믿음의 법칙에 바라봄의 법칙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결코 자신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낙심하기보다는 믿음의 눈을 떠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봄으로써 구원받은 주의 백성으로 건강한 삶과 행복한 믿음 생활을 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Ⅰ. 바라봄의 1 법칙(아브라함)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75세가 될 때까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름 없는 목자였습니다. 그런 평범함이 우리가 부족함에도 주의 자녀가 되어 축복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축복의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창세기 12장 1-2절에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는 약속의 말씀을 좇아갈 곳을 알지 못하였음에도 순종하여 떠났다는 이 말씀 속에서 바라봄의 제 1법칙이 등장합니다.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은 소가 언덕이 있어야 몸을 비비듯이 인생의 꿈을 펼쳐나가는 데 있어서 금수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대변하는 말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나 땅이 있거나 친척 중에 누군가 사업을 하고 있거나 정치권에 몸담고 있다면 출세 가도는 그만큼 빠를 것입니다. 그런데 “흑수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지금 시대에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말은 너무나도 힘이 빠지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주저했을 것입니다. 인생을 책임질 75세의 나이에 딸린 아내와 가족도 있는데 아무것도 기댈 것 없는 낯선 땅으로 떠나 새로운 생애를 개척한다는 것은 사지(死地)로 끌려가는 것 같은 무모하고 두려운 것이었기에 조카 롯을 데리고 함께 떠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걱정과 두려움은 애굽 땅에서 자신의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이는 부끄러운 모습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두려움과 걱정이 많은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천막 밖으로 나오게 한 후 하늘의 수많은 별을 보여주며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며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 아브라함을 안심시키시며 축복해 주셨습니다. 앞서
창세기 13장 14절로 15절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며 축복해 주셨습니다.
황성주 박사는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바라보고, 바라보는 것을 사랑하게 되어 눈이 가는 곳에 마음이 따라다닌다.”고 말하였습니다. 보는 것에 마음이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보는 것의 마력”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강자라도 보는 것의 마력 앞에서는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라디오에 비해 TV의 영향력이 큰 이유도 TV는 청각과 함께 시각이 함께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해서 부정적으로 삶을 바라보지 말고 믿음의 눈을 들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소망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게 되고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꿈을 가슴에 새기며 희망찬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Ⅱ. 바라봄의 2법칙(야 곱)
야곱은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장자권의 축복을 소망하며 형 에서의 발을 붙들고 나왔다 하여 그 이름을 '속이는 자, 빼앗는 자, 발뒤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의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야곱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탈취하고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권을 받은 후 형 에서의 분노를 사서 목숨을 부지하고자 밧단 아람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외삼촌의 양 떼를 돌보면서 두 딸 중 동생 라헬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간파한 외삼촌 라반은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을 갈 수 없다는 자신들의 풍습과 관례를 들어 무임(無賃)으로 14년을 일하게 하였습니다.
야곱은 외삼촌의 속임수에 분풀이를 함과 동시에 자신의 부를 축적하고자 양이 새끼를 낳기 위해 교접을 할 때 창세기 30장 37-39절에 기록된 대로 “버드나무와 살구나무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보여주므로 …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점없는 양보다 점박이 양이 더 많이 출산되게 됨으로써 외삼촌의 소유보다 자신의 소유가 더 많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2장 14-15절에 보면 그 구체적인 소유가 나오는데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야곱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일에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일에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하였습니다.
금리가 낮아지고 일터에서 일하는 급여가 줄다 보니 사람들이 주식과 증권 부동산 등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영끌까지 하면서 부동산 구입에 열을 올렸습니다. 유투브마다 돈 버는 주제의 동영상을 만드는 크리에이터들이 상한가를 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조차도 이런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다 보니 저마다 살궁리를 찾느라 신앙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안 보이고 오직 돈과 부를 쌓는 일에만 몰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이 온 힘을 쏟으며 쌓은 부와 권력이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였습니다. 야곱의 마음 한구석에는 형 '에서'에 대한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자신이 쌓은 물질과 종을 보내면 형의 분노가 사라질 줄 알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각종 예물과 가축과 종들을 보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 모두를 보내었습니다.(창 32:22-23) 그런데도 화해(和解)의 소식은 없고, 계속해서 에서가 군대를 이끌고 야곱이 현재 머무는 얍복 나루를 향해 오고 있다는 전갈뿐이었습니다. 그동안 쌓은 모든 수고와 재산이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는 일에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된 것입니다.
주식, 부동산, 증권, 보험을 비롯한 여타 그 어떤 세상의 것도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빨리 깨닫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전능자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이제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가 취할 방법은 모두 다 해보았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길은 '오직 죽음'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고 바라보므로 살아남는 길 두 길 중에 한 길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서야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합니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밤새워 씨름하는 동안 자신의 환도 뼈가 위골 되었음에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죽기 살기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 결과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축복을 통해 생명을 구원받고 형과 화해하며 고향 땅으로 금의환향할 수 있었습니다.
Ⅲ. 바라봄의 3법칙(모 세)
민수기 20장 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마시는 물 때문에 모세와 아론을 공격하며 다투었다는 말씀이 있고, 21장 4-6절에 보면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문제는 의식주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저들이 모세를 원망하며 시비를 건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들을 심판하시고자 본문 6절에 있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불뱀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죽게 한 것입니다.” 이렇듯 원망, 불신, 배신의 결과는 저주의 재앙과 죽음뿐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과는 똑같습니다. 코로나 델타에 이어 오미크론의 감염으로 수많은 감염자와 희생자들이 늘어나는 상황이었을 때 교회는 코로나가 대유행인데 꼭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만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냐? 며 많은 욕을 먹었습니다. 그런 결과로 많은 교회들이 대면예배를 중단하고 인터넷, 유투브 등의 비대면 예배로 예배형태를 바꾸었습니다. 그렇게 2~3년이 흐른 가운데 자영업자들이 무너지듯 힘없는 개척교회를 비롯한 수많은 교회가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위기를 수습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7-9절을 보면 백성들이 원망하므로 범죄했다며 기도해 살길을 열어 달라고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모세는 이 참담한 상황을 다시금 하나님께 내어놓고 회개와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다음 사건이 중요합니다.
9절을 보면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 즉 살더라.”고 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놋으로 만든 뱀은 아무런 힘도 신통력도 치유능력도 없는 무생명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법이었기 때문에 놋뱀을 쳐다 본 사람들은 죽음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 14~15절에서 이 사건을 설명하셨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으며 사도행전 16장 31절에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또한 “어떤 어려움이 있든 나를 구하라 나를 찾으라 나를 바라보라. 그러면 산다.”(마 7:7-8)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약속을 그대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무슨 소리, 뱀독이 온 몸에 퍼져 가고 있는데 구리뱀을 바라보면 산다고... 불뱀에 물렸으면 병원에 가서 독을 빼든지 응급처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지...어떻게 놋뱀을 바라본다고 살아날 수 있는가?...그렇게 말하며 놋뱀을 바라보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죽었습니다...
지금 코로나 팬데믹으로 거리 두기를 시행하고 있는데 교회를 나간다고 지금 정신 있는 말을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교회를 출석을 거부하던 사람들의 신앙도 하나같이 죽었습니다. 코로나 펜데믹 거리두기 이후 확진자수가 60만 명을 돌파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임허가 인원을 6명에서 8명으로 늘렸습니다.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정부가 결국 코로나의 확산을 포기하고 집단감염으로 인한 면역력 강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연 치유능력에 맡겼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개인의 위생관리와 방역관리가 중요해졌듯 신앙도 이제는 개별적으로 관리해야 합니다. 신앙적 위기임을 직감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오늘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구원받은 주의 백성으로서 내가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를 분명히 살펴서 바라봄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 없기를 축복합니다.
Ⅳ. 결 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뭇별을 바라보게 하심을 통하여 희망과 소망 그리고 비전을 품게 하였듯이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셨을 때는 분명한 목적과 뜻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가 복의 근원으로서 세상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하지 못하고 절망과 좌절과 낙심의 그늘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드리는 순종의 믿음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그렇게 믿음의 인정함을 받을 때 축복의 사람 아브라함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야곱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수단과 방법 세상적인 물질과 부를 가지고는 행복은 물론 생명을 담보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세상의 부와 권력과 방법을 통해 평안을 얻으려는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서 전능자 하나님을 바라봄을 통해 삶의 행복과 기쁨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세의 놋뱀을 통해서 구원의 유일한 방법은 문제의 유일한 해결 방법은 주님밖에 없음을 깨닫고 어려운 문제에 부닥쳤을 때 말씀의 원리 기도의 원리 감사의 원리를 통해 문제 해결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놋뱀을 몇 분 이상 바라보아야 하느냐? 어떤 쪽에서 바라보아야 하느냐? 각도는 어느 정도라야 하느냐? 바라보는 눈의 크기는 어느 정도라야 하느냐? 바라볼 때 곁에 누가 있어야 하느냐? 등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교회에 열심히 다녔느냐, 교회의 직분은 무엇이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얼마나 주님을 가까이 의지하고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날마다 큐티하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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