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
왕상 19:9-14,2014,12,14.늘찬양교회
이세벨 왕후가 아합 왕으로부터 자신이 그렇게 아끼는 선지자들이 엘리야에게 죽음을 당하고 기손 강에 수장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신을 보내어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왕상 19:2)는 저주의 말을 듣고 엘리야는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하여 광야 로뎀 나무 아래에 드러누워서 “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난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차라리 나를 죽여주옵소서!"(4절)하고 절망과 낙심 속에 원망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천사의 모습으로 찾아오셔서 엘리야의 어깨를 어루만져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일어나서 먹으라.”(5절)며 숯불에 구운 떡 하나와 그리고 또 한 병의 물을 두 차례나 먹고 마시게 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晝) 사십 야(夜)를 쉬지 않고 걸어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왕상 19:5-8) 이렇게 호렙산에 도착한 엘리야는 동굴에서 며칠 동안 잠에 푹 떨어져 자면서 쉼과 회복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금 엘리야에게 임하였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9,11절)하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엘리야야, 네가 왜 여기 와 있느냐? 네가 어찌하여 이곳까지 피신 해와 있느냐? 네가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만 다니고 있겠느냐?"고 물으시는 장면입니다. 오늘은 호렙산 동굴에 숨어든 엘리야 선지자에게 세미한 음성가운데 다가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선지자 엘리야의 답변을 통해 우리가 본 받아야할 영적 교훈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Ⅰ. 선지자 엘리야의 문제점
사람이 세상을 살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납니다만 가장 견디기 힘든 어려움 중 하나가 외로움 즉 고독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외로움을 느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혹 지금 외롭다고 느끼십니까? 외롭다는 것, 정말 참기 힘든 고통입니다. 우리가 가난이나 질병 혹은 실패의 어려움도 겪어 봅니다만 그럴 때 누군가가 곁에서 함께 해주고 그래서 외롭지만 않으면 그런 대로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망망대해(茫茫大海) 같은 세상에서 ‘나 혼자다.’라고 생각될 때 그래서 고독감을 느낄 때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됩니다. 고독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일상적인 고독이 있습니다.
부모 없는 고아가 외롭습니다. 그런가하면 자녀 없는 부모 또한 외롭고, 친구나 동료가 없이 외톨이로 살아가는 사람이 외롭습니다. 질병도 사람을 외롭게 만듭니다. 병에 걸려 오래 누워 있게 되면 점점 찾는 사람도 줄어들고 결국 나중엔 홀로 병상을 지켜야합니다.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늙음도 고독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입니다. 늙어 가면 점점 주위의 사람들에게서 멀어집니다. 나에게 관심을 주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곁에서 떠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늙는다는 것도 고독의 큰 원인이 됩니다.
둘째, 사회적 고독이 있습니다.
친구도 있고 몸도 건강하고 모든 일들이 다 잘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은 왠지 늘 허전하고 외롭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합니다만 그럴 때면 오히려 더 큰 외로움을 느낍니다. 여기에 현대인의 또 하나의 고독이 있습니다. 고독이란 원래 말 그대로 혼자라는 것을 느끼는 데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많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고독은 사라져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많은 사람과 함께 어울릴수록 더 외로움을 느낍니다. 이것은 현대 사회의 특징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이유를 말합니다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기 자신 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기만 생각했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함께 있으나 사실은 단절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고독의 담을 쌓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롭습니다. 사회적 고독 또 하나의 우리들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적 고독이 있습니다.
모름지기 가장 근본적인 고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다가, 혹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느끼는 외로움입니다. 우리 신앙인으로서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독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엘리야에게서 우리는 영적 고독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시대는 악한 왕 아합과 그의 간교한 아내 이세벨로 인해 영적으로 캄캄했던 시대였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무조건 죽였습니다. 엘리야도 저들에게 쫓기어 삼 년을 숨어살았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용기를 얻어 바알 신의 제사장들과 850대 1로 대결을 합니다. 갈멜산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바알이 참 신인지 여호와가 참 신인지 대결을 하자"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여기서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제단을 태우는 통쾌한 승리를 거둡니다. 그리고는 주저하지 않고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 850명을 끌어다가 전부 기손 강에서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대단한 용기요 대단한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이세벨이 복수를 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엘리야는 다시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혼자 광야 길로 도망을 가다가 피곤하고 지쳐 한 그루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는 하나님 앞에 차라리 죽여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이제 넉넉하다고, 더 살고 싶지 않다고, 하나님께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먹을 것을 주시고 어루만져주셔서 엘리야를 소생케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그 힘으로 사십 일을 걸어 호렙 산에 이르렀습니다. 호렙산에서 한 굴을 발견하고 그 굴에 들어가 지쳐 쓰러졌습니다. 이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천사의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 엘리야를 위로하시면서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물었습니다. 할 일이 많은데 어찌하여 여기 굴속에 혼자 쓰려져있느냐는 뜻입니다. 백성들은 우상숭배의 죄악에 물들어져 가고 나라는 죄악으로 어두워져 가는데 하나님의 선지자가 어째서 굴속에 혼자 숨어 있느냐는 책망입니다.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습니다. 주의 제단을 헐었고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다 죽였고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마져 죽이려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갈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14절) 엘리야는 지쳐있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외로웠습니다. 영적 싸움에서는 승리했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핍박과 고난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너무나 힘들고 외로웠습니다. 이제 만사가 다 귀찮고 싫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철저한 능력의 한계를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외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탈진상태에 들어간 이유 중에 잘못된 생각이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열정을 다하는 사람이 자신 밖에 없다는 착각이었습니다. 엘리야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하나이다”(10,14절)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선지자, 목회자들도 일반 사람처럼 똑같이 혼자라고 생각할 때 외로움을 느끼며 더 나아가 영적침체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이 엘리야의 고독을 어떻게 치료하시느냐 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도 영적 고독에 대한 하나님의 치료법이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고독을 어떻게 치료하십니까?
Ⅱ. 어찌하여 네가 여기 있느냐?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물음에 대하여 “주의 선지자들을 다 죽였고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마져 죽이려 합니다.”(10,14절)고 대답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다시금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1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여호와의 산 앞에 서있는 선지자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강력한 바람 가운데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천지를 뒤엎는 지진(地震)과 불 가운데서도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불이 지나간 후 세미(細微)한 소리가 들렸는데 그 가운데서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 내용은 재차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13절)고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왜 두 번씩이나 반복해 가시면서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물으셨을까요? 그 물음에 담겨있는 깊은 뜻은 무엇일까요?
첫째, 과거 신앙을 회상케 하는 질문입니다(9절).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질문에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유별합니다.”(14절)라고 재차 답변하였습니다. 엘리사는 불과 40일 전 만 해도 혼자 몸으로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상대로 영적 전투를 벌여 멋진 승리를 거둔 하나님의 전사(戰士)였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영적싸움에 승리한 용사였습니다. 엘리야의 변명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자신의 과거 믿음과 열정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숨은 의도를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간혹 커다란 실패와 질병 등으로 낙심하며 절망할 때가 있습니까? 그럴 때 지나온 믿음 생활을 돌이켜보며 지금까지 도우셨던 “에벧에셀의 하나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을 기억하며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뜨거웠던 믿음, 신랑 되신 주님과 나누었던 첫 사랑의 열정을 다시 한 번 회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그 수많은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함께 해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할 때 내 안에서 새로운 영적 힘이 솟아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연약한 상태를 딛고 얼어 설 수 있는 참 용기가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계 2:5).
둘째, 현재 신앙의 소재지를 묻는 질문입니다(14절).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말씀은 지금 현재 엘리야의 믿음이 어떤 상태인가? 를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는 엘리야 선지자를 향한 회개의 촉구이기도 합니다. 그렇게도 당당하게 주의 말씀을 선포하던 엘리야가 호렙 산까지 피신하게 되었으니 그 믿음의 상태는 불을 보듯 뻔 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엘리야는 호렙산으로 피신하는 도중 그 육체적 고통과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는 심한 고독감과 좌절감으로 인해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4절) 간구할 정도였으니 엘리야의 영적상태는 절망과 같은 자포자기 상태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엘리야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물으시면서 잘못된 믿음을 회개하도록 촉구하셨던 것입니다.
셋째, 장래 믿음의 결단을 촉구하는 질문입니다(15-18절).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계속되는 하나님의 질문에 조금 더 심사숙고하며 자신의 모습과 더불어 어떠한 삶이 바른 사명자로서의 삶인가? 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엘리야는 계속해서 “하나님 저는 열심히 주의 일을 하였습니다. 전부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저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는 답변뿐이었습니다.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이렇게 나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11절에 "너는 나와서 산 어귀에 서라 굴 어귀에 서라" 하고서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였으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였으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이 지나간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었습니다.”(왕상 19:11-13)
Ⅲ. 세미한 음성
여기서 중요한 물음 하나를 던집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보여주신 ① 크고 강한 바람 ② 지진 ③ 불 이 3가지 이적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항상 크고 기이한 이적들을 요구합니다. 크고 강한 바람 같고 지진 같고 불과 같은 강력한 그 무엇을 원합니다. 짜릿하고 강렬한 체험을 원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역사하셔서 나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나를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나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이 느낍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으면 보따리를 싸들고 기도원으로 달려갑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소나무 뿌리를 붙잡고 목소리가 쉬도록 소리 높여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강력하게 하나님께 기도했으니 하나님도 나에게 쏜살같이 강력하게 기도의 제목에 응답하여 나타나주기를 바랍니다. 이벤트 적인 믿음입니다. 반면 이런 상징적 믿음의 표현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응답받을 자격조차 없는 신앙인들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한동안 기도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엘리야 역시 그동안 불을 내리는 일이라든지, 일곱 번씩 기도하여 큰 비를 오게 한 일이라든지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을 죽여 기손 강에 수장한 일이라든지 이 모든 것이 강력하고 화려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행한 자신의 사역을 최고로 여기며 대단한 긍지와 자랑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수고로움이 영광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도망자로 쫓기어 나타나다보니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회의감과 더불어 자존감에 커다란 상처를 받고 절망감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목회에 적용해 보면 각종 이적과 기적을 행하며 승승장구 성장하여 부흥의 대역사를 이루어 큰 교회의 담임이 된 목사님들은 성공한 목사님들이고 그렇게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힘쓰고 애써서 기도하며 전도하였는데도 교회는 성장하지 못하고 자립하지 못하여 여전히 지하교회로 개척교회로 남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영적 탈진 속에 있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이 땅에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안타까운 것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을 내려 주셔서 자신의 교회가 목회가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고 특성이 다르듯이 하나님께로 받은바 은사가 다른데 그런 외형적인 성장에만 초점을 모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성장위주의 교회정책을 펼치다보니 세계적인 대형교회도 많이 나왔지만 전체적으로 한국교회의 성도 수는 줄어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멋지게 화려하게 잘 지은 교회들이 지금 경매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의 본질에 충성하지 못하고 헛된 허상의 성장과 성공의식에만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지금이라도 성장위주의 교회정책을 빨리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흥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작지만 각자의 달란트를 좇아 의미도 있고 보람도 있으면서 행복한 하나님의 사역을 펼쳐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으십시오!... 목회의 고정관념을 깨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Ⅳ. 때 묻지 않은 7,000명
낙심하여 절망감 속에 있는 그러면서 자꾸만 과거로 회귀하려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큰 바람과 지진 그리고 불보다 더 중요한 사역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꾼을 찾아내어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가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16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8절에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며 충고하셨습니다. 엘리야로서는 단 한 번도 상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동안 나 혼자 남아서 열심히 아합 왕과 이세벨에게 대항했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싸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직도 때 묻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7,000명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복음은 단편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역 역시 단편적일 수 없습니다. 다양합니다. 복음을 외치는 장소와 사역지 또한 다양합니다.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교회의 크기와 성도 수에 따라서 등급을 매겨 외형적 성장을 이룬 목회자들은 최고로 좋은 자리에 앉게 해주실까요? 아닙니다. 오늘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저 시골 산촌, 어촌, 광촌에서 성도 몇 명 놓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채 눈물 뿌려 목회하는 목회자들도 귀하게 보신 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들이 더 큰 하나님의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큰 교회 목사님들은 이미 이 땅에 있으면서 다 대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미한 음성과 7,000명의 용사는 보이지 않지만 멋진 영화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열심히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일하는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기득권과 교만의 독선을 버리십시오...나만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이라는 생각,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만 의롭고 자기만 희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영적 고독의 원인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르게 살다가 외로움을 느낄 때 자기만 진실한 줄 생각합니다. 자기만이 의를 위해 사는 줄 생각하고 자기만이 참되게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다 부패하고 썩었는데 자기만이 바로 살고 자기만이 진리를 위해 살았는데 지금 내가 억울하게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 고독의 이유입니다. 알고 보면 이것은 교만이요 독선입니다. 교만이 고독으로 통합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슬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혼자라니 무슨 소리냐? 너만이 아니다 7,000명이 남아있다. 7.000명이나 있는데 왜 혼자라고 생각하느냐 책망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곳을 보라는 뜻입니다. 엘리야는 깊은 곳을 보지 못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가 보고 있는 것, 눈으로 보고 있는 것만 생각했지 보이지 않는 세계는 보지 못했습니다. 이 보지 못하는 곳에 복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여러 왕들을 세우는 일과 더불어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16절)고 명령하셨습니다. 후계자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일은 바른 후계자를 세우는 일입니다. 때 묻지 않은 사역자들과 함께 미래를
책임질 하나님의 일꾼들을 키우는 일입니다. 한국교회가 미래를 생각하며 바른 후계자를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렇게 교인 빼앗아가기, 대형교회로 수평 이동하는 현상 등을 통해 한국교회가 침체하고 욕을 먹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요란한 큰 바람, 지진, 불 많이 자신의 위대함과 성공을 자랑할 수 있는 지렛대가 되다보니 교회의 건물 짓기와 양적성장에만 혈안이 되었던 지난날의 목회와 좋은 후계자를 세우는 일에 힘쓰지 못했던 점들을 반성하고 또 거기에 휩쓸려 원망하며 낙심함 속에 영적탈진의 늪에 빠져 헛된 시간들을 살아왔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고 후대에 부끄러움이 없는 목사와 성도로 살아갑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목회자와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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